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다
여러분께서 이렇게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닌 도리를 공부하시는데 때로는 너무 힘들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여러 분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힘들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생활 빼놓고 무슨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종교라는 것도 없고 법당이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형상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얘긴데 돈오(頓悟)라는 것은 위에서 그대로 깨우쳐서 실천을 해 내려오는 과정을 말하고, 점수(漸修)라는 것은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깨달아서 올라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단번에, 찰나에 그냥 깨우치는 것은 깨우치되, 깨우치게 되면 하나로 돌아가는 거를 알기 때문에 모든 걸 하나에다가 집중해서 실천을 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깨달아 올라가는 것도 실천을 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는 거든 아래에서 올라가는 거든 둘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생활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 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부처도 없습니다. 부처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생활 자체가 그대로 법입니다.
그대로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을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항상 말하지만 애고라든가 어떠한 업보가 닥쳐오고 용도에 따라서 피치 못할 일들이 닥쳐오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그냥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고 마음이라는 거를 그냥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마음 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냥 마음이라니까, 그냥 어떻게 지나가는 게 마음인 줄 알지 마시고요, 똑바로 진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나가려면 애고(哀苦)가 닥치고,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애고가 다가오는데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달리고 코 달리고 귀 달리고,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충만한 몸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분수를 모르고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이 가정을 등한시하고, 자식이나 남편 또는 부인이나 자식을 등한시하고 아무렇게나 그냥, 화가 나면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욕해버리고 아무렇게나 야단쳐버립니다. 첫째는 내가 말을 그렇게 한다면 마음에 입력이 된다는 것을 꼭 아셔서 조심해야 합니다. 입력이 되면 그대로 진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빠르게 나오고 더디 나오고 이것뿐이지, 그대로 입력이 돼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 하나, 말 하나, 행동 하나를 잘 하셔야 합니다. 두번째는 이 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정진한답시고 또는 밤 정진 한답시고 기도 간답시고 가정을 등한시하고, 남편과 자식을 등한시하고 또는 부인과 자식을 등한시하고 이렇게 해서, 그 밥을 못 먹어서 배고픈 게 아니라 즉 말하자면 외로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가서 외식을 하게 됩니다. 남편들은 나가서 간식을 하게 되고 자식은 나가서 방황하게 되고.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스님네들은 여러분의 가정과 스님네들 이 도량이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둘이 아니기에 아픔도 둘이 아니요 가정이 파탄되는 것도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안방에 들어가면 안방이 법당이요 변소에 가면 변소가 법당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법당이 되는 것이다.”라는 얘기요. 내가 없다면 모든 게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음이 산란하고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거기다 되돌려놓고 지켜보는 사람이 돼라고 했습니다. 이 도량에 왔다가도 빨리 다녀가도 되는 것을, 그저 밤에도 정진한답시고 가정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과 남편을 배고프게 만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그전부터도 내가 밤 정진을 시키지 않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 가는 곳마다 부처가 계신데, 어떻게 밤에 여기서 정진을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자기를 돌보고, 이 자리에 앉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돌보겠습니까? 처처마다 부처고 처처마다 도량이고 처처마다 자기가 그대로 법인데!
요즘 종교로 인해서 가정파탄이 나는 집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전부터도 그것을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절에 기도 들어간다, 기독교나 가톨릭교도 기도 들어간다 산기도 간다 이럭하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니면서 허황되게, 그렇게 자기의 진실을 찾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지팡이로 세우지 못하고,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헛된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의 남편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모든 것을 등한시하면 기도를 아무리 백 번 천 번 해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안팎이 다 화목하고 아주 즐겁게 아무 외로움이 없이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그런 길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고 행동에 달려 있고 말에 달려 있습니다. 피치 못한 사정이 있어서 나간다 하더라도, 내가 전에도 얘기했죠. 식탁 위에나 냉장고 문에나 글씨를 크게 해서 써놓고 “얘들아,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나가니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고 “널 사랑해!” 하고 크게 써 붙여놓고 나온다면, 그게 뭔 줄 아십니까? 그게 마음의 그 에너지! 즉 광력의 힘이 거기까지 미쳐서 그거를 떼어보는 순간에 바로 즐거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을 하지 않게 되죠. 남편이고 자식이고 부인이고 모두가 말입니다.
여자만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하루 24시간이 고달팠어도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듯이, 말 한마디를 하게 되면 하루 24시간의 피로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힘이 솟아오릅니다. 애들이 이탈되는 것도 부모의 책임이 99%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양으로 나온 애들입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할 양으로 남편들이 그렇게 되고 부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참지 못하고 불끈불끈 내뱉고, 있는 정 없는 정이 다 떨어지게 만들고, 여자나 남자나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애들이 보고 배우는 게 뭐겠습니까?
종교라는 것이 절에 나와서 기도나 하고 정성이나 들이고 이러는 게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우주 전체에, 인간들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 돌아가는 이 자체가 종교입니다, 불교고. 지난번에 여기서 밤 정진을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굳이 말릴 필요는 없겠지만, 말려야 되겠습니다. 한 발짝 떼어놓고 가는 것도 정진이요 보는 것도 정진이요 앉아있는 것도 정진이요 눕는 것도 정진이요 서는 것도 정진이고 일하는 것도 정진인데, 어떻게 그렇게들 생각을 하십니까? 항상 여러분한테 길을 가다 넘어지면 길을 짚고 일어난다고 말을 했죠. 그랬는데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일어나려고 한다면 그거는 잘못돼도 이만저만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여기 앉아 있을 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시간에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면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그런 태도가 그대로 정진입니다.
그거를 누가 하는 겁니까? 자기가 하는 거지요. 자기 하나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벌어지고 일체 만법이 작용이 되고 일체 만법이 들고나는 겁니다. 빛보다 더 빠르다고, 심력은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힘이 있다고 항상 말을 했지요. 그랬는데 몇 시간 동안을 여기서 정진한답시고 졸고 자고 온통 그저 말 수단으로 말 오고 가는 데에 전념을 다하고, 이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모두 하나하나, 항상 말하지만 화가 나고 어떠한 잘못이 있고 하늘이 무너지고 깨지고 이러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다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맡겨 놓고,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동,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모든 것은 한군데서 일체 만법이 나고 드니까 “나는 그런 데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오는 대로 심부름만 열심히 잘하면 된다.” 하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그렇게 나가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보십시오.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모든 거를 여러분의 차원대로 능력대로 가지고 살다가 나중에는 몸까지 다 놓고 가거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허공에서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냥 요만한 것만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저 야단들입니다. 지금 금방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이 그냥 한 찰나에, 찰나찰나에 돌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구를 붙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자나깨나 움죽거리는데, 이것도 (법상을 짚어 보이시며)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내것 네것 이렇게 마음으로 붙잡고 “요거를 해야 옳을까, 안 해야 옳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거를 붙들고 돌아가니까, 이게 업이 되는 거죠. 어떤 경우에는 이 모두가 다가오는 대로 업을 지어서 외려 그 윤회성을 바로 입력시키게 됩니다, 그게. 애착을 가지고 붙들고 늘어지니까.
이 에너지가, 허공만하게 큰 에너지가 있다 하면 그 에너지 덩어리는 여러분이 악으로 생각하면 악으로 쓰여지고 선으로 생각한다면 선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악이고 선이고 한군데서 나옵니다. 한 에너지덩어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악이다 선이다 하고 양단간으로 두 마디만 하지만, 그 천차만별의 악과 선은 가지가지로 다릅니다. 마음으로 악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으로 선을 짓고, 행동으로 선을 짓는가 하면 행동으로 악을 짓고, 말로 악을 짓는가 하면 말로 선을 짓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천차만별로 많습니다.
여러분의 고난은 고(苦)가 고가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차원을 높이기 위해 나한테 다가오는 재료로구나 하고선, 그냥 고가 아니라 바로 나를 이끌어주는 나의 수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게 하나도 고가 될 수 없습니다. 고(苦) 하나만 떨어진다면 집착(執着)도 떨어지고 멸(滅)도 떨어지고 도(道)도 떨어진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이 사제법(四諦法)이 하나만, 고 하나만 없다 한다면, 여러분이 망상이 나오느니 뭐니 뭐니 뭐니 하는데 그런 게 다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팥죽 솥에서 부글부글 끓는 팥죽 방울이 나오듯 한 몸뚱이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럼 딴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 제자리에다 놓으라는데도 그렇게 못 놓겠습니까? 그 팥죽 방울 나오는 대로 제자리에다가 놓는다면 팥죽이 익어서 방울은 다시 안 나옵니다. 이 팥죽 방울이 나온다고 불을 밀리고 놓고 밀리고 놓고, 이래 보십시오, 팥죽이 익나?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팥죽 방울을 생각하지 말고 팥죽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 전체가 팥죽이다 이런다면, 아니, 뭐이 걱정입니까?
방편으로 말을 하자면 또 이런 게 있죠. 어느 집에 가서 머슴을 사는데 말입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지 주인의 일을 안팎으로 일일이 걱정을 한단 말입니다, 참견을 하고. 그럼 주인도 싫어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머슴으로 살면, 종으로 살면 살았지 웬 주인 일에 그렇게 참견이 많습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걸. 그리고 걱정 하나도 할 게 없어요. 주인이 다 살림을 하는 거니까. 그와 똑같은 얘깁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영원치가 못합니다. 종과 같습니다. 옷이 헐면 주인은 바로 옷을 다시 갈아입습니다. 그와 같이 몸뚱이도 역시 옷과 같습니다. 옷 입은 것은 수명이 짧고, 이 몸이라는 옷 입은 것은 수명이 좀 길다 뿐입니다. 또 옷이 맞지 않으면 후딱 벗어버립니다. 벗어버리고 딴 거 입습니다. 그와 같이 애들 적에도 죽는 수가 있고, 젊어서도 죽는 수가 있고, 늙어서도 죽는 수가 있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고 해도 나는 가져갈 수 있을지언정 참나는 가져갈 수 없느니라. 영원한 나는 영원하니라 한 겁니다. 영원한 그 자체가 바로 왜 똑같지 못합니까? 그런데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하는 데서 잘못 돌아가는 겁니다. 욕심이 과하고 착이 많고 탐심이 많아서 이렇게 모두가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아까 얘기했듯, 한 식구가 모여서 사는 것도 우리가 한 철 놀러나와서 인연에 따라서 만나서 한 철 살다가 헤어질 때는 다시금 다 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을 집착하겠습니까? 나라는 조건 이 자체도 바로 헌신같이 버려야만 됩니다. 허나 이거는 부처님 뜻에도 그렇고, 육신을 낳아준 부모의 뜻도 그렇고 또는 아래로는 자식들을 낳아서 기르는 소임도 다 해야 하고 하기 때문에 육신도 잘 섬겨야만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물질계와 정신계가 이렇게 서로 같이 돌아가야 되겠죠.
때로는 애들을 공부를 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쇠약이 되면 공부할 생각이 안 나고 의욕이 생기지를 않고 몸이 나른하고 졸립기만 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거는 부모님들이 상식적으로 알아서, 남편이든지 누구든지 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피로 회복제, 간장약이 피로 회복제입니다. 그거라도 먹여서 나른하고 아프고 졸린 걸 쫓아내고 정신 회복이 되게끔 이렇게 돋구어줘야만 모자라지가 않죠? 용기가 나고 의욕이 생기고 그런 거지 여러분도 아파보세요, 의욕이 생기나? 이거는 상식입니다.
여러분이 아침 저녁 점심 밥을 어떻게 먹습니까?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밥을 먹이는 것도 약과 같습니다. 약 아닌 게 없습니다. 밥도 약이요 과일도 약이요, 모든 게 약 아닌 게 어딨습니까? 약이라고 이름을 지어놨으니까 약이고 밥이라고 이름을 지어놨으니까 밥이지, 밥 따로 약 따로 있습니까? 결론은 하나죠, 먹는 것이. 그러나 그것도 무조건 아무거나 먹여서 되는 건 아닙니다. 체질에 따라서 여러분이 자식들을 기르고 부모를 섬기려면 반의사는 되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모든 것에서 그렇게 진실하게 내 마음에 모든 것을 돌려 놓는다면 아파서 돌려 놓을 때는 바로 약사로 화해서 찰나에 약사가 됩니다, 내 주인공이. 일이 안돼서,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거기다 맡길 때는 관세음이 됩니다. 또 때에 따라서는 칠성이 되고 독성이 되고 용신도 되고 지신도 되고, 모든 게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거기다 놓는 대로 이렇게 화해서 바꿔지기 때문에 천백억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어차피 지나갔으니까 모르지만, 내년부터는 여러분이 합격 기도를 부친다고 하는데, 이 기도 부치는 것도 스님네들이 얼마를 가져오라 해서 하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적든 많든 형편대로 지극하게 자기가 마음을 내서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야지, 가게에 가서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때에 조금도 의심 없이 돈을 내고 물건을 사듯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가 가져오랜다 하면 벌써 붙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년부터 접수는 하되 돈은 얼마얼마 가져오라는 법이 없어질 겁니다.
하여튼 모든 것이 일거일동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는 가정으로부터 내 마음, 내 몸, 내 식구 이것이 따로따로이 있지 않습니다. 이 법당 따로 있고 댁의 가정, 집들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어느 사찰이든지 매일 와서 정진하고 정성들이고 그렇게 잘 한다면, 그저 자주 와서 노상 살다시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스님네들은 다 좋다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스님네들도 생각해볼 점이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왜냐? 그 가정이 내 가정이요 그 사람들이 나요 그 아픔이 나요, 모두가 나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어설피해서는 안 되겠다는 그런 마음들을 다들 가져야 합니다. 바로 그 아픔이 내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도 가정 섬기듯 모두가 이렇게 해야 될 텐데 모두가 남의 탓으로 돌리고 비판하고 온통 이렇게 돌아가니까 한마음이 될 수가 없죠. 내가 어떡하면 한 계단을 더 올라서나, 어떠한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하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사단이 많고 그러는 반면에 국민들만 힘들게 만들 수도 있는 거죠. 가정에서도 부부가 잘못하면 애들이 힘이 든단 말입니다. 애들한테 뭐라고 안 그래도 부부가 항상 싸움질이나 하고, 항상 엇갈리고 사네 못 사네 하고 야단들을 한다면 그거 듣는 자식들이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구, 지겨워.’ 하고 이탈을 하게 되죠. 이게 쌓이고 쌓이면 터지게 되죠. 그러니 터진 연에 뭐를 붙들려고 그러느냐 하면 말로 해서 몸을 붙들려고 애를 쓴단 말입니다, 또! 몸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바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붙들어야 육체는 저절로 오게 되고 따뜻하게 되죠.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종교가 어떠한 것인지, 이 불교다 하는 것이 종교인지 한번 잘 생각을 해보셔야 될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자체가 바로 종교입니다. 그리고 불교입니다. 내가 항상 얘기했죠. 불(佛)이라는 건 일체 모든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바로 그 모든 일체 생명의 근본에서 서로가 교환하고 말하고 또는 통신이 되고 서로 이러는 것이, 안팎이 없이 통신되고 교류하고 돌아가는 거, 혼자 살지 않고 포괄적으로 모든 게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교(敎)라구요. 그러니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에 있습니까? 가톨릭교에 있습니까? 불교에 있습니까? ‘불’이라는, ‘교’라는 그 두 글자 속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날 상대를 놓고 믿고 상대를 놓고 찾고, 상대를 놓고 원하고 상대를 놓고 기도하고, 이게 뭔 짓들입니까?
“불법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니까 어떤 선지식이 주먹을 불끈 내밀었다 이겁니다. 그게 뭔 뜻입니까? “불법이 어떤 겁니까?” 하고 물으니 어떤 선지식은 벌떡 뛰어내려와서 그냥 멱살을 쥐고 발길로 차고 그냥 막 두들겨 팼답니다. 그러니까 “아이고, 죽겠다.” 하니까 “아이고, 죽겠다는 놈은 누구냐?” 하고 물었답니다. 그냥 좋은 말만 잘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식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경을 아주 달큼하게 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속 내용을, 그 속 내용 하나에서 수만 가지로 화해서 돌아가는 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몸 떨어지면 입도 떨어지고 말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내가 말하는 것은, 못났든 잘났든 “너만이, 네가 걸음을 걷고 있다.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는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만이 자기를 걷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이리로 가게 하고 저리로 가게 하고 이럽니다. 그러니 그것을 둘 아니게 다잡아서 다스리면서 가야죠.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던가요? 촛불이 이렇게 켜져 있는데 촛불 심지가 비뚤어졌으면, 심지가 비뚤어졌으니까 불도 비뚤어지고 한편으로만 타가지고 촛농이 줄줄줄줄 다 흘러내립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마음이 그렇게 비뚤어졌으면 다시 다스려야죠. 촛불이 너무 길고 심지밥이 비뚤어졌으면 잘라버리고 똑바로 세워놓으면 촛농이 양면으로 흐르지도 않고 똑바로 잘 밝게 켜질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그 초 다스리는 거와 초 심지 다스리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소 고삐를 쥐고서 똑바로 다스려라 하는 뜻은 소가 만약에 남의 집 파 밭이나 배추 밭이나 이런 데로 막 들어가서 짓밟아놓으면 안 되니까 고삐를 쥐고서 “똑바로, 길로 똑바로 가거라.” 했던 거죠. 자기 고삐를 자기가 쥐고서 가는 거죠.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으로도 그려놓고 그랬던 거죠.
그러니 나라도 그렇고 어느 회사도 그렇고, 어떠한 일을 하든 여러분의 살림이 윤택해지고 잘 해나가려면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나가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전에 신도 한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의 돈을 반이나 얻어가지고 회사를 하는데 회사를 하니까 사장이 됐단 말입니다. 사장이 됐으니깐 차도 타야 하고, 사장이 됐으니깐 ‘나’라는 모가지가 뻣뻣하게 그냥 굳어졌단 말입니다. 그래 숙일 줄을 모르죠. 그러다보니까 외식도 하게 되고 외식을 하다보니까 외식에 빠지는 수도 있고, 그러니까 정신이 회사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사장에 그냥 매달려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 회사가 뭐가 됩니까? 나중에 홀딱 다 넘어가고 자기 들어 있는 집까지 다 날렸습니다.
이런 문제 등등이 나올 때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스님네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 해나가는 일은 자나깨나 오직 정신을 거기다 두고서 이 삶의 보람을 자유스럽게 누리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도 돌봐주면서 다스리면서 나가야 되는 거지 그것도 욕심이 과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또는 세세생생에 버림을 받아서 오간지옥에 태어나서 국내 밥내도 못 맡게 됩니다. 사람의 의식으로 살다가 벌레가 돼서 산다면 얼마나 그게 치욕적인 고(苦)입니까? 그거를 알고 있는데 벌레로 만들어놨으니까 그렇게 고가 많단 얘깁니다.
여러분은 ‘지옥도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다’ 하니까 그냥 겉으로만 그렇게 알고 계시죠? 실질적으로 이것이 그렇게 돌아갑니다. 금방 살다가 금방 딴 모습을 해가지고 나오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몸까지 다 두고 가지만 업식은 가지고 간다 이겁니다, 한 발짝도 에누리 없이.
옛날에 원주에 있을 때 이런 실제 얘기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뭘 잃어버리면 고양이를 시루에다 앉혀서 찐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게 비비틀리는 대로 그것을 집어간 사람이 비비틀린다고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어디 농촌에서 무엇을 아마 크게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러니깐 그 마을에서 전부 그냥 이것을 이렇게 한다고 외치고는 고양이를 시루에다 앉히고는 쪘답니다. 그거를 그렇게 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손주를 봤는데, 머리는 고양이고 몸뚱이는 사람이었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갖다가 묻어버린 예가 있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어버렸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엊그저께도 얘기했듯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많아서 박사님들이 연구를 해서 그 병을 고친다 하더라도, 그 병은 고쳐질 수 있을지언정 그 병의 근본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화해서 다른 걸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어떠한 인과로서 이렇게 왔는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는 데 열심히 잘 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게 그냥 대충 이렇게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지금 생활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그대로, 알면 병이고 모르면 약이다 이러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알고 몰라야지, 모르는 게 그냥 모르면 안 됩니다. 알고도 겸손하게 몰라야 됩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61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