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마지막에 소개한 혜능 스님의 비유를 다시 한번 현대적으로 다듬어 봅니다.
“산 속에 금이 묻혀 있다. 그러나 산은 금을 몰라보고, 금 또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산인 줄 모른다. 의식이나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아 이 보물이 귀한 것을 안다. 그래서 전문가를 시켜 산을 뚫고 원광을 캐낸다. 그것을 불에 녹여 찌끼를 떨어내어 순금을 얻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큰 부자가 되어 오랜 가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귀한 불성이 우리 몸 안에 숨어있는 사정도 이와 같다. 이를테면 덧없는 몸이 세계(世界)라면, 나와 남을 갈라보는 뿌리 깊은 습관(人我)은 산(山)이라 할 수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번뇌는 금을 덮고 있는 광석찌끼에 비유된다. 불성은 금이고, 그것을 되찾는 반야지혜는 전문제련사(工匠)이며, 정진용맹은 그 광석찌끼를 뚫고 깨는 일에 해당한다. 정리하자면, 몸이라는 세계(世界) 속에 인아(人我)의 산이 있고, 인아(人我)의 산 속에 번뇌의 광석찌끼가 있다. 번뇌의 광석찌끼들 속에 그러나 불성의 보물이 숨어 있고, 그 불성의 보물 가운데 반야 지혜의 제련사가 있다. 지혜의 제련사를 시켜 인아의 산을 깨고 뚫어, 거기서 번뇌 광석을 확인하고 이를 깨달음의 불로 제련하면, 거기 금강처럼 빛나고 영원한 불성(金剛佛性)이 분명히 명정(明淨)하게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경의 이름에 금강을 붙였다.”
비유가 절실하고 친절합니다. 인간의 몸이 세계라면, 그 세계의 중심에 큰 산이, 즉 ‘나와 남을 갈라보는’ 뿌리 깊은 습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번뇌의 원인이자 결과이지요. 이 벌떼들의 웅웅거림 속에 그러나 고요와 행복의 중심인 불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은,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은, 지혜의 망치로 그 인아(人我)의 산을 깨고, 깨달음의 불로 그 번뇌를 녹여 없애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인 금강의 불성에 숨통을 틔워주고, 그 활동을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불성과 무지, 그리고 반야의 삼각 구도
불교의 프로젝트는 ‘불성’, ‘번뇌와 무지’, 그리고 ‘반야’의 삼각 구도로 되어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불성은 ‘목표’, 번뇌와 무지는 ‘문제’, 반야는 ‘방법’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이 세 축을 각기 본각(本覺), 불각(不覺), 시각(始覺)으로 설정하여 불교의 길을 보여줍니다.
이 삼각 구도에서 관건은 ‘문제’입니다. 이를 좀 부연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바세계의 삶은 비유하자면 파도가 일고 흙탕물이 뒤섞이는 혼란과 고통이라 하겠는데, 이 고(苦)의 현실을 만든 것은 무시이래 계속 불고 있는 ‘무지의 바람’, 즉 무명풍(無明風)입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고통과 번뇌의 근본 원인이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가난과 역경, 전쟁과 기아같은 외적 환경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과 비참의 근본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 있다고, 즉 주변의 여건이나 타인의 악의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독소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특이한 발상이 상식에 젖은 세속의 우리들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모든 문제를 ‘바깥’에 돌리고, 남의 탓을 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풀려!”라거나, “엄마 아빠가 해 준게 뭐가 있어!”에서 시작하여, 일마다 건수마다 남을 비난하고 세상을 불평합니다. 부하는 상사가 성격이 괴팍하고 공적을 가로챈다고 불평이고, 상사는 부하들이 무능하고 비협조적이라고 불만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일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한숨쉬고, 남편은 집 나서면 전쟁터인 이 험한 세상을 힘겹게 건너는 자신을 몰라준다고 술잔을 기울입니다.
불교는 밖을 향한 습관적 쇳소리를 그만 그치고, 문제를 자신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합니다.
시작은 “내 탓이오”의 참회로부터
“혹시, 내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작은 전향’, 조고각하(照顧脚下)로부터 불교가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 회향(廻向)을 주저합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큰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 아니기에, 그 당당함이 스스로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다른 사람들과 주변 여건을 비난하는 권리를 줍니다. 이 합리화 과정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기에 거의 ‘의식’조차 되지 않습니다. 만일, 의식이 된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보듯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에 더 깊이 회향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세의 큰 스님들 가운데도 ‘내부를 향한 깊은 자책’이 큰 서원과 발심으로 이어진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 죄가 없을까요. 혹시 우리 자신이 우리가 늘 문제삼는 그 혼란과 분열, 비참과 부조리를 몰고 온 장본인은 아닐까요.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모든 형태의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우리가 지닌 삶의 공격성,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편견과 관념으로 인해 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세계에 기여했으며, 전쟁, 분열, 추악함, 그리고 탐욕으로 얼룩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부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정현종 역,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21쪽)
둘러 보십시오. 나만 남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도 또한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합니다. 이때 대부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반응하지만, 그래서 싸움이 그칠 날 없지만, 그러나 남이 하는 손가락질과 비난이 정말 전적으로 틀렸겠습니까. 혹시 우리는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편리한 이중 잣대를 무의식적으로 달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내 잣대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의 생생한 현실 앞에서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이 도끼날식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불교는 “그 모든 것이 내탓”이라는 작지만 위대한 각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참회게>를 한번 독송해 봅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그동안 내가 지어온 그 수많은 악업은 나도 모르게 뿌리박힌 삼독, 그 탐욕과 질투와 어리석음 때문이었어라. 몸으로,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낳은 그 모든 잘못을 나 이제 깊이 참회하나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