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가 산문을 들어서면 수행을 한다든지 여러 가지 원을 세우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첫째도 포교, 둘째도 포교, 오로지 포교를 위해 불문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삼선포교원 지광 스님(71·사진)이 마흔이 넘어 출가를 결심했을 때 머릿속에는 오로지 포교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지난해 고희를 넘긴 스님은 한때 ‘페스탈로치’ 같은 교육자가 되려고 했다. 불문에 들기 전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스님의 이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 북한산 자락의 홍은동 움막에서 수행하던 무공 스님의 인연으로 출가를 결심했다. 송광사 보성 스님의 소개로 옥천 문수암에 계시던 법희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그때는 늦은 출가 탓에 얼른 계를 받아 포교를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스님은 “지금 생각하면 불가를 너무 모르고 무작정 포교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던 시절”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지광 스님은 우리나라 비구니 포교사 자격증 1호다. 당시는 법상에 앉아 설법하는 비구니가 없었던 시절이다. 1978년 신도들과 함께 25평짜리 월세방을 얻어 처음 포교당을 열었다. 그 시절 스님은 신문과 잡지는 물론 각 분야의 수많은 책들을 모두 읽고 난 후, 그날 법문 할 경전내용을 미리 정리해야만 법석에 올랐다. 인쇄라고는 등사지를 긁어 미는 ‘가리방’이 고작이던 시절에도 꼬박꼬박 법문내용을 정리해서 신도들에게 미리 나눠 줬다. 꼼꼼하면서 자상한 스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화다. 아무리 낮은 근기의 불자라도 스님의 법문을 7~8년 들으면 <법화경> 한권을 다 뗄 수 있을 정도로 법문준비에 정성을 다했다.
열 달 뒤 신도가 늘어 100평 법당으로 이사를 했고, 또 14개월 후에는 지금의 삼선동 도심 한 가운데 탑주 양식의 3층짜리 대형 포교당을 세웠다. 당시 불교계 현실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81년 삼선포교원의 개원에 자극을 받아 구룡사, 능인선원 등이 현대식 도심 포교원이 잇따라 생겨났다. 삼선 포교원은 우리나라 대형 도심포교원의 효시라고 평가받고 있다. 82년에는 이곳에서 비구니 1600명이 모여 첫 전국비구니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진천 보탑사 불사를 시작한 것은 15년 전으로 불자들이 자연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신행 공간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참배객이 많아져 연간 10만 명이 다녀간다.
포교하는 스님들을 길러내기 위해 최초의 통학 비구니 강원을 세웠고 현대식 도심 포교당도 가장 먼저 시작했으며 남들은 엄두도 못내던 시절에도 산사음악회를 열었던 스님은 한때는 혜춘 스님을 따라 전국비구니회의 소임도 살았다. 30년 가까이 전국 어디고 안간 곳 없이 불종자(佛種子)를 심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젊은 스님들에게는 늘 자기를 희생하고 하심하라고 가르친다. 이제는 받기만 하는 사찰이 시대가 아니라 무엇이든 주는 것으로 신도들을 감화시켜야 하는 시대라고 강조하는 지광 스님.
“스님의 일이 뭐 있어? 신도들 보다 더 부지런하고, 신도들이 행복해 질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스님 할 일이지.” 조용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