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마음으로 굴리면서 항상 따뜻한 마음을 내주어야
문
참사람이 되려면…
스님!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합니까? 그리고 임제 스님께서도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참사람의 경지는 어떠한 경지인지요?
답
우리가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도 지·수·화·풍으로 뭉쳐서, 바람과 흙과 물과 이 모든 것이 한데 합쳐서 큰 성을 이루어서 그것이 바로 우리 지구라는 집이 됐고, 바로 대천세계라는 집이 됐고 중천세계도 있고 하천세계도 있고 이렇게 돼서 우리가 지금 조화를 이루고 돌아가는 것이 전체 아닙니까? 당장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물이 없어도 아니 되고 불이 없어도 아니 되고 흙이 없어도 아니 되고 바람이 없어도 아니 됩니다. 그럼으로써 사대가 공해서 태양이라는 그 자체의 따뜻한 그런, 보람 있는 밝음이 생긴 겁니다.
우리의 마음도 역시 그러한 밝음이, 우리를 전부 이끌어 줄 수 있는 그 밝음이 되기 때문에 바로 우리의 한마음 그 한 점의 근본이 태양의 근본도 될 것이요 천지의 근본도 될 것이요 우주의 근본도 되니, 이 오온에 스스로 밝아서 돌고 스스로 밝아서 걸릴 게 없는데 어찌 이 오온에 칠보가 가득차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아니 닿는 데가 없거늘 사람들은 모습과 이름을 칭하고 거기에 자기의 그 삶을 취하려고 하니 그것이 가는 곳마다 걸려요. 그러니 그 걸리는 것에서 언제 어느 때에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해서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부처님이라는 이름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똑바른 ‘참사람’을 이르는 것입니다. 참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사람 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또는 참사람 아니 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직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점의 공한 자리에,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다시 놓는다면, 다시 맡겨 놓고 믿음을 진실하게 갖는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는 부처님의 마음도 모든 중생들의 마음도 모든 걸 다 알게 되며 남을 해하지 않는 마음,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되죠. 이 자비라는 것은 헐고 깨끗하고 더럽고 이런 것이 몰락 없는, 높고 낮음도 없고 부처 중생도 없는 그러한 한 점의 그 내놓을 게 없는 이런 빈 그릇 자체를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밝게 비추어 주는 바로 손 없는 손이요 발 없는 발이요 길 없는 길이라. 평림하여 평손이요, 평발이요, 이것이 바로 한 손 들어서 천지를 삿갓으로 쓰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꿰어 굴리면서, 한 발 들어 이 산 저 산 푸른 산 한 발 디디니, 목마르면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말이 얼마나 참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참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물 한모금 떠마실 때, 여러분이 목마를 때 물 먹겠다 하고 계산하고 먹습니까? 무심으로 그냥 떠먹습니다. 그게 바로 참사람의 활용입니다. 여러분이 금을 가졌다면 그걸 얼른 내놓지 않지만 걸레를 빨아 쥐었다면 빨리 내던질 겁니다. 빨리 빨아서 얼른 짜서 얼른 놓습니다. 금을 가졌더라도 걸레 놓듯 빨리 짜서 빨리 놓으십시오. 신발 벗어 놓고 올라가듯…. 아시겠습니까? 금을 가졌다고 해서 이걸 소중히 생각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갖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관리인만 돼라는 얘깁니다.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를 알고 살고 건너뛰지 못할 걸 건너뛰다가 개천에 빠지지 말고,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서서히 침착하게 산이 태산같이 이렇게 있으면 서서히 돌아가고,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에 채워 놓고 물이 흐르듯이, 이렇게 침착하게…, 어떠한 악조건이 닥친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면서, 거기서 나온 거니까, 악조건도 자기로 인해서 나온 거니까 그 자기 주인공 한 점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로 인해서 악조건이 나온 것이지 딴 사람으로 인해서 나온 건 아니거든. 잘못했든 잘했든 자기가 있어서 나온 거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서 바로 다시 놓는 그런 그 침착한 마음, 그리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스스로서 수레바퀴 돌듯 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도 없이….
이것이 참사람의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라기 보다도 참사람의 법을 알아야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뜻도 알 것이요, 한마디 한마디 해 놓으신 그 뜻을 바로 우린 지금 현실에 맞추어서 현실의 용어로, 우리는 그때에 방편으로 쓰던 것을 현실의 방편으로써, 언어로써 이렇게 대치해서 그것을 서로에게 이득이 있고 공덕이 되게끔 이렇게 전달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악조건의 그 구정물 핏물 고름물을 전부 한데 합쳐서 한데 새겨서 말갛게 만들어서 생수물을 해서 떠 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한 방울의 생수가 아니라면 이건 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그 뜻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
세속에서의 사랑의 의미
불교에서는 착을 놓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속가에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가족간의 사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지속해 나가야 하는지요? 길고 긴 인연의 굴레를 벗어나서 집착 없이 사랑을 하고 싶고 인륜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떳떳하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질문을 올립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답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좀더 마음으로 음미해 가면서 자기의 뜻으로써 맛을 알 수 있게끔 노력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겉으로 항상 돌아가는, 기복으로 돌아가는 분들은 부처님의 속을 알 수가 없고 남의 속을 알 수가 없고, 하다못해 애들의 속도 모릅니다. 자기가 부부로 살면서도 자기 남편의 속을 모르고 자기 자식의 속을 몰라요.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자식이 돼봐 주는, 내가 자식이 돼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지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 보는 그런 마음을 가져 보십시오. 또 남편이 어떻게 행동을 할 때, 내가 남편이 돼서 한번 바꿔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굴림이 여러분 삶에서 생동력 있고 보람 있는 삶의 의지를,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음도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도 여러분이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생각하는 그러한 마음이, 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하는 그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요. 이 마음의 굴림에 의해서 앞날이 펴지고 앞날이 밝아지지 마음으로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 그 길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거죽으로 “얘야, 너는 어떡하고 어떡하고 어떡하고….” 한다면 말만 많고 이거는 똑바로 가르치겠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바로 오히려 비뚤게 나가는 수가 100% 될 수가 있죠. 남편에게도 “이것을 당신은 왜 이렇게 합니까? 지금 세상에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하고 자꾸자꾸 그렇게 해 봤던들 그러면 오히려 번연히 알면서도 이것은 주장을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파괴가 됩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저 햇빛이 따뜻하게 여름에 무덥게 아주 쨍쨍 쪼여 보십시오. 그러면 입었던 옷도 훨훨 벗어 버립니다, 원리가…. 그러나 아주 그냥 강하게 추위가 오고 모진 바람이 몰아닥칠 때는 반드시 옷을 덥게 입고 더 옹그리고 더 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기의 한 꺼풀 한 꺼풀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유스럽게 뛰어놀지 못합니다. 자유스럽게 살 수도 없습니다. 속박돼 있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업보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가? 팔자운명이 얼마나 세기에 이런가? 내가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이런가? 이러한 사념에 그냥 끄달리면서 그 암흑 같은 길을 걸어야만 했고 그 걸어가는 길이 자기의 밝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캄캄한 암흑길을 걸어가니 이 몸을 벗는다 할지라도,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 낙향돼서 캄캄한 길을 또 걸어야 하는 그런 모임에 의해서 다시 인연이 돼서 또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 하나에 우리가 세세생생에 얽혀서, 얼마나 그 삶에 의해서 고통받아야 합니까? 거기에 인연 뿌리가, 인과 뿌리가 얼마나 지독하다는 걸 아십니까?
그래서 이 모든 사람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더 그렇고, 이 공부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공부라고 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것이 전부 공부니까 말입니다. 하나하나 뉘우치면서 하나하나 진화되면서 창조해 가면서 우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옮겨 가면서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고정된 행도 없고, 고정된 말도 없고, 고정되게 먹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빈 그릇이 그저 일렁일렁 움죽거릴 뿐입니다.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도 없는 마음이 자기를 움죽거리고 갑니다. 그 마음이 선장이라면 바로 그 선장은 나침판을 놓고서 그냥 가곤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거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너무나 중요하고 그러니 둘로 보지 말라.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 보살이 아니니라. 깨우쳤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지 않고 바깥으로 도는 자, 이 법문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느니라. 이 법문을 제대로 전달을 못함으로써 공덕은 하나도 없고 보살이 아니니라. 이 몸으로, 모습으로, 이 이름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이 모습과 이 이름으로 인해서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식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일체 만물의 유생 무생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굴릴 수가 없느니라. 제도할 수도 없느니라. 제도했다고 하느냐? 제도를 했다고 하지 말라. 둘이 본래 아니기에 제도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느니라. 그대로 마음으로 굴리면서 항상 따뜻한 마음을 내 주면 되느니라.
따뜻하게, 둘로 보지 않는 마음, 남이 아프면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내 준다면 그것이 바로 네 아픔과 둘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진짜 들어가서는 인간의 마음이라. 인간이라는 것도 이름이요, 부처라는 것도 이름이니라. 여래라는 것도 이름이요, 다 이름이니 그 이름을 가지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이름 속에 소중한 것이 있느니라. 그 모습 속에 소중한 것을 발견하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보림을 하면서, 항상 그 안으로 굴리면서, 거죽으로 나타내지 말고 경솔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남을 깔보지 말 것이며 벌레 하나를 본다 할지라도 너로 알아라. 저 꽃이파리 저 나무이파리, 무정물이나, 하다못해 돌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문
마음 법은 어렵고 힘든 것만 같아
저희 앞에 닥친 고난은 대해와 같아서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버티고 있어서 끊임없는 고해를 연상케 합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해결이 되는 방법들을 바깥으로 많이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런 방법들에 비해서 이 마음 법은 그렇게 쉽고 빠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저희 앞에 놓인 고를 녹이면서 깨달음의 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을지 가르침 청하옵니다.
답
지금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디게 가는 거고 그것은 절대 빠르게 가는 길이 못됩니다. 내 주인공은 내 보디가드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때에나, 즉 말하자면 아프거나 해서 관하면 의사로 찰나에 바뀌어지고 또 어떠한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이 되고 좋은 데로 가야겠다 하면 지장이 돼 주고 칠성부처가 돼 주고 지신이 돼 주고 용신이 돼 주고 허공신이 돼 주고, 별거 별거로 다 돼 줍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는데 뭐가 답답해서 바깥에 가서 묻고 다른 것이 있나 찾아보고, 그렇게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바쁜데. 지금 바빠 죽겠어서 말을 하는데 얼른 자기한테 하는 게 제일 빠르지 나가서 하는 게 뭐가 빠릅니까?
말하자면 자기한테는 곧바로 그냥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가서 찾고 하는 것은 그것을 듣느냐 안 듣느냐도 문제지만 올바로 나가는 게 못되고 또 빠른 길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와 내가, 나와 내가 항상 그렇게 제일 빠르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나와 내가 더 빠르지 누가 더 빠릅니까? 그래 정히 답답하면 ‘야! 아무개야’ 자기 이름을 자기가 세 번 부르고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아귀를 지어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말소리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길에 가다가도 하고 앉았다가도 하고 섰다가도 하고 뭐 누구하고 같이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항상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서 통신을 하게 되면 그냥 재깍, 재빨리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렇게 빠른 거를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바깥으로 찾으시면 어떡합니까? 이게 부처님의 직속, 즉 말하자면 통신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아니면 제 삼자가 자기를 대신 해서 살아줄 리 없구요. 그러니까 꼭 여러분 개개인이 자기 아닌 자기를 꼭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렇게 통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많이 생기고 그런다 해서 어디 나가서 그렇게 물어보고 그렇게 해야 빠른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다니면서 잘못된 거는 거기다가 관하시란 얘깁니다. 거기다 관하시면 그것이 슬금슬금 돌아서 돌아서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하십시오.
문
스승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왜 스승이 굳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예전에도 말을 했지만, 나를 견성해 가지고 참 보림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실은 나도 처음엔 ‘내가 죽어야 된다, 죽어야 된다’ 하고 죽을 거라도 있었지만 그 후에 보니까 죽을 것도 없어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답
예전에 어느 큰스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가면 죽습니까?” 하니까 “눈 뜨고 푹 자면 죽느니라.” 했습니다. 어느 때에 또 그 스님께 뭘 여쭤봤느냐 하면 “스님께선 항상 성품의 작용, 보림을 잘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그때가 더 어려우니라. 바닷물을 다 삼켰으면 토할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토할 줄을 알았다면 바다의 파도 이는 것이 너의 성품의 작용임을 알아야 그것이 진짜 보배이면서 진짜 보림에 드는 길이니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양식이 됐고, 내가 경을 읽지 않았어도 그 스님이 그 말씀 한마디 해 주시는 거기에 경에 있는 그 일체 만법의 뜻이 다 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한 번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내가 말씀드리기를 “사람은 이 공부 할 때, 우리는 지금 성품의 작용을 하는 것이 몸 없는 몸으로서, 바로 손 없는 손으로, 발 없는 발로, 눈 없는 눈으로, 귀 없는 귀로 작용을 역력하고 활달하고 소소영영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께서 “그 파도가 이는 것도 내 성품의 작용인 줄 알아라.” 하는 것도 우리의 살림살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착을 두거나, 고정되게 이 생활을 착을 두고 하거나 이런다면 안 되겠으니 여러분한테 첫번에 모든 걸, 즉 말하자면 자기 근본처에 모든 것을 놔라. 근본처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는 그것이 몸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죠. 그러나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혀도 있고, 몸도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만 가지 천 가지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용하는 것도 일체 처에서 나오기 때문에 일체 처에 다 놔라 이겁니다. 이게 승가에서 말씀하시는 보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기 생각에 스님네들이 잘 모른다고 해서 깔보지 마십시오. 스님네들은 스님네들대로 첫번에, 일차적으로 벌써 물질적인 문제를 다 놨습니다. 입산할 때 버렸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우린 깔볼 수가 없는 겁니다. 색욕이라든가 성욕이라든가 또는 그 모두를 다 떠나서 입산했을 때는 벌써 일 단계를 넘어선 겁니다.
스님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입산을 했겠습니까.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에 너무도 모르니까 허무하고 보잘것없고 하나 건질 것 없고, 하나 가질 것 없고, 하나 쓰잘데없고, 모든 게 변질돼 가고, 모든 게 망가지고, 모든 게 그렇게 하니 인생이 살기가 너무 허망해서 모든 걸, 물질적인 문제나 모든 작용을 다 버리고 떠났을 때는 벌써 한 단계는 넘어선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가 어리든, 모르든 스님은 스님네들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거를 곰곰이 생각을 해 보셔도 여러분은 머리가 숙여질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돌고 울었던가. 얼마나 돌고 웃었던가. 내가 한발짝 한발짝 떼어놓는 것도 없는 것을….
그래서 제일 어려운 것이 이렇게 말을 마음으로 전달하려니, 이렇게 하다 보니 여러분이 좀 안다 하는 생각이 들어가면 하, 내가 나라고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럴 때 길잡이 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 애들이 자라서 사춘기 때 어렵다 하죠? 그때나 똑같습니다.
이게 왜냐하면, 어저께는 구할 놈이라도 있어서 구했는데 오늘은 구할 놈이 없을 때 그 보림하기가 더 어렵다 이겁니다. 안으로 굴려서 보림을 해야지 만약에 봤다, 알았다 이래 가지고 바깥으로 누설을 한다면 그것은 헛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한 십몇 세 가면 사춘기가 돌아온다고 하죠. 그때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그것 붙잡아 올바로 저 길 없는 길로 인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는 얘깁니다. 그때 참스승이 있어서 가끔씩 튕겨 줘야 하니까 그때 주장자가 참 필요하죠.
그때 주장자 필요한 것이지 우리가 모든 것을 몰락 다 놓을 때는 구할 놈이 있기 때문에,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그 지팡이로 하여금 다 하게 할 수 있는데 정작 내 마음을 알아 가지고는 구할 놈도 없어서 참 어려운 겁니다. 그때 은사가 정말로 필요한 겁니다. 은사는 무슨 정해 놓은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길잡이가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물 깊이를 알고 들어갔다 나온 놈이라야 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거지 물 깊이도 모르고 들어가 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어떻게 끌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장님이 장님을 끌고 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십중팔구죠. 그러니 그 모든 길을 앞서가 본 사람의 튕겨 줌이 꼭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
일이 되도록 관하는 것이 기복 아닌지
스님께서는 항상 관하는 것과 비는 것은 다르다고 하셨는데, 저는 관할 때마다 ‘주인공, 너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잖아.’ 이렇게 하면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이렇게 관하는 것이 비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답
근데 그렇게 말로만 그렇게 관한다 하지 마시구요, 이 마음이 진짜 저 나무들이 자기 뿌리를 의지하고 살듯이 해야만 합니다. 그런다면 친근한 맛이 있죠. 비가 오거나 이런다면 아이, 주인공 뿌리가 이게 비에 패이지나 않나. 또는 친근한 마음으로, 즉 말하자면 방황하고 못 믿는 게 아니라 싹이 뿌리를 의지하고 진짜로 죽든 살든 뿌리를 믿는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죽으나 사나 안되든 되든 뿌리만이 길을 인도하고 지켜 주고 해결사가 돼 주고,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돼 주고, 또 아프면 의사가 돼 주고 이러는 거지요.
그러니까 진짜로 믿어야 돼요. 그냥 입으로만 ‘주인공 너만이 할 수 있어.’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도 좋은 거지만 말로만 해서는 그게 통신이 되질 않아요. 벌써 관하면 진짜로 의지하고 이렇게 진짜로, 내일 밥을 굶는다 하더라도 진짜 편안하게 여길 믿고 ‘굶기는 것도 너고 먹이는 것도 너다.’ 하고 진짜로 믿는다면 다 먹이게끔 돼 있어요.
그리고 또 이렇게 할 때 진짜로 믿는다면 바로 즉시 통신이 돼요, 대뇌로. 인간의 구조가 그렇게 돼 있거든요. 대뇌로 통신이 돼서 사대로 통신이 되면 바로 사대로 통신이 돼서 정수에 입력이 돼 버려요. 입력이 되면 입력된 대로 현실로 나오게 돼 있어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과거의 건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오게 돼요. 그리고 입력을 하면 또 앞서의 게 없어지면서 또 새 입력이 들어가서 또 현실로 나오고, 그렇게 미묘한 법이에요.
우리가 지금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고, 우린 지금 이 몸이 한 철입니다. 한 철이고 한 찰나입니다. 가을이 되어서 낙엽이 떨어진다 해서 나무 뿌리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도리를 모른다면 그 바로 낙엽 떨어진 것이 자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고 허망하고 그렇겠죠. 그러나 그게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봄이 오면 새 잎을 피우기 위한, 또 새 열매가 열려서 제 나무에서 실과가 무르익어서 맛을 보게 하는 그런 과정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몸만 가지고서 한 철 나기에 물질적으로 급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마음으로 모든 걸 놓으면서 안으로 자기의 무변한 그 도리를 알고, 거기에 일체제불이 직결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아신다면 아마 너무나 즐거워하실 겁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거예요.
주인공 죽는 법 못 보셨죠? 영화에서요.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부처님이 끌고다니는 여러분 몸뚱이를, 달구지를 고쳐서 끌고 가면 끌고 갔지 절대 중도에다 그냥 팽개쳐 버리고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는 날까지 이렇게 하다가 아프지 않고 내가 이만하면 이제 됐다 했을 때, 옷 좀 새로 갈아 입어야겠다 했을 때, 그 때 옷을 벗으면 얼마나 좋아요.
만약에 그 도리를 모른다면…, 콩이 말입니다, 익지 않은 콩은 아무리 까려고 해도 속껍데기가 붙습니다. 얼마나 아픕니까, 그것을 까려면. 그러니까 3년씩 2년씩 이렇게 앓죠. 그게 속껍데기가 바짝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벗기기가 어렵죠. 그 벗기는데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와 같이 만약에 콩이 잘 익었다면 건드리기만 해도 그냥 콩깍지가 탁 벗겨질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 자체가 자기인 줄 알고 모두 그저 겸손하고 평등하고 또는 부드럽게 말해 주지 못하고 그 태도와 행이 불순해서 항상 치유하기가 어렵고 또는 커버하기 어렵고 한마음 되기가 어렵고 그런 겁니다. 우리가 벼이삭 익듯이 자기를 모두 버린다면, 자기 하나를 다 놓는다면, 생명도 두렵지 않게 놓는다면 뭣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이 한 생을 살아나가는 데 한 철 왔다가 한 철 가는 겁니다. 모습은 한 철이요 마음은 영원한 겁니다. 마음의 차원은 영원한 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도리를 벗어나서 알고 본다면 살고 죽는 것도 없고 그대로 영원하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