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낮음 없이 전부 나 아님이 없느니라
(488호에 이어서)
▲질문자2: 먼저 삼보님 전에 지성으로 귀의하옵고, 시방제불 보살마하살님과 큰스님 인연지어서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저 자신을 찾기 위해서 지난 5년 동안 나름대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행주좌와 중에 24시간 무심의 생활을 하려고 관하고 놓고 무심, 관하고 놓고 무심, 이런 식으로 한 2, 3년을 계속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 반야심경이 5년째 되던 작년에 탁 터지는 한 소식을 하면서 스님의 죽비 소리에 홀연히 뭔가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처처에 부처님 나투심 아닌 곳이 없고, 이곳이 불국토고 내가 있는 곳이 도량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항상 무심의 생활 속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공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을 찾아보니까 소 자체도 없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할 때는 소잔등에 타가지고 소를 부리면서 제가 처처에 나투신 부처님들과 함께 시방세계를 놀다가 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스로 들고 일체 삼라만상이 유심조(唯心造)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기쁨, 고통 모든 것에 한생각을 일으키고 그 마음을 일으킨 것에 의해서 사람들은 그 대상과 경계가 실체가 있는 걸로 알고 착각하고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불이관(不二觀)에 의해서 하다가 스님 죽비 소리에 홀연히 뭔가 터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고기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노닐 순 있지만 그 물 자체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듯이, 우리가 불법이라는 부처님 손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불법에조차도 걸리지 않는, 고기가 물속조차도 넘어선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 색(色) 공(空)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중도의 길을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스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두번째 여쭙고 싶은 것은, 깨우침에도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 열 단계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 보면 반야바라밀다라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나면 그 배 자체도 버려라 하고 강을 건너기까지만 가르쳐주시고 있고, 강을 건너고 나서 가야 할 길도 없는 그 길을 가야 되는데 그 길을 어떠한 수행으로 어떻게 공부를 하면서 가야 할지 길을 인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님: 다 터진 것처럼 말하면서, 하하하. (대중 웃음) 아까 말한 거나 지금 말씀한 거나 같습니다. 같은데 선법(禪法)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고, 청산도 없고, 돛대도 없습니다. 그 도리를 안다면 더 하고 덜함도 없는, 색과 공이 둘이 아닌 까닭을 아십니까?
▲질문자2: 예.
▲스님: 그럼 내놔보시죠. 귀신 방귀씨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 까닭은 아십니까? 우리는 느끼는 걸로만 알아서 안 되고 실천으로 옮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선법은 실천이 문제입니다. 또 귀신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않고 덜 먹이지도 않고 그렇게 기르는 까닭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세 가지, 그 자체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금 말씀하신 걸 들으니까 그거를 안간힘을 쓰고 할 양으로 무심, 무심, 무심 하시는데 그 무심조차 놔야 되죠. 무심으로 살아야지, 무심으로 살아야지 그러면 무심으로 살지 않는 게 됩니다. 그 일체를 다 놓고, 제자리에다 놓고 그 제자리에다 놓는 데서 그것이 다 녹아서 그릇이 홀랑 빈 연에 자기라는 것이 홀연히 고개를 들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타나서도 또 둘이 아닌 도리를 가르치려면 귀신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않고 덜 먹이지도 않고, 그렇게 먹여서 키우는 것이 둘 아닌 도리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첫째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죽어야 하고, 두번째는 둘이 아닌 까닭을 알기 위해서 죽어야 하고, 세번째는 둘이 아닌 나툼을 알기 위해서 또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뜻이 발현이 됐으면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어린애를 낳았다고 그래서 사회에 그냥 내보내는 게 아닙니다. 어린애를 낳았으면 키워서 공부시킬 거 다 공부시켜서 사회에 나갈 만해야 내보내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도리를, 상대성 원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완전히 실천했을 때, 또 자기가 실천하고 체험을 했을 때 그때에 한마디를 해도 한데로 떨어지지 않고 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 질문하실 거 있으십니까?
▲질문자2: 스님 법문 속에서 인과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모두 놓으면 된다, 그런데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이라고 해서 한마음에 죄 지었던 마음조차도 멸해버리면, 그 마음 자체를 멸해버리면 죄 자체도 곧 멸해진다. 그래서 주인공에 맡기면 인과 자체도 다 멸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옛 선사들께서 말씀 하신 불락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에 대해서 불락인과라고 저는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큰스님들, 법력 높으신 도인들께서는 인과는 오되 인과를 받지 않는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경계와 대상에 끄달리지 않기 때문에 인과는 오되 인과에 걸리지 않는다. 저는 불락인과를 이렇게 알았는데 어느 옛 선사의 법문집에서 보니까 그것이 틀린 거다. 불매인과다. 도인이나 법력이 높으신 분들도 인과를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스님께서 주인공한테 맡기면 모든 인과가 다 녹는다 하셨는데 제가 그거에 대해서 평상시에도 의문점을 가졌었습니다.
▲스님: 의심이 그렇게 갑니까?
▲질문자2: 네.
▲스님: 하하하.
▲질문자2: 가르침을 주옵소서.
▲스님: 물론 불락(不落)이다 하면 불매(不昧)가 올 거고, 불매가 있다 하면 불락이 올 겁니다. 이건 아니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것이 바로 색, 공입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다 하는 소리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양면이 다 붙지 않느냐, 왜 불매(不昧)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하나 떼고 놓고, 떼고 놓고 쉴 사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도 쉬는 게 없습니다. 쉬는 게 없으니 이것이 다가오는 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것은 온다 안 온다, 불락이다 불매다 이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생활 자체 여여함이 그대로 불매입니다. 그냥 그대로 우리가 돌아가면서 싫다 좋다, 죽는다 산다 하는 생사도 그냥 뛰어넘는 것이 바로 불매라고 하겠죠. 그래서 불락이라고 한마디 잘못해가지고 여우의 몸을 쓰고 오백 년을 살았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 오백 년도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들은 오백 년이 일 초라고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또 여우 몸으로 살든지, 늑대 몸으로 살든지, 구더기의 몸으로 살든지 선지식들은 그거를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한 뜻이 뭐냐 하면 그것에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높고 낮음이 없이 전부 나 아님이 없느니라 했거든요. 지렁이 발도 내 발이요, 하다못해 메뚜기 발도 내 발이요, 인간의 발도 전부 내 발이고, 내 아픔이고, 내 몸이고, 내 자리고 그러기 때문에 평발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가정에서든지 각자 가정에서 보면 자기 남편이 제일 높죠? 자기 가정에서는 자기네들이 제일 높은 겁니다. 그런데 또 나가서 본다면 뱃사공은 뱃사공대로 높고, 농사꾼은 농사꾼대로 높고, 또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높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높고요, 산과 들을 보십시오. 전부 자기가 이 세상에 제일 높다고 합니다. 호박꽃도 꽃이라고 자기는 자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각자 다 그 범위내에선 다 높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이 전부 나 아님이 없느니라 해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대로 불매(不昧)다 불락(不落)이다 하는 것도 다 놓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은 색과 공이 둘이 아닌 까닭에 그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오지요. 불이 들어왔으면 불만 들어왔지 그 양면의 전깃줄이 가설이 된 거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설이 됐어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건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가지고 얘기한 거지, 선이라는 건 불을 가지고 얘기한 거지 가설된 그 전깃줄을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전깃줄과 불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색과 공이 둘이 아닌 데서 불이 들어올 수 있는 거죠. 또는 불매와 불락이 둘이 아닌 까닭에 거기에서 들어오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질문자2: 제가 평상시에 스님의 가르침을 항상 동경하던 차에 한말씀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계속 안으로 굴리고 굴리고 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과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불자님들께 그냥 한마음이라는 글을 하나 썼는데 읽어도 될까요.
▲스님: 글만 읽지 마시고요, 그 백지까지도 첨보해서 읽으시면 더 좋겠습니다. 질문은 더 없고요?
▲질문자2: 네. 제가 글을 쓰면서도 불법과 천지이법(天地理法)에 그릇됨이 없을까 해서 스님께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스님: 예.
▲질문자2: 한마음, 님을 뜨겁게 사랑함도 허공에 뜬구름 한 점 일어남이요, 저 뜬구름이 언젠가는 흩어져 소멸되어 갈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저 뜬구름이 하나 되어 허공을 채워져 있듯이 님과 하나 된 우리들의 세계가 존재하지 아니 하옵니다. 피고 지는 꽃이 영원히 지지 않는 꽃보다 더 애처롭고 더욱 간절한 아름다움의 아픔이 있듯이 님과 하나 된 내 사랑, 저 뜬구름같이 언젠가 흩어질 것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소중하지만 님과 하나 된 내 사랑, 영겁토록 한마음일 것을 나는 압니다.
큰스님과 여기 모두 계신 불자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대중 박수)
▲스님: (합장하시며)
만나고 헤어짐은 없으련만
만나고 헤어진다 하네.
아름답고 밉다 하지만
아름답고 미운 것도 없다네.
이 세상 모두가 다
두구불천에 돌아간 이 세상
하나도 어김없이 돌아가고
또 돌면서 영원하리.
▲질문자3: 스님 법문 자주 듣고 많은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오늘 스님께 여쭤보고 싶은 거는, 또 제가 내보이고 싶은 거는 사실 저라고 내세울 거야 뭐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오늘 그릇을 올려놓고 이 그릇이 빈 것인지 찬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스님: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빈 것도 없고, 안 빈 것도 없을 텐데….
▲질문자3: 빈 것도 없고 또 안 빈 것도 없는 게 더 맞는 얘기고 또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그릇에 스님의 말씀 하나 담아 주시면 화두로 삼겠습니다.
▲스님: 화두는 이 육신 자체가 그대로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화하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화두인데요.
▲질문자3: 모든 것이 다 화두고 또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제가 책을 보고 또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저의 깨달음이 바른 건지 또 이렇게 생활하고 가는 것이 전부인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선지식께 제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고 싶어서 그 말씀 올렸습니다.
▲스님: 그럼 아까 얘기했듯이 귀신 방구씨는 어디서부터 온 까닭일까요?
▲질문자3: 저는 그것이 잡념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교는 사실 다른 얘기로 표현하게 되면 저는 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님: 쯔쯔쯧.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면은 그걸 잡념이라고 생각하나요? 생각을 못하게 되면 목석인데? 그것이 공부할 수 있는 재료인데? 그걸 재료로 생각을 해야지 잡념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거는 길이 점점 좁아질 텐데요.
▲질문자3: 기실 제가 보는 것도 잡념이라고 또 내세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방편으로 말씀을 올리는 거를 잡념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그 잡념이라고 하는 거는 또 하나의 화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놓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님: 그 대답을 못했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질문자3: 다시 공부하고 오겠습니다.
▲스님: 우리가 마음 도리를 발견하고 발견한 데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둘이 아닌 나툼을 알게 됐을 때 그때는 아무거나 들이대도 손색이 나질 않아요. 아무거나 들이대도 공안 아닌 게 없고, 화두 아닌 게 없고, 불법 아닌 게 없고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어떤 걸 들이대도 손색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로만 해버리면 안되죠. 그 도리만 알면 아주 쉬운 거죠. 그래서 말 없이 말을 해야 되는 거죠. 좀 더 열심히 해요. 또 질문 없습니까?
▲사회자: 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습니다. 질문할 게 있으면은 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허허허. 그럼 우리가 한마디만 더 해볼까요? 시간이 아직 조금 있으니까.
아까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산다고 그랬죠? 우리는 이 공기주머니를 이탈하면은 아주 어려움이 닥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고기도 물에서 이탈이 되면은 어렵듯이 사람도 공기주머니에서 이탈이 되면 어렵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도 내면에서 이탈이 되면은 어렵습니다. 이 공기라는 자체는 지구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공기는 지구에 해당이 되는데 우리가 춥다, 덥다 하는 이 자체도 바로 공기에 의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존선 만법에 의해서 나옵니다. 오존선 만법이라 함은 전부 허공 이 자체 둘레를 말하고 또 지금 지구다 하면은 지구 속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혹성이 있고, 유성이 있고, 항성이 있고, 다 이렇게 다르게 돼 있는 것은 장관이다, 대통령으로부터 쭉 이름을 가지고 일을 하는 그런 방식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오존선이 중심이라고 합니다. 오존선은 중심에서, 이 지구의 중심에서 모든 거를, 즉 비도 오게 하고 눈도 오게 하고 그렇게 소임을 가지고 있는 거죠. 구름도 일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통신도 하게 하고, 이 모두를 그렇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기도 조절하고요.
그런데 공기는 이탈이 되면, 더 올라간다면 태양열로서 재료를 다 흡수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자면 안양에서 시장이라면 딴 데 시장을 범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깐 그렇게 해서 이탈이 되면 모든 것이 조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그냥 이탈이 돼서 그냥 돌아가죠. 공기가 없으니까요. 공기가 흡수를 하지 못하니까요. 공기가 흡수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죠. 태양열을 흡수하기 때문에 살고 있고, 흡수를 하되 물속 밑바닥까지 태양열이 거기에 닿지 않기 때문에 항상 파도를 일으켜서 물을 돌려야 생명들이 죽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마음의 중심에서 이탈이 되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냥 막 돌아가죠. 그리고 또 따뜻하지가 못하니까 춥고 그러니까 생명체는 살 수가 없는 거죠. 이 모두가 이러한 이치로써 진리가 모두 돼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에서 이탈이 되면 안 된다. 역대에 그 부모들 존전에서 나오는 그 씨도, 내 씨나 삼천 년 전 부처님 씨나 똑같은 씨입니다. 즉 불씨죠. 불(佛)이라는 건 생명의 근본이 불이니까요. 또 교(敎)라는 것은 모두가, 태양열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 파도로 인해서 모든 게 돌아가면서 생명이 살고 존재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돌아가야만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마음 중심에서 심봉이 꿋꿋하게 서질 못하면 맷돌이 돌아가지 않듯이, 심봉이 있는데도 이탈이 되면 즉, 심봉이 없다면 그냥 맷돌이 건성 돌아가게끔 돼 있죠. 그리고 돌아가지도 않고요.
이러는 까닭에 우리 마음 자체, 지구 자체가 어떻게 생각하면 안양 한 변두리에 한 혹성이 있어서 그 혹성을 기준해서 살고 있는 거나 같습니다. 그런데 그 혹성의 세포 하나하나가, 우리 인간에게 세포가 있듯이 세포가 모든 사대(四大)에 피를 조달하고 통신을 조달하고 있죠. 그래서 여기를 탁 치면 벌써 두뇌로 해서 사대로 아픔이 탁, 신호가 가는 겁니다. 이렇듯이 지구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 몸 하나가 지구나 똑같습니다. 지구에도 세포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통신 조달은 바로 오존선에서 조달을 할 수 있고, 일으킬 수 있고, 오게 할 수 있고, 춥게 할 수 있고, 덥게 할 수 있는 그런 작용을 하죠. 그러니까 이것을 막상 알고 보면 우리 몸체 하나가 육근·육진·육식이 더불어 같이 한생각으로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문제가 있는 거죠.
누가 “오늘 법회날인데 비가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더라고요. 그런데 선법(禪法)이라는 거는 그렇게 남의 말만 듣고서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이 선법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얕은 소견으로 그냥 하고 싶고, 안 하고 싶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전체적인 하나에서 이것이 해당이 돼야 됩니다. 개별적인 하나가 아닙니다. 포괄적인 하나로서 이것이 해당이 되고 이 생각 자체가 그냥 법으로 들어가야만이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비가 와서 법회에 지장을 주거나 그렇게 걱정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공부를 여러분이 모두 철저히 하고 또 포교를 해서 장애자들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되고, 또 장애자가 나온 것은 바로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과거로부터, 즉 말하자면 유전성이니 인과성이니 영계성이니 세균성이니 해서 지금 현실에 모두 포함돼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온 자리에다가 되놓으면 그것도 좀 유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그렇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또 이 공부입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전체입니다. 얼마나 모두 고생들을 합니까.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을 쓰는 대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또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생각을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자식들이, 남편이 술을 먹고 그냥 차를 몰고 저 죽을 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또는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거는 말로서 몸뚱이를 잡으려고 해서는 잡혀지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고장난 건 마음으로 고쳐야 된단 얘깁니다. 아시겠습니까?
▲대중: 예.
▲스님: 마음은 어떠한 거라도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해주면서 거기다 맡겨야 이것이 따뜻한 감을 갖고 따뜻한 데로 고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데로 고이게 돼 있고요. 그러니 모든 것은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타의에다 원망을 하지 마세요. “저놈으로 인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 저것이 왜 저렇게 못됐어? 누굴 닮아서 그래?” 이럭하고는 그런 마음을 내고 욕을 하고 그러면 그 마음 낸 대로 욕하는 대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입력이 돼서 그대로 반영이 되니까 그거 안 되지 않습니까?
거울을 보세요. 여러분 얼굴 고대로 보이죠?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행동하고 말하고 그 마음 쓰고 하는 대로 입력이 되니까 그것이 그대로 선법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좀더 편안하게 살면서 자유스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이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 같이 열심히 해서 그 아픈 고해에서 벗어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