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김선일 씨의 참수를 보고 국민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테러리스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한국군의 파병을 막기 위해 무고한 한 젊은이를 희생시킨 테러리스트의 잔인한 행위에 분노하였다. 그런데 김 씨를 살해한 ‘일신과 성전’ 단체의 아랍어 홈페지이엔 김 씨가 이라크에서 개신교를 전파하려고 해서 살해했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국제 정치적인 이유보다도 종교적인 측면이 더 우선시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가 개신교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신학을 전공한 자로서 이슬람 세계에서 개신교 선교 활동을 하려는 후보자였기 때문에 죽였다고 한다. 이 종교 단체는 김 씨를 ‘카피르(이교도)’로 규정하고 신의 존재와 의미를 부정하는 자이므로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은 카피르를 죽일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김 씨의 죽음은 종교간의 충돌에서 야기된 것이다.
영국의 BBC방송은 한국 개신교인의 중동 지역 선교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지난 5월 지적했다고 한다. 더구나 한달 전인 4월엔 한국인 목사 등 9명이 납치되어 풀려난 일도 있다. 지금 중동엔 선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있는 한국의 개신교 단체 및 선교사가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중동의 이슬람교도는 개신교의 선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개신교와 이슬람교의 두 절대신은 서로 다른 존재로 각기 신봉된다. 개신교도는 여호와를 최고의 신으로, 이슬람교도는 알라를 최고신으로 찬양한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불교는 이런 종류의 신들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평화적이다.
불교의 이런 태도는 붓다의 가르침에 기인한다. 붓다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집착해선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리타경>에서 뗏목의 비유를 설하여 법조차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이 매우 깊고 지극히 넓으며, 물살은 빠르고 긴데, 거기에는 배도 없고 또한 다리도 없다. 어떤 사람이 와서 저 쪽 언덕에 볼 일이 있어서 그 곳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는 건너려 하다가 곧 생각하였다. ‘이 물은 매우 깊고, 물살은 빨라 헤엄쳐 건너갈 수 없다. 건너갈 수 있는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그러니 나는 저쪽 언덕에 일이 있어 꼭 건너가야 한다. 어떤 방편을 써야 내가 저쪽 언덕까지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이쪽 언덕에서 풀과 나무를 끌어 모아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 그것을 타고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야 하겠다.’ 그는 곧 이쪽 언덕에서 풀과 나무를 끌어 모아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 그것을 타고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이익이 많았다. 나는 이 뗏목을 타고서야 안전하게 저쪽 언덕에서 이쪽 언덕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것을 오른쪽 어깨에 메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가리라.’ 그래서 그는 곧 이 뗏목을 오른쪽 어깨에 메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간다면, 과연 그 뗏목에게 어떤 이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그 뗏목을 위해 유익한 일이 되겠는가? 그 사람이 이 뗏목에 대해 감사하지만 이 뗏목을 도로 물에 두거나 혹은 언덕 가에 버리고 가는 것이 그 뗏목을 위해 유익한 일이 되지 않겠느냐? 만일 너희들이 내가 설한 뗏목의 비유에 대해 잘 안다면 너희들은 마땅히 이 법도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뗏목은 강을 건너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므로 강을 건너고 나면 다음 사람을 위해서 강변에 놓아두면 된다. 그런데 그 뗏목을 계속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붓다의 가르침도 뗏목과 같아 고통의 강을 건너고 나면 더 이상 힘들게 짊어지고 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유익하고 고마운 법일지라도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불법을 알리는 것은 불법 자체의 우수성을 알리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불법 포교라는 것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도선언에서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사찰이나 신도의 숫자를 불리기 위해, 조직을 더 키우기 위한 포교는 바람직하지 않고 오로지 중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전도 방식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의 선교 열정에 대해선 부럽다. 우리 불교인은 불법을 알리는데 너무 소극적이어서 절에 스스로 찾아 들어오는 사람도 그냥 방치해 두고 있는 실정이다. 위험한 사지에 가서 무리하게 포교를 할 필요는 없지만 절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불법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 ■동국대(경주) 불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