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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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한 믿음으로 하나하나 실천하고 체험해야
벌써 오곡이 무르익어 가는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산천초목들도 모두 한 해 동안 결실을 맺기 위해 모진 고난을 감내했다는 생각에 일체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 가는 저희들도 마음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침 주신다면 성실히 실천해 가겠습니다.
우리가 여러 마디 하는 거보다도 제일 급한 게 뭐냐 하면, 자기 뿌리를 자기가 믿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하고 안 통하고 그걸 떠나서 자기 선장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그래서 잔잔하든 파도가 치든 양면을 다 놓고 자기 선장한테 일체를 맡겨 놓는 겁니다.
만날 하는 말이지만 거기에 닿지 않고 가는 분들이 너무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마음이지만 그 선장의 마음은 한마음이거든요. 그러니 그 선장이 끌고 갈 수 있게끔, 이렇게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게끔 만들어야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파도가 친다고 해서 막 그냥 배 뒤집힐까 봐 야단법석을 하면 그 선장이 끌고 갈 수가 없어요. 결국에는 배가 뒤집히게 되는 거죠. 그거와 같이 우리 몸뚱이를 배로 비유를 한다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선장이 자기를 이끌고 가는데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고 그런다면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거와 같습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통하지 못해 깨우치지 못했다, 즉 말하자면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끔 상봉을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자꾸 한군데다가 몰두해서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당신이 하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굴려놔라 이겁니다. 법륜을 굴린다 하는 것도 바로 이렇게 굴리는 거예요. 그렇게 굴려 놓으면, 깨우쳤다 깨우치지 못했다를 떠나서 진짜로 믿는다면 깨우치지 않았어도 직통, 즉 말하자면 찰나에 대뇌로 해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정수의 컴퓨터에 입력이 된다면 입력대로 그냥 나오게 돼 있으니까요.
내가 항상 그러죠. 이 세상에 누구를 믿을 데가 있느냐고요. 못났든 잘났든 네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너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자불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을 겁니까. 엄밀히 따져본다면 부모 자식 간에도 믿을 수가 없거든요. 항상 얘기하듯이 대신 똥 눠 줄 수 없고, 밥 먹어 줄 수 없고, 잠자 줄 수 없고, 아파 줄 수 없고, 죽어 줄 수 없고, 깨달아 줄 수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할지,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오직 자기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공, 자불밖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자불로 인해서 수없는 제불이 찰나찰나 엮어지니까요. 그리고 통신이 되니까요. 그리고 항상 들고 나시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말로만 ‘주인공! 주인공!’ 그러는데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고생은 해도 죽는 거 못 봤죠? 아주 끄트머리의 결과는 회향을 잘하고 끝내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아무리 죽을 일이 생겨도 대치를 하되 “스님! 이런 건 이런데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정히 급하면 그렇게 하고, 또 나는 대답을 할 때 “열심히 관하고 가세요.” 이렇게 하겠죠.
예를 들면 수술을 할 거는 수술을 하고 수술을 안 해도 될 거는 안 해야죠. 되는 것은 자기가 자중하면서 자꾸 관하면 그것이 어디로 갈 거라는 게 나와요. 자기가 실천을 옮기고 자기가 실험을 하고, 자기가 해 보다 보면 차차 차차 그게 경험이 되고 그래서 깨우쳐진단 말입니다. ‘이럭하면 되는구나!’ 하는 걸 알고선 쫓아가니까 어떤 게 닥쳐와도 해결을 할 수 있으니까 ‘아, 이 줄이 바로 반야줄이구나! 이게 바로 그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길, 미세한 티끌 수와 같은 세계로 가는 거구나!’ 하고 그냥 생각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 마음이 헤아릴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길이 수천수만이 된다 하더라도 한 찰나입니다. 요기서 조기 나가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고, 육체를 새 둥우리라고 합시다. 새 둥우리 속에 새가 들어 있다. 몸이 형성됐으니깐 그 속에 자불이 들어 있는 거지, 지붕도 안 해 놓고 부처님 모시는 거 봤습니까? 다 집을 마련해 놓고 자불을 거기다 모시는 거죠. 자불은 영원한 겁니다. 여러분의 자불은 다 같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업신여기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섭섭하게 하지 마라.’ 하고 모든 거를 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르치셨죠. 벌레 하나도 살생하지 마라 이랬구요. 그것도 네 생명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살아서, 우리가 살아서 공부하는 거지 죽으면 공부 못해요. 부딪치는 체가 있어야 되는데 체가 없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못하고 차원에 따라서 차례차례로 곤욕을 치룬다거나 또 차례차례로 곤욕을 치루는 게 다른 게 아니죠.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테니깐 말이에요. 그거를 또 한 번 벗어나려고 한다면 무척 고생을 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노력하셔서 좀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도리를 공부한다고 하면서도 주위에서 공부해 나가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참된 공부가 뭔지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기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문제나 또는 자기 가족들 문제나 자기한테 닥친 그런 어려운 상황들에 대해서만 마음을 내고 해결을 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진짜 욕심이고 기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은 참된 마음공부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울 때가 좀 많습니다.
기복이라기보다는 앞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세요. 만약에 누가 늙어서 죽는다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남 걱정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급해서 부지런히 길을 가는데 옆에서 싸운다, 옆에서 나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그냥 급하게 달려가지, 여기저기서 참섭하고 급하게 지금 가서 일할 거를 폐지시키겠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럼 한 번 극치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죽으려고 깔딱깔딱할 때 옆에서 잘못하고 잘한다고 그거 참견하게 생겼느냐고요? 우리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느냐 하면 자기가 나왔던 구녘으로 다시 들어가서 공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왔던 구녘에다가 자꾸 관하니까 거기에서 자꾸 힌트를 주는 겁니다. 그 힌트를 주고 어떤 때는 잘되게 했다가 안되게 하는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안되게 하는 거를 그대로 ‘안되게 하는 것도 너다!’ 그러고 거기다가 놔야 됩니다. 그게 굴려놓는 거거든요. ‘안되게 하는 것도 너니깐 되게 할 수도 있잖아!’ 하고 거기다 놔야 굴려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된다 안된다를 다 놓고 자기가 그냥 지금 현재의 생활을 판단해 가지고, 자기 분수도 생각해서 거기다 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도 빠질 게 없어요.
그런 건데 여러분은 남이 그런다고 하는데, 남이 그러기 이전에 여러분이 남 걱정하는 것도 끄달리는 거거든요, 그게. 죽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참견을 할 수가 있겠어요? 죽어서 지금 저승엘 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조심하구요, 모든 거를 보기에 안되는 거 같고 보기에 좀 트릿한 거 같고 또 못나게 보이고 그러더라도 ‘어, 내가 전자에 그렇게 못났을 때의 내 모습이로구나!’ 하고 자기 탓으로 돌려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저승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이에요.
여러분한테 그걸 잘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살아서 저승길을 공부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물질세계에 살면서 사는 거는 다 알았으니깐 저승세계에 들어가서 알아야 양면을 다 둘 아니게, 삼세를 둘 아니게 다 알아야 내가 누구를 건져 준다 뭘 한다 하죠. 지금 신도님들도 그냥 그대로 믿고 그대로 옆의 사람, 꼭 이거는 돌봐 주지 않을 사람이나 돌봐 줄 사람이나 자기한테 인연이 되는 사람한테 그렇게 관해 주고, 또 일러 줄 수 있는 사람은 관하라고 일러 주고 그렇지 못할 사람은 그냥 관해 주고 하는 거죠. 오다가다가도 그렇게 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다가 보면 “아유, 당신이 일러줘서 참 감사했다.” 하기도 하고 “아유, 나았다.” 하고 잘됐다 하고, 감사하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고, 아주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런 소리도 또 안 하죠. 그렇지만 남을 건진 건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두 아픈 사람이든 극난에 빠져 있는 사람이든, 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괴로워서 자기 편안하자고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괴로워서 괴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고, 한다고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깐 말입니다. 그게 부처님 법이에요. 그게 부처님의 공법이라고요. ‘부처님 공법이 있고 우리는 없나?’ 그러지만 벌써 우리들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하나하나가 다 공법이에요. 그 많은 생명들이 다 한데 더불어 같이 살면서 같이 행하니까 공법이죠.



믿음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전생에 지은 복이 없어서인지 그토록 확고했던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고 이 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등 말씀드리기 죄송한 생각이 자꾸 올라옵니다. 죄송스럽지만 제가 이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가 내가 나를, 자신이 자기를 이끌어 가고 자기 자신을 믿고 가다 보면, 꼭 어떠한 게 잘되다가도 딱 멎고선 안되고 또 답답함이 생기게 되는데 그럴 때에는 반드시 그걸 공부의 재료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불도 꺼졌다 켜졌다 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사용하는 겁니다. 항상 켜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항상 밤낮이 없이 사는 것도 아니고, 항상 바다가 잔잔하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파도가 일죠. 그러니까 파도와 잔잔한 물과 같이 동등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동등한 이치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알리기 위해서 자꾸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알맞은 일들이 생겨요. 그거는 그냥 탤런트가 영화를 찍고 나면, 한마디 하고 나면 괜찮듯이 그런 거와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를 빨리 수습하려면 ‘공부시키느라고 이렇게 답답하게 만들고 이렇게 모르게 만들고 끄달리게 만드는구나!’ 하고 바로 생각을 돌리면 그게 다 없어지거든요.
그런 건데 얼마 동안 되더니 이제는 잘 안된다고 하면서 그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그래서 하는 소립니다. 그렇게 답답하게 하지 마시고, 답답하고 모르고 그러는 것이 도니깐 모르고 답답하고 말도 안 되고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공부했어도 이게 뭔가 하고 한탄하지 말고 모든 걸 거기다 맡겨요. ‘한탄하게 하는 것도 너고, 답답하게 것도 너고, 모두가 너다.’ 하고선 거기다 맡겨 놓을 때, 그게 습관이 되면, 어떤 거든지 다 거기다 놓고선 가게 되면 실험을 통하고 또 체험을 하게 되고 이러면 자연적 문이 열리는 그런 이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깨우치고 안 깨우치고, 벌써 본래 깨우치라고 돼 있는데 그렇게 여러분이 딱 막아 놓고는 안 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살아생전에 그 도리를 알아야 내가 죽어서도 절대로 떳떳하고 꿀리지 않는다. 꿀리지 않아야 어디든지 내 자유껏 갈 수가 있는 거지, 내 자유껏 건질 수가 있는 거고 내 자유껏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즉 말하자면 살아서 인가가 됐기 때문에 죽어서도 인가가 돼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차원에 따라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오는 겁니다. 이 공부를 해서 간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나와서 고생하기가 싫어서 자원해서 나간다는 사람이 없었더랍니다. 그랬는데 그러면 너희끼리 해라 이렇게 해서 뽑아서 여기 내려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더러더러 있다 합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도 언제나 불쌍한 모든 생명들을 보고 살고 또 그 생명으로 다시 떨어지고 이렇게 하는 중세계에서만 살 수는 없거든요. 여러분이 차원이 높아서 한 세계에 한 도량으로, 제불의 도량으로 한데 모여서, 텔레비전에 나온 은비까비처럼 그렇게 나오란 말은 아니지만요, 알지 못하게 모든 것을 거기 앉아서 알고 다 도와줄 수 있고 건져줄 수 있고 이럭하게끔 한다면 자기네 자손들도 건질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 대대 종손들도 다 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여러분한테 이렇게 가르치는 거, 정말 서로 다 감사하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지금 내가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기 뿌리를, 자기 선장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맡겨 봐라 그런 거죠. 벌써 그러면 맡기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돼서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거기다 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다 놓질 못하고 부지런히 와서 그냥 그 사단을 다 얘길 하는 거예요. 그 얘기하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들은 본론만 얘기하고 가는데, 그냥 자기가 겪은 얘기를 쫙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벌써 그건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는 결론이거든요. 자리가 잡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방방 뛰지 안 뛰겠습니까? 자리가 잡힌 사람은 그런 걸 해결을 하고 가거든요.
우리가 고등 동물이 되고 그래서 사람 중에도 진짜 사람이, 사람이 돼야 부처님 한 도량에 태어난다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 고를 고라고 생각하면 고가 되는 거고, 고를 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고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다 하고선 집착을 한다면 그건 멸이 되질 않아요. 그래 도를 이루지 못하죠. 그러니깐 여러분의 생각에 따라서 도가 되느냐, 도의 길을 걷느냐, 그렇지 않으면 망상의 길을 걷느냐 이거예요. 그러니 ‘한 철 나면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우리가 일체제불의 한 도량에 이루나.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렇게 하세요.
왜냐하면 지금 사는 한 철은 그저 배고프다, 못 입는다, 돈이 없다, 뭐 어디 취직이 안된다, 취직해서 다니다가 떨어졌다, 이런 거를 가지고 그냥 벅석거리면 오히려 그것이 제동이 걸리질 않아요. 그거 떨어지게 한 것도, 굶게 하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바로 네가 하는 거니까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그냥 놓고 그대로 편안해야 해요. 그건 뭐 몸뚱이가 펄펄 뛰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한 찰나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요. 부처 속에서 나오는 보살들이 전부 응신이 돼서 돌봐 주시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가 이끌어지는 거죠.
그리고 또 때로는 이렇게도 되는 수가 있죠. 그 한군데를 믿고 모든 거를, 한 뿌리를 믿고 그냥 의지하고 해야 나무가 크게 자라는데 그렇지 않고 이 나무에서 저거 하다가 저기 가서 한번 해 보고, 조기 가서 한번 해 보고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못되죠. 정말 진짜로 바다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자기가 이 세상에 형성돼서 나온 구녘도 그 구녘이고 들어갈 구녘도 그 구녘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죽어서 들어가는 거보다도 살아서 들어가서 모든 걸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깨우치지 않았어도 그렇게 자꾸 닿는단 말입니다. 관하면 닿게 되어 있어요. 닿아서 모르는 게 없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걸 못 참아서 관해도 이렇고 저렇다고 하면서 그냥 모두 그러는데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하나 실천하고 체험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말고 최선을 다해 정진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200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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