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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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믿음으로 좀 더 뛰어넘어라
물질 아닌 마음은 한계가 없어

올림픽 응원을 하면서

몇 주 전부터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이 10위 안에 꼭 들어야 된다는 믿음을 갖고 온 국민이 성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수들의 경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응원을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선수들이 힘을 내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면서 응원한다고 해도 선수들에게까지 전달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가를 생각을 해 보다가 내 몸을 이끌어 가는 나의 근본을 내가 믿듯이 선수들의 근본과도 본래 둘이 아니기에 마음과 마음으로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경기를 지켜볼 때도 그렇고 선수들의 승패에 대해서도 훨씬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마음으로 들이고 내는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공부가 한 계단 뛰어오른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 감사드리며 공부 점검을 받고 싶습니다.

마음이라는 거는 아주 광대무변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묘하냐? 마음은 천 리라도 멀지 않고 발 밑이라도 가깝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불을 켜면 상대방 사람의 마음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이죠. 한생각의 가설이요. 이건 두고두고 뭐 전기 가설 하듯이 꼭 해 놔야 가설이 되는 게 아니라 한생각의 가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묘하죠. 그래서 마음속에 불을 켜면 만 명이 가설이 됐다 해도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아이구, 저놈은 믿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이런다면, 믿지 않는다고 말로 하고 끌어오려면 그게 부러집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불을 켜면 부모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는데도 마음으로 끌어당기지를 않고 말로 다 끊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이요, 그것이 바로 묘법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일일이 파헤쳐 보면 참 신기한 일과 불가사의한 일이 많은데, 그것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라 본래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으로만 바들바들하고 애를 쓰면 육신이 벌써 망가지고 해(害)를 보고 그러는데 바둥바둥 뛰면 되겠습니까?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야지, 밝게. 그러니까 마음을 침착하게 두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지.’ 한다면 그것이 그냥 한 찰나에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 한 사람에게 불이 들어가면 수십억 마리의 의식에 불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수십억 마리에 불이 들어온다면 거기서 또 연결이 돼 있지 않습니까? 연결, 연결, 가설이 돼 있죠. 그러니깐 연방 연줄 연줄이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공부 하는 데는 한 발 계단을 올라섰다 내려섰다 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쪽에 가는 것도 서쪽이요, 서쪽에 가는 것도 남쪽이요, 남쪽에 가는 것도 북쪽이니, 북쪽이다 서쪽이다 남쪽이다 동쪽이다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마음은 이리로도 갔다 저리로도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갑니다. 그런데 무슨 한 계단을 올라서요? 그러니까 우리가 탑을 쌓으려면 벽돌 하나를 갖다 놓고 또 하나 갖다 놔서 다 올라갈 때까지는 잠자코 그냥 쌓는 겁니다, 잠자코. 뭐 하나 더 갖다 놨느니 덜 갖다 놨느니 할 것도 없이 그냥 무조건 쌓아 올라가요. 그러다 보면 한순간에, 그 봉우리는 한순간에 올려놓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침착하게 안으로 돌려서 굴리도록 하세요.

보살의 길을 걷고 싶어요!

스님, 오랜만입니다. 저는 스님처럼 보살의 길을 가고자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고 있는 청년 법우입니다. 며칠 전 ‘자네, 그 보살의 길이 무엇인고?’ 하는 생각이 좀 났습니다. 그러던 중 밤에 이렇게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보살은 큰 달덩이 바위고요. 큰 달덩어린데 그 달덩어리는 세상을 다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냥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래서 보살의 길 자체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질문드립니다. 보살행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항상 얘기했듯이 내면에 영원한 불성 자체가 바로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했는데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고 또는 ‘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진실히 가졌을 때에 그 모든 의식들이 화해서 털구녘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보살로서 화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면서 가고 옴이 없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함이 없이 하는 것이고 생각 없이 또 생각하고, 또는 말 없이 말을 하고….
부처님의 평발이라는 것이 어째서 평발이라고 했는가. 저 땅 밑에 기어다니는 진드기 발 하나도 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평발이에요. 일체 만물만생이 다 부처님의 마음이 들고 나지 않으면서 들고 나시고, 들고 남이 없으면서 항상 한마음이 되어 주시고 한몸이 돼 주기 때문에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한 거예요. 부처님의 마음이 생각을 내니깐 보살이 되고 보살이 되니깐 법신이 되고 법신이 되니깐 보살이 되고, 이렇게 행하면서 행함이 없이 행하는 것이, 천백억화신이 그렇게 되는 거죠. 때에 따라선 약사가 되고 때에 따라선 관세음이 되고 때에 따라선 지장이 되고 때에 따라선 칠성이 되고 독성이 되고 약사가 되고, 아니 되는 게 없이 용신이 되고 지신이 되면서 어느 거 하나 아니 되는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해로운 점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여러분이 다 생활해 가면서 공부하세요. 생활도 참선이니까, 그대로. 열심히 해 봐요.
그리고 이 도리를 모르는 청년들도 이끌어 주면서, 이렇게 해서 모두 그 마음들이 당당하고 도도하게 물이 흐르듯이 지구 바깥으로도 벗어나고 우주 법계를 두루 한 눈에 볼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또는 가고 옴이 없이 한 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광력이나 전력·자력·통신력이 충만히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충만히 이어져서 모두 가설이 됐다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모두 나부터 믿고 나부터 발견해야 하니까. 그리고 가정도 이끌어 나가고, 내 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거기에다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을 해요. 거기서만이 이끌어 갈 수 있어요. 거기서만이 물리를 터지게 해 줄 수 있어요. 영원한 친구니까. 수없는 과거의 억겁 광년을 거쳐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고 먹히면서 진화를 하고 이날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에요. 장본인부터 알아야 모든 바깥의 일들을 전부 알게 되죠.

직접 체험해 봐야만 벗어날 것 같은데

스님, 저는 인과응보도 뜻이 있어서 작용한다고 보고 있고, 병고 액난에 부딪치는 것도 자기 인과응보고 근본자리에서 나온다 하게 되면, 그 자체의 병고 액난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것이 없게 되면 아무리 말로나 글로나 책으로 가르쳐도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병고 액난을 거쳐야만 진심으로 깨닫는 계기가 생기는 것 같은데 다가오는 모든 것을 나오는 그 자리에다 맡겨 놔라 한다면 진짜 체험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요?

맡겨 놓는다는 말은 어디다 던지듯이 내동댕이치는 게 아니라,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일이 잘 풀어질 수 있도록, 그 자리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진실한 믿음으로 몰록 내려놓고 관하는 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좀 더 뛰어넘어라!’ 이 소리죠. 왜냐하면 체험은 스스로 아파보고 먹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체험을 한다고 해서 그냥 붙들고 있게 된다면 그건 10년, 20년, 30년이 가도 그냥 헛바퀴가 도는 거죠. 그리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배운 지식과 학식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아니, 좌선을 할 때만 지구가 돌아가나요? 그렇지 않거든요.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맥박이 뛰듯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 사실을 왜 모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컴퓨터 세상으로 발전이 됐지요? 그래서 사무실에 열 사람이 일하던 거를 지금 한 사람만 있어도 되는 이치가 있지 않습니까? 백 사람이 있어야 일을 하는데도 지금 삼십 명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안다면 과거에 어떠한 입력이 된 것이 다 무효가 돼 버리죠. 무효가 되니까 지금 현실에 그 입력을 한 것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입력을 하는 건 좋은 마음으로 입력을 하거든요. 그러니 좋은 일로밖에는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전자에는 모르고 막 지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전자에 입력해 놓은 것부터 녹이고 좋은 마음을 내면서 일체를 주인공에 놓는다면, 컴퓨터에 입력한 대로 나오는 것처럼 마음내는 그대로 좋은 일만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인제는 그릇이 비면서 인과응보라든가 모든 것이 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으니까, 그 작업만 자꾸 하니까 거기서 새 쇠로 생산이 돼서 저절로 나가는 거죠. 그래서 자동적이라는 겁니다. 우리 육신, 이 물질은 한계가 있지만, 물질 아닌 마음이란 건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무한의 어떠한 용도든지 걱정이 없다 이거죠. 그러니 그거를 알게 되면 그때 무얼 알게 되느냐 하면 ‘아하, 내가 이렇게 내 속도 알게 되고, 꽃나무나 저런 무정물이나 풀 한 포기, 지렁이 하나의 마음도 알 수 있으니 그 고난을 몸소 겪어보지 않아도 모든 게 고행을 하고 가는 구다.’ 하는 사실을 전부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실험이고 바로 탐험입니다. 탐험을 해서 모든 걸 알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걸 내 몸뚱이로 하느냐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 계시던 그 당시에도 육신으로 고행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몸뚱이로 고행을 하다가 몸뚱이가 떨어지면 그 생각도 떨어지는데 무얼 그렇게 몸뚱이로 고행을 하느냐 이거죠. 그러니 몸뚱이로 고행을 하지 말고 정신력을 기르고, 즉 말하자면 ‘실험을 하고 탐험을 해서 전체를 알라. 그러면 하나 버릴게 없느니라. 가질 것이 없는 반면에 버릴 게 없느니라.’ 이랬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정에서 좀 더 실험을 해 보면서 나갈 수 있다면, 이거는 종교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가정에서,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게 종교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밖으로 찾지 말라고 하셨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스님의 법문을 탐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십계라는 게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십계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굉장히 큰데, 스님께서는 신이라는 것을 밖으로 찾지 말라고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을 찾을 수 없게끔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은 자기에게 내재돼 있는 자성신을 찾으라고 그런 거지, 그렇다고 없는 걸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갖추어 있는데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발현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또 다른 신을 찾으라고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만, 기독교도 그렇고 가톨릭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또 십계뿐만이 아니라 팔정도니 육바라밀이니 모두 지켜야 하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십계를 받든 오계를 받든 몽땅 주인공에 놓고 그냥 굴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받은 계를 몇 배 더 지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십계를 받고서도 꼭 지켜야 한다고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은 다 못 지켜요. 그런데 거기다 맡겨 놓고 지키는 사람들은 십계 아니라 백계가 넘고, 이백이 넘는다, 삼백이 넘는다 해도 다 지킬 수 있어요. 그대로 생활 속에서 여여하게 모가 나지 않게 그냥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잘못하든 잘하든 간에 모든 거를 거기다 놓고 굴리세요. 또 사람들이 모두 그렇잖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잘못되고 잘된 거는 더 잘 압니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하느냐는 거는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모든 일에서 중도를 지키게 되니까, 항상 그렇게 하다 보면 ‘이렇게 너무 욕심부리면 강을 뛰어넘지 못하고 강에 빠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자연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강을 뛰지 않게 되구요. 그런 예와 같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침착하게 생각하고 진중하게 말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살게 되는 거죠.

절은 몇 번을 해야 하는지요?

저희 집에서는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제사를 지냅니다만, 집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식으로 절을 두 번을 해야 맞는 건지, 아니면 몇 번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해야 하겠죠. 법당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바쁜 일이 있어서 빨리 나가야겠다 할 때는, 삼배를 일배로 올리고, 또는 좀 여유있게 있을 수 있을 때는 삼배를 올리고 가셔도 되구요.
그래서 절을 하는 그 지극한 마음이 중요하지 이 몸을 움죽거리는 작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몸을 움죽거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몸체가 움죽거리게 되니까요. 마음 작용에 따라서 남한테 좋은 일을 하겠다 하면 좋은 일을 하게 되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는 육체니까 우선은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몸을 놀리는 것은 걱정 마시고 바쁘면 바쁜 대로 하시고 또 바쁘지 않걸랑 바쁘지 않은 대로 하시고 그러세요. 상은 간편하게 차리더라도, 간편하다는 말은 가짓수를 줄이되 뜻으로 상을 차리라는 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종류만 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듯이 절을 하는 것도 그 숫자에 얽매이기 보다는 절을 한 번 하더라도 얼마만큼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위해 마음을 내고 그 은덕에 감사함을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도리를 잘 새기시고, 여러분 가정에서 재를 지낼 때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참석하니까 한 가지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집안 풍습에 따라서 일반적인 상식으로 절을 하면 됩니다.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거는 평소에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인데요,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두 아들이 총으로 부모를 쏴서 죽이고, 또 아버지가 아들을 불에 태워서 죽인다든지 하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인연으로 인해서 자기 몸을 버리고 죽게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 점에 대해서 항상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누가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묻습디다. 그리고 고 다음에 묻기를 “죄가 없는 어린애들끼리 서로 놀다가 한 아이가 연탄집개로 친구의 정수리를 찍어서 죽였는데, 그러면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거는 어디에 속합니까?” 하고 묻길래 그런 말을 했죠. “모르고 죄를 지은 거는 모르고 받게 되고, 알고 짓는 죄는 알고 받게 마련이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비유가 되는 거미와 깻벌레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미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무슨 벌레가 이만큼씩 한 게 씩씩씩씩 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그건 뭐든지 다 갉아 먹습니다. 그런데 두 노친네가 농사를 지으려다 보니까 그것을 안 죽이고는 안 되겠어서 깡통에다가 오줌을 담아 가지고는 그냥 반 깡통씩 한 깡통씩 잡아서 죽였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많이 죽였던지 그것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을 때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 집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걸 여러분이 못 봐서 그렇지, 50% 돌아가는 거는 못 보기 때문에 그 문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하나는 거미고 하나는 깻벌레인데 하루는 어느 스님께서 탁발을 하러 오셨는데 오셔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당신 두 부부는 그 두 형제한테 뜯어 먹힌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얘기를 쭉 듣고 나서는 스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무얼 했느냐 하면, 곁불을 피워서 두 군데에 놓고는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뚜껑을 덮고 기다리고 있다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나와 보니까 글쎄, 그 스님의 도력도 있겠죠. 한 쪽은 깻벌레이고 한 쪽에는 거미가 곁불에 죽어 가는데 그 많은 것을, 인과응보로써 그렇게 되는 거를 그 스님이 양쪽을 다 풀어 주려고 한 겁니다. 인도환생을 하기 위해서 의식을 빼느라고 그냥 전부 한 군데서 죽더랍니다.
그래서 어저께가 없으면 오늘이 없듯이 ‘이렇게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답변을 하지 않았을 것을….’ 하는 거나 똑같죠. 우리가 그렇게 연결돼 나가는 거죠. 우리가 연결돼 있지 않으면 화목도 없고, 연결이 없으면 싸움도 없고 그럴 거니까요. 그래서 자기가 한 대로 받고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자신들이 50%에 관한, 돌아가는 일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렇게 하는데, 더 삼가고 더 한번 굴려서 생각해 보고, 욕을 하더라도 생각해 보고 거기다 맡겨 놓고 좋은 말로 부드럽게, 타이르더라도 부드럽게 타이르면 서로 원수 질 일도 없게 되는 겁니다.


단전호흡도 효과적일 것 같은데요

마음공부는 정신적인 공부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람 몸은 육체와 정신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단련으로써 단전호흡이라든지 그런 것을 공부를 하면 효과적인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수행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육식보다는 채식을, 결혼 생활보다는 독신 생활을, 사회 생활보다는 신행 생활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요?

단전호흡은 육체에 기를 모으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를 돕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를 돕는 수련이지 온전히 정신을 돕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면, 머리로 기를 빼지 못한다면, 넣으면 빼야 되거든요. 그런데 빼질 못한다면 그냥 정신분열자가 되고, 또 머리로다가 열이 모이면 그냥 피를 토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경우를 내가 무척 많이 봤습니다. 단전호흡을 해서 잘못돼 가지고 온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전호흡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한데 모으는 거를 하려면 마음으로 모으라는 거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병이 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단전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디고 마음을 내놓으라고 그런다면 내놓을 건 없지만,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궁무진한 거죠.
어떤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전호흡을 해 가지곤 머리로다가 열이 나 가지고 그냥 벌겋게 돼 가지고 군 생활도 못하겠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모든 것이 우리가 밥을 먹고 대변을 못 누면 부작용이 생기죠?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평상시에 그대로 컴퓨터에다, 그전에 과거에 입력이 된 컴퓨터에다가, 내가 주인공이라는 게 바로 그거니까 ‘주인공! 나를 넘어뜨린 것도 너니까 나를 일으키는 것도 너다.’ 그러고 일으켜졌으면 ‘감사하다!’ 일으켜지지 않았으면 ‘일으켜지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이렇게 편리하게 맡겨 놓고 사는 방법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런데 그거를 뭐 단전을 한다 하고 그냥 꿇어앉았고, 이렇게 바쁜 세상에, 지금 일분일초가 바쁜데 말입니다. 그거를 꾸부리고 앉아서 그렇게 해야만 되느냐. 나가서 일하는 것도 참선이요, 먹는 것도 참선이요, 누운 것도 참선, 자는 것도 참선, 사랑하는 것도 참선, 모두 참선 아닌 게 없는데 모두들 절에 간다 그러면서 무슨 멸치꽁지도 먹지 말아야 하고, 남편하고 자지도 말아야 하고, 아침에 또 백팔배를 해야 하고, 애들 어른 할 것 없이 죄 굶주려 놓고는 그냥 가는 겁니다, 저 혼자.
이게 가정을 이룩하는 부부입니까? 가정을 이룩하고 살아나가는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거를 왜 모릅니까? 서로 다복하고 애들한테 도시락을 싸 주더라도 그렇고, 안 싸주더라도 아침에 일찍 나가는 거,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아요. 아무리 나쁘게 하더라도 부드러운 말을 해 주고, 평등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라 이거지요.
그럼으로써 자식도 잘못되지 않고 잘못 빗나가지 않고, 뿌리를 길러 주기 때문에 그 가장구나 이파리는 왕성하게 될 것이다 이겁니다. 사람은 애나 어른이나 따뜻한 데로 고이게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그저 만나기만 하면 “어이구, 너 어디 갔다 왔니?” 이러고 “왜 이렇게 늦었어?” 그러는데 그러지 마시고 남편도 그렇고, 조금만 어디 가서 저거 해도 그냥 좀더 사랑하고 믿어 주세요. 그리고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여기다 맡기세요, 잘못되지 않게. 주인공은 둘이 아니니까. 가설이 돼 있지 않아요? 가설이 돼 있는데 무얼 믿지 못합니까. 가설이 돼 있으니 그 주먹 안에서 어디 가겠습니까? 그쪽 주먹 안에서도 가설이 돼 있고, 이쪽 주먹 안에서도 가설이 돼 있어요. 그런데 어디 가겠습니까, 그게? 전기 가설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우린 자가발전소거든요. 그러니 항상 그렇게 조금 못 믿으실 게 있더라도 ‘주인공밖에는 빨리 오게 할 수 없어. 당신, 빨리 와!’ 하면, 어딘가 모르게 빨리 가고 싶어서 허둥지둥 온다는 거죠. 그게 자력의 통신입니다. 자력이 있으면서 통신도 들어가야 되거든요, 포함해서 말입니다.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이 충만히 내가 자유자재해서 끌어 쓸 수가 있는 여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마음으로서의 그 여건을 자재하게 끌어 쓸 수 있으니 마음놀이이다 이겁니다. 마음으로써 하는 거니 마음으로서 해결을 하라 이거죠.
200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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