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소요편’에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오른다는 붕(鵬)새와 나무 가지 사이나 날며 이러한 붕새를, 말도 안 된다며 비웃는 작은 새의 우화(寓話)가 있다. 우주를 나는 붕새나 그러한 붕새를 비웃는 작은 새나 똑 같이 하늘을 날 뿐이다. 다만, 하늘 밖의 우주란 자신이 갈 수없는 세계라고 믿고 있는 작은 새들은 자신들이 우주가 아닌 하늘을 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붕새는 하늘도 우주의 한 부분이기에 자신은 우주를 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식과 전망(perspective)의 전환이며 이에 따른 삶의 문제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다양한 출판매체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예전에는 상아탑 속에 머물던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인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 됐다. 요즈음 생명과학의 발달에 따른 우리 사회 속의 많은 논의나 환경 문제에 대한 치열한 대립 양상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회 변화를 반영한 듯이 보인다. 예전처럼 아는 사람들이 적당히 해 놓으면 나중에 일반인들은 ‘어? 그렇게 되었네?’ 하고 끝나던 시절이 더 이상 아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변화를 좋다 나쁘다 판단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는 전문가나 문외한이거나 우리 모두의 책임은 더욱 증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진정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의 앎과 삶의 거리다.
부처님의 말씀도 더 이상 주석서나 해설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정보가 넘치고 공유되고 있어 일반인도 웬만한 스님들보다 더 부처님 말씀에 대하여 주워섬길 수 있다. 지금 사회에서 우리의 앎이 그만큼 충분하다. 하지만 중생의 고해탈(苦解脫)을 위해 이 세상에 펼쳐진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과연 그의 삶에 자유와 평화가 있을 것인가.
최첨단에서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나 또 이러한 연구 결과를 접하는 일반인들도 그러한 연구 내용이나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결국 앎의 차원일 뿐이기에 그러한 과학 지식의 앎이 어떻게 인간들의 삶의 문제로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는 마치 부처님 말씀을 책으로 잘 알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전혀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그렇기에 이미 많은 세계는 열려있고 열려가지만 이러한 세계에 대한 ‘나의 앎이 얼마나 자신의 삶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의 앎(연구)이 얼마나 우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앎과 삶의 거리를 좁혀 가지 않는 한 우리는 각자의 입장이 학자이건 승려이건 일반인이건 여전히 우주가 이렇고 저렇고 떠들지만, 정녕 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장자>의 작은 새들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