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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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앎과 삶의 거리 (3)
앎의 생산이 중요한 덕목 아니라
불필요한 앎 버리는 지혜가 필요

근대사회가 추구하는 지식(知識) 발전과 대량생산을 통해 우리의 삶은 아주 편해졌다. 그에 따라 우리는 과학입국의 슬로건과 더불어 지식의 재생산과 생산성 향상을 통한 양적 성장에 더욱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동조하지 않고 삶의 질을 말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시대에 뒤처진, 시대에 방해되는 무용지물의 취급을 받고 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아간다. 지식이란 논리적으로 상대를 이해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의 앎이다. 최근 모임에서 만난 어느 철학교수는 불교철학에 대한 책을 냈단다. 아마도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책이겠지만, 어차피 불교가 종교라면 과연 그 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경> ‘사구게’의 한 구절만이라도 생활 속에서 자기화 되어 있다면 이미 나와 있는 수많은 불교철학 책도 필요 없을 터인데.
지식(앎)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고 매우 소중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앎의 생산만을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으로 생각하는 문화 속에 있다. 행복하기 위해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미적분을 쓸 일이 없으며, 중국의 구지 선사도 엄지손가락 하나 평생 다 쓰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앎의 추구 속에 모든 가치를 두면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거나 듣는 이도, 생명과학을 직접 연구하거나 이를 접하는 일반인들도 그저 많은 양의 지식을 창출하고 배우고 또 재생산하는 데 찬사를 보낼 뿐, 자신들의 삶은 방치하고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지식 생산 외에 앎을 자신의 삶과 일치 시키는데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또 그런 것을 소중하게 평가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사회, 아니 수행의 종교라는 불교마저도 이러한 면을 잊어버리고 있는 듯하다. 책 많이 쓰고 말 잘하는 스님은 대접받고, 조용히 일상의 삶 속에서 포교와 수행에 힘쓰는 스님들은 오히려 무시당하는 풍토마저 보인다.
이미 우리가 지닌 불필요한 앎을 조금씩 버리고 필요한 만큼의 앎과 자신의 일상적 삶과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으로는 항상 깨어서 자신을 되돌아보아 이를 자신의 실생활에 반영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지식 창출과 생산성 추구로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이 시대 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더 이상 과잉된 앎을 만들어 내거나 쫓으며 살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찾아 즐겨야 한다.
이러한 하루하루의 삶을 즐기면서 행복하려면 유희(遊戱) 정신이 필요하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자리를 적극 수용함으로서 하루하루가 좋아(日日是好日)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이지, 단지 넘치는 앎만으로 혹은 그 앎을 바탕으로 너와 나를 준엄하게 분별하는 자세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앎을 놓고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며 너와 나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낼 때 가능하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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