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 욕구라는 환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당황해 하며 묻습니다. “나는 내가 욕구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환상이라니,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물음은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이에 대한 ‘의혹’이 깊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가 불교를 말하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붓다의 고행상
그럼, 지금 불교는 인간의 자연적 생물학적 욕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구도 여기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배가 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어야지, 이것을 거스르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지요. 그런데 이 상식을 믿지 않고(?) 직접 몸으로 테스트해 보려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육신을 거부하고 부정해야 구원이나 해탈을 기약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극단적 고행을 시도했습니다. 붓다 또한 당대의 유행을 따라 이 길을 걸었습니다.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간다라미술의 걸작으로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그 피골이 앙상한 고행상을 말입니다.
붓다는 그러나, 어느 순간 이렇게 육신을 학대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 즉 “초월로, 갈애의 소멸로, 윤회의 멈춤으로, 업의 감소로, 높은 지식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에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극단적 고행을 하던 시절의 모습을 좀 생생하게 보여드릴까 합니다. 다음은 폴커 초츠가 <마하시하나다 숫타>에서 인용한 것인데요, 제가 읽기 편하게 정돈한 것입니다.
“붓다는 마가다를 거쳐 여기 저기 방랑하다가 우루벨라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산림이 울창하고 네란자라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 두려움이 점점 엷어졌다. 그는 극단적 고행에 몰두했다. 그는 숨을 참는 훈련을 했다. 귀가 울리고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고통이 왔지만 참았다. (…)벌거숭이로 다녔고, 씻지 않아 여러 해 동안 때가 켜켜이 쌓였다. 식사는 콩 몇 개를 먹고 버텼다. 소똥도 먹고 자기 똥도 먹었다. (…)나는 목동들이 떠나면 외양간으로 가서 어린 젖먹이 송아지의 배설물을 먹었다. 내 똥 가운데 소화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도 먹었다. (…)잠은 시체가 가득한 들판에서 뼈다귀들을 주워 자리를 만들어 잤다. 지나가던 목동들이 침을 뱉고, 오줌을 누고, 오물을 던지고, 풀줄기로 귀를 찌르기도 했다.” (폴커 초츠, <붓다>).
“나는 소똥도 먹고 내 똥도 먹었다.”
<마지마 니카야>는 이 시절 붓다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은 극히 야위어 갔고, 팔과 다리는 마른 수수깡처럼 되었다. 몸은 쭈글쭈글해졌고, 엉덩이는 낙타 다리처럼 가늘어졌으며, 등뼈의 마디가 드러나 마치 구슬을 꿰어놓은 것처럼 앙상했다. 낡은 집 천장에 댄 나무의 골격이 드러나듯이 갈비뼈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배가 만져졌다. 화장실에 가려 하면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곱고 희던 얼굴은 시커멓게 타버렸다.” (브루스터, <고타마 붓다의 생애>).
붓다는 결국 이 극단적 고행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육신을 다만 수고롭게 할 뿐, 진정 이르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두 번째 전향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유복하고 사치스러운 열락의 세계를 떠난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처럼 구원을 위한 육신의 극단적인 학대를 버린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예전 아버지와 함께 농경의식에 갔다가 잠부 그늘 아래서 명상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합니다. 그때 그 선정은 감각의 불순한 쾌락도 아니고, ‘오직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니련선하의 어떤 처녀가 주는 우유죽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이 멈춘 경지’에 도달했고, 더 깊이 주의를 집중하자, ‘투명하고 밝은 경지’가 드러났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모든 것이 분명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깨달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붓다
이 깨달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길은 인간의 생물학적 기본 욕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인정한다면, 그럼 불교가 나아가 깨부수려는 그 ‘넘쳐나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여기가 미묘합니다. 넘쳐나는 것이란, 생명의 자연적 발현이 아닌 것 모두를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욕구와 충동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진단에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내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지?”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새삼스런 각성, 그 앎이 곧 해방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라거나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붓다는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금강경>은 바로 붓다와 그 제자들이 구걸로 삶을 영위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최고의 위엄을 자랑하며,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그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증거들은 인간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적은 양’이 필요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다지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도 그러했습니다.
“공중을 나는 새들을 보라. 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天父)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비록 외도(外道)의 말이긴 하나, 저는 이 수훈이 불교가 가르치고 있는 바를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 하기는 정말 어렵지만 말입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