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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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앎과 삶의 거리(2)/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삶으로 전환되지 않는 앎은 무의미
‘할 수 있다’ 신념과 열린 마음 가져야

지난 편에 말한 것처럼 <장자(莊子)> ‘소요편’에 나오는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오른다는 붕(鵬)새나, 나뭇가지 사이를 날며 이러한 붕새를 비웃는 작은 새나 똑같이 하늘을 날 뿐이다. 오직 우주에 대한 앎과 자신의 삶으로서의 인식의 전환과 이에 따른 전망(展望)의 차이일 뿐이기에 우리 모두는 앎과 삶의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부처님 말씀은, 그에 대한 앎이 삶으로 전화되지 않는 한 전혀 소용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생명과학의 지식도 그러한 앎이 어떻게 우리의 삶으로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지식을 위한 지식이 될 뿐이다. 요즈음 생명과학이 던지는 사회 문제나 생태문제에 있어서도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던져진 문제가 얼마나 우리의 삶의 문제로 접근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밖에서의 변화가 어떠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문제로서 풀어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앎만이 넘쳐나는 시대에 자신의 앎을 자신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앎이 자신의 삶으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勇氣)와 열려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용기란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세계로부터 과감히 좀 더 넓은 또 다른 세계에의 도약을 하기 위한 용기이다. 이러한 용기가 만용(蠻勇)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일 뿐이다. 붕새나 작은 새가 우주 속을 날기 위해서 굳이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 하늘도 땅도 지구도 우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용기와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나의 삶은 변한다.
종종 우리 주위에서 듣는 것으로서 ‘그거야 부처님 말씀이지 어떻게 우리가 흉내나 내겠어’ 라든지, ‘그거야 전문 학자 말씀인데 어떻게 우리가 알겠어, 그 말에 따라야지’ 등의 안주하는 모습을 멀리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앎과 삶의 거리가 너무도 멀어 자신의 삶은 여전히 작은 세계 속에서 갇혀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가? 지금 우주를 날고 있는가? 지금 화택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연화장에서 살고 있는가? 이 자리가 타락의 자리인가 아니면 이미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해있는가?
내가 지금 어디 살고 있는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이미 넘치고 넘치는 앎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무성한 식(識)에 끌려 다니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앎과 삶의 거리를 좁히는 각자의 용기와 이에 수반된 열린 마음을 지니도록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부처의 세계에 거듭 태어날 수 있다.
200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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