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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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부분과 전체
생명과학은 생물체에 있어서의 소통을 다룬다.
개체와 개체 간의 소통, 장기와 장기간의 소통, 세포와 세포간의 소통, 세포내의 소기관간의 소통 등 그 모양은 다양해도 결국 생명과학이 다루고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생물체의 의사소통 문제이다. 소통이라는 것은 흐름이자 관계일 뿐이다. 이러한 흐름과 관계가 고정되거나 닫혀있을 때 우리는 병들었다고 말하게 된다. 소통하지 못하여 관계의 단절이 발생하면 원래의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에 나라고 하는 것도, 너라고 하는 것도 단지 그렇게 불리게 된 관계의 모임(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금강경에서도 강조하듯 집착하여 머무르지 말라고 한다. 단순한 관계의 덩어리이기에 계속 변화할 뿐인 어느 특정 모양(相)에 대하여 그것을 고정된 상 아님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하니 모든 고통의 원인은 그것이 마음이건 몸이건 간에 머무름에 있다. 그렇다면 결국 생명과학은 관계의 흐름을 다루는 것이기에 부처님 말씀을 잘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요즈음 복제 문제를 비롯하여 생명과학에 대한 논쟁이 사회문제로서 이야기 되는 것일까.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하여 인연에 의하여 변화하는 관계로서 보라고 하셨고 이를 지혜로서 알 수 있음을 말하셨지만, 불행히도 생명과학은 비록 흐름을 다루는 점에서 조금도 불법과 다름이 없지만 전체적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농부가 물길을 파서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여 농사를 잘 짓고자 할 때 부처님 말씀에 의한 지혜로는 전체 논밭을 바라보아 필요한 방향과 정도로 물을 흐르게 하여 모두가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만, 생명과학이란 농부는 당장 눈앞의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물을 흐르게 하지만 그 물이 그냥 하수도로 빠지는지, 집안으로 흘러들어 엉망진창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생명과학이란 소통을 위한 물길을 트는 것이기에 매우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 방향 설정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전체를 볼 수 있는 지혜이다.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당장 막힌 것을 뚫어 무조건 흐르게 하여 소통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소통이나 흐름이란 것에 또 다른 머무름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머무르면 법상(法相)이 되어 경계해야 할 것임은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진정한 소통과 관계의 흐름이란 아무리 좋은 소통과 흐름에 있어서도 머무르지 아니함을 말하기에 생명과학이 환상과 같은 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것에 탐착하여 전체적 모습을 보는 지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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