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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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만드는 자의 것
유일한 자식인 딸과 사위로 인해서 퇴직금과 읍내의 집까지를 날려버리고 한심한 노년을 보내는 한 선배를 위로해주기 위해 찾아갔다. 그는 대밭마을의 일가 아저씨네 헌 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초등학교 4학년짜리 외손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언덕 위의 허름한 블럭 벽돌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현관 앞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의자 하나가 놓여 있고, 장도리와 시멘트용 못 몇 개가 의자 옆에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 난후에야 나는 그가 바야흐로 현관문 위에 자그마한 현판을 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태양의 집> 죽어갈 날이 멀지 않은 늙은이가 내걸고 있는 옥호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모시고 횟집으로 갔다. 그는 외손자를 데리고 왔다. 몇 잔의 술에 얼굴이 불콰해진 안기철 선생이
“이 아이 태어날 때 제 어미가 꾼 태몽을 한선생이 좀 해몽주시게나. 이 아이 에미는 깊은 산 속에 들어갔는데 바위하고 나무뿌리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맑은 샘물이 펑펑 솟아서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시고 또 마셨다는 것이여. 바로 그 무렵에 이 아이 외할머니가 꾼 것이 아주아주 특이하네. 이 세상에서 제일로 잘 생기고 뿔쌈도 잘하는 챔피언 황소가 두 뿔 사이에다가 아침에 막 솟아오른 새빨간 해를 이고 저쪽 풀밭에서 달려오더니, 이 아이 외할미한테는 눈길 한번도 주지를 않고 이 아이 에미를 향해 돌진했다는 것이여. 이 아이 에미는 그때 풀밭에서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채 곤히 자고 있었다는 것이여. 이 아이 외할미는 겁이 나서 이 아이 에미를 향해 소리를 질렀겄지. 악아, 얼른 도망가뿌러라, 하고…. 그런데 이 아이 에미는 깨어나지 않았고, 황소는 이 아이 에미에게로 더욱 가까이 달려갔지. 이상하게도 이 아이 에미 옆으로 간 황소는 깃털 고운 장끼만큼 작아지더니 이 아이 에미 치마 속으로 푹 뛰어들었어.”
나는 탄성을 질렀다.
“하아! 황소가 새빨간 해를 머리에 인 채! 하아참!”
그의 외손자는 순가락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태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안기철 선생이 구성하고 있는 ‘태양의 집’의 정신을 생각해냈고 이렇게 말했다.
“황소는 힘이 센 짐승이고 뿔은 공격적인 무기입니다. 거기다가 두 뿔 위에 이고 있는 태양은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은 황소의 두 뿔 사이에 삼매경론을 싣고 다니면서 주석을 했다고 전합니다. 두 개의 뿔은 무엇입니까? 두 개의 각, 두 개의 깨달음의 빛입니다. 두 뿔 한가운데에 싣고 다닌 그것은 태몽 속의 태양하고 같습니다. 우주의 율동은 그 태양의 빛에서 비롯됩니다. 그 태몽은 굉장히 역동적입니다.
숲속에 있는 바위와 나무뿌리에서 솟아오른 샘물도 역동적입니다. 하나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물인데, 둘 다 굉장한 태몽입니다. 영후 이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수줍어하고 말이 없고 순종 잘 하는 듯싶지만, 앞으로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굉장히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 것이고, 어떤 일이든지 한번 해내려고 마음 먹은 것이면 기어코 해내고 마는 끈질긴 패기를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얼마쯤 뒤에 들으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채 다른 아이들에게 늘 얻어맞고만 다니던 외손자가 얼마전부터는 자기를 깔보는 아이들과 코피를 흘리면서 맞대거리를 하곤 한다고 했다. 나는 요즘 그의 희망 만들기가 부디 큰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하고 있다.
한승원(소설가)
200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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