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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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기계’를 보며…-이우상(소설가·대진대 문창과 겸임교수)
“당신보다 힘들었지만 난 살인을 하지 않았다.” 11개월 동안 20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그를 향해 평범한 사람들이 던지는 분노의 항변이다. 어려운 환경이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가 결코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불행하다고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또한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고 범죄를 안 저지르지도 않는다.
엽기란 말을 함부로 써댄 업보인가. 잔혹의 사육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김대두, 지존파, 막가파 다음에 그가 놓인다. 미술과 문학에 재능을 가졌던 섬세한 소년이 희대의 살인 기계가 되었다. 그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 정식적 삶을 위해 노력한다. 세상은 부조리한 아수라장이기도 하지만 인내와 노력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낙오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내심에 져서 망가진 것이다.
혼돈의 시대이다. 가치와 질서의 올곧은 가닥이 없다. 현실과 게임을 동일시한다. 충동과 자극은 기하급수적으로 단위를 높여간다. ‘양들의 침묵’에서 시작된 불특정 대상을 살해하는 영화는 숨가쁘게 자극의 강도를 높여간다. 맹목적 증오, 맹목적 살인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한 인간이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왜곡된 증오심이 연쇄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공격 행위로 표출된 것’”이라는 학자의 정의가 감동적이기보다는 허탈하다. 무엇을 잃었기에 극단의 증오가 범람하는가.
흘러간 옛 노래처럼 맥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행복의 최소 단위를 다시 점검하고 수리해야 한다. 증오와 파괴의 수렁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구출할 수 있는 것은 가정이다. 모든 문제아, 범죄자의 뒤에는 불우한 가정 환경이 있다. 물론 그것이 일탈 행위의 면제부가 될 수 없다.
처참한 살인의 광란을 보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상기한다. 이혼은 필수, 재혼은 선택이라는 무책임한 농담은 철회되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면책 특권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아내도,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도 어느 한 부분은 미덕이 있다. 아무리 못난 자식도 부모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지 않은가.
두 달 전 미국인 무량스님과 며칠 간 동행한 적이 있다. 이혼과 가족 해체가 수저 바꾸듯이 쉽고 자유로운 곳이 미국이 아니냐고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나를 심히 부끄럽게 했다. 그것은 잘못 알려진 미국의 모습이다. 이혼율 50% 정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심지어 권장할 만한 일인 것처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손 가정의 미국 청소년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아는가. 마약과 범죄가 일상 깊숙이 침투한 것은 부모의 불화와 가정의 붕괴에 기인한 것이다. 스님의 출가도 가정사와 무관하지 않다. 청소년 시절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용감무쌍하게 1년만에 재혼 그후 삼혼을 했다. 스님은 세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출가수행으로 승화시켰다.
소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한다. 익명과 단절이라는 시대의 어두운 초상을 탄식한다고 범죄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사회의 인프라가 가정이다. 가정이라고 해서 저절로 건강성과 행복이 보장되는가. 참고 견디고 이해하고 때로는 서로 가위질을 하며 가꾸어 나가야하는 나무이다. 건강한 나무가 많아지면 건강한 숲이 된다. 수행 공간이 천하절경의 명당에만 있는가. 번잡한 저자 거리 역시 수행터이다. 얼굴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비명에 간 넋들에게 명복을 빈다.
200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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