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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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6)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불교, 희망의 목소리에 더 큰 무게를

금강이 이어지는 ‘반야’를 가리킨다는 거야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음 강의에서, 그 반야가 대체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금강의 특성을 갖고 있는지 차분히 짚어가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다른 견해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혜능 스님은 이 ‘금강’이 가리키는 바가 ‘반야’라기보다 오히려 ‘불성’이라고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예 금강불성(金剛佛性)이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금강이 불성을 가리킨다?
아, 이 새로운 견해에, 또 분별심을 내서 시비를 가리려는 분이 있군요. 둘은 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다만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보기에는 불성쪽이 반야보다 더 크고 포괄적이며 적극적 선택인 듯 싶습니다. 포괄적이라 함은, 반야가 불성의 한 부분적 ‘기능’이라는 뜻에서이고, 적극적이라 함은, 반야가 ‘짜르는’ 부정적 기능에 주목한 말인데 비해, 불성은 자체 내의 ‘영속적’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혜능 스님도 구결의 서문에서 “불성(佛性)의 보물 가운데 지혜 공장(智慧 工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도 많겠습니다. 근본적인 반론을 예상할 수 있는데요, 불성의 ‘건립’이 불교용어로 상견(常見)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본시 무아(無我)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자성(自性)이라는 그릇된 사고습성을 부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데, 왜 또 뒷문으로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끌어들여 불교의 근본을 훼손하고 있느냐는 힐난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심각하게 전개되어 왔고, 또 일본에서 특히 비판불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5세기 중엽 중관학파 안에서도 프라상기카와 스바탄트리카가 서로 갈라져, 인간의 이기적 판단과 상대적 인식에 대한 근본적 부정을 하고 난 다음에 과연 ‘무엇인가’ 적극적 가치가 남아있느냐를 두고 격렬하게 부딪쳤다는 것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단연 스바탄트리카의 견해에, 즉 인간의 삶에 희망이 있으며, 불교가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편에 기웁니다.
여러분, 불교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염세주의는 불교와 가장 멀리 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일러주기 위해서라도 혜능의 불성론(佛性論)이나, <대승기신론>의 적극적 희망의 목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참에 말씀인데, 그동안 너무 불교가 ‘부정적’ 언사로 도배되어 있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요새 젊은이들이 절을 꺼리고 어려워하고 있다는데, 불교의 말과 절의 분위기에서 느끼는 어두운 색조가 한창 파릇하고 통통 튀는 그들에게 어필하지 못한데도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반야의 칼날 vs. 불성의 봄바람
저는, 어느 편이냐 하면, ‘불성’쪽에 기웁니다. 실체화할 위험이 반야보다는 더 커 보이나, 반야가 갖고 있는 차가운 칼날의 이미지보다, 자기 존재의 긍정과 이웃을 향한 공동체적 자비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불성쪽이 훨씬 낫고 눈물겹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혜능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속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혜의 불로 제련하여, 세상에 다시 없는 부자가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모든 중생 수행자들이, 철광 더미 속에 금강이 있는 줄을 알아, 지혜의 불로 녹이고 제련하여, 잡된 쇠찌끼는 떨어내고, 순수 금강만 남기기를 바랍니다.” (所冀, 學者同見 鑛中金性 以智慧火鎔煉, 鑛去金存.)
스님은 인간 내부에 견고한 불성이,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견고한 불성을 위협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산양의 뿔, 영양각입니다. 스님은 “영양각이 금강을 깨듯이, 번뇌가 불성을 ‘흐트린다(亂)’”고 하십니다. 아마도 혜능 스님은, 금강이란 물건을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금중최강(金中最剛), 즉 ‘강철’같은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대개 짐승의 뿔은 단단하여 한약재로 쓸 때도 톱으로 썰어 쓴다고 하는데, 이 산양의 뿔은 그 중 단단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금강을 깨는 이 영양각은 다시 빈철(賓鐵)에 맞으면 부서집니다. 즉, 그렇게 단단하고 뿌리깊은 번뇌도 반야 지혜의 칼에 부서지고 그 불길에 녹는다는 말씀입니다. 스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마음의 기적, 그 불가사의
“왜 이 경의 이름에 ‘금강반야바라밀’을 붙였는가. 금강은 세상에서 귀한 보물이다. 그 특성은 지극히 날카로와 온갖 물건을 다 부순다. 금강이 지극히 견고하다고는 하나 영양각이 깰 수 있다. 여기 금강은 ‘불성’에, 그리고 영양각은 ‘번뇌’에 비유된다. 요컨대 금강이 비록 견고하나 영양각이 능히 부수고, 불성이 비록 견고하나 번뇌가 능히 교란시킬 수 있다. 번뇌가 비록 견고하지만, 그러나 반야지가 능히 깨부술 수 있다. 이는 영양각이 비록 단단하나 빈철이 깨부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셋의 서로 물린) 이치를 깨닫는 자, 불성을 선명히 이해했다 하겠다. (如來所說金剛般若波羅蜜, 與法爲名, 其意謂何. 以金剛世界之寶, 其性猛利, 能壞諸物. 金雖至堅, 羚羊角能壞, 金剛喩佛性, 羚羊角喩煩惱. 金雖堅剛, 羚羊角能碎, 佛性雖堅, 煩惱能亂. 煩惱雖堅, 般若智能破, 羚羊角雖堅, 賓鐵能壞. 悟此理者, 了然見性.)”
역시 번뇌도 단단하고 불성도 단단합니다. 그럼에도 불성이 더 단단합니다. 앞에서 말하듯이, 번뇌는 반야에 의해 단번에, 그리고 때로 영구히, 부서질 수 있지만, 불성은 번뇌에 의해 교란되고 흐트러지긴 하지만, 영영 바수어지거나 사그라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잘 믿지 않을 것입니다. 108번뇌, 살아 견뎌야할 고해(苦海)의 세상은 이리도 팍팍하고 끈질겨, 우리 모두가 크든 작든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잘 보이지도 않는 불성이 무시이래의 번뇌의 침범과 교란 속에서도 끝끝내 자약(自若)하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각자는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거치며 때로 절망적 고통과 부당한 악의를 거쳐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불리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은 늘 자신의 본래 힘과 존엄을 ‘회복’해 나가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나아가, 시련을 거치면서 그는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운명으로 돌아보게 되지요.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힘은 우리 모두에게, 누구나 예외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200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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