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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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9) 이방의 포교사들-현각, 틱낫한, 그리고 달라이 라마/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익기 전에 곯아서야

불교의 기획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불성, 번뇌, 반야의 삼각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의 역사는 그러나 이 삼각 항목을 두고 접근법과 강조점을 달리 해 왔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다양해 졌지요.
아시다시피 붓다 초기에는 두 번째 ‘문제’에서 출발해 세 번째 ‘방법’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비달마와 유식은 두 번째 항목인 ‘문제’의 분석에 치중했고, 중관은 세 번째 ‘방법’으로서 ‘지식’의 성격과 발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원효 스님이 <대승기신론>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짧고 간결한 저작이 위의 세 항목 전체를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경전에 여러 차례, 여덟 번이라 했던가요, 주석하고 해석하셨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소(疏)>와, <별기(別記)>뿐입니다만…. 그런데, 좀 아쉬웠던가 봅니다. 두 번째 ‘문제의 분석’쪽에 더 깊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장의(二障義)>라는 책을 따로 쓰셨습니다. 여기에는 <대승기신론>이 ‘오염된 마음(不覺染心)’의 양상이라고 지적한 ‘번뇌와 지적 장애(煩惱碍+智碍)’에 대해 더욱 상세하고 깊은 설명이 독창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목록으로만 전해졌는데요, 일본의 오오쵸오 에니치(橫超慧日) 교수가 1939년 무렵에 오오타니(大谷)대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거기 서문을 붙여 1979년에 간행했습니다. 지금 그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꼼꼼하게 읽기가 만만치 않은 저작이라 나중을 벼르고 있습니다.

이병주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의 풍자
이런 정황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요, 지금 불교를 말하시는 선지식들이 대체로 대승, 그 중에서도 가운데 반야의 ‘칼날’과 그리고 선의 ‘단도직입’을 말하고 계십니다. 아니면,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법계의 여여(如如)한 실상을 노래하거나, 다음 생에 있을 정토와 니르바나의 축복을 약속해 주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길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목적지에 다 온 듯한 착각을 주기 쉽습니다. 이병주의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이런 ‘도통한 체’를 두고, “익지는 않고 곯았다!”라고 익살스레 풍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며 공감했는데요, 어디 남의 일이겠습니까. 저 또한 이 강의에서 그 유혹과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고백을 해 둡니다.

그러니 이제 불교가 성급하게 ‘해답’부터 늘어놓을 것이 아니다 싶습니다. 그 전에 중생들이 처한 ‘상황’의 성격과, 겪는 ‘문제’의 실상부터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근본이 회향(廻向)되면, 나머지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주려고만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간에, 심지어 철장 안에 갇힌 실험용 쥐도, ‘문제’를 알면, 시키지 않아도 ‘길’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단박에, “아니, 문제야 자기 자신들이 가장 잘 알겠지. 그런데 뭘 새삼 가르쳐 주고 말고 해?”라고 타박하는 선지식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손가락에 난 생채기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그 ‘문제’를 당사자는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제기하는 ‘문제’는 아주 미묘하고 은밀해서 당사자에게 알려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남보기에는 다 갖춘 듯한데도 “이게 아닌데”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그 문제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슨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지요.
세계 혹은 매트릭스를 벗어나야
이 중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스님네들과 선지식들이 이제까지 익숙했던 그 ‘울타리’, 제가 요즘 자주 쓰는 말로 매트릭스를 좀 벗어나 주셨으면 합니다. 매트릭스를 불교 전문 용어로는 세계(世界)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한 개인이 익숙하게 보고 들은 정보, 그가 속한 그룹 안에서의 관행과 어법, 그가 의존하는 세계관과 가치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세계를 타파하기 위해서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얘기를 하자면 길어지는데요. 기회가 많을 테니, 다른 것은 그만 두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스님네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중들이 불교에 접근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언어’입니다. 저는 어느 편이냐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불교를 미래의 대안이라고 우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전통조차 지켜내기 어렵다는 파천황의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이방의 선지식들을 들자면, 현각 스님, 틱낫한 스님, 그리고 달라이 라마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현각 스님의 설법을 두어 차례 불교방송에서 본 적이 있고, 틱낫한 스님은 그분이 폭발적인 붐을 이루기 전에, 장경각에서 처음 나온 <삶에서 깨어나기>를 보며 곧, (용서하십시오) ‘엄청 뜰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무엇보다 그 일상적인 대화체의 비권위적인 자세에 깊이 경복했습니다.

이 세 분 선지식들이 한국의 불교계를 강타한 현상을 벤치마킹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들이 뜨는가. 한국불교가 수천년의 유구한 전통과 전국 곳곳의 수많은 사찰들, 심산 토굴의 무문관과 일초직입의 화두를 끌어안고 용맹정진하고 있는데, 왜 대중적 포교의 주도권은 이들 이방의 포교사들에게 내 주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불교계의 반응은 양면적입니다. 이방인들의 포교가 불교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고,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 고마워하지만, 그런데 또 한편, 그 역할을 정작 엉뚱하게 객이 와서 대신 해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시앗(첩)에게 안방을 내준 마나님같은 뿌루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들이 뜬 이유는, 그들의 ‘불교’보다 그들의 ‘배경’탓”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계십니다.
저도 그들이 그토록 유명하게 된 것이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이력’이나 ‘배경’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현각 스님은 한국인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하버드 대학을 나왔고,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의 오랜 전쟁을 몸으로 겪고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의한 무력 침공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티베트의 고난과 독립을 상징하는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택한 저항의 수단이 무력과 피가 아니라 불교적 관용과 타협, 그리고 끈기와 상식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근본 이유는 이런 배경 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밀은 바로 그들이 쓰는 ‘언어’에 있습니다.
아무려면 우리 스님네들과 선지식들의 수행력이 그들보다 모자라겠습니까.
200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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