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의미한 것에 대해 참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심심하고 따분한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된 이상 사람은 의미를 찾아 헤매게 되며, 이로 인해 수많은 구도자가 등장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표현이란 형태로서 많은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과연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지구상에 태어난 수많은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하여 사라져 간다. 출생의 숫자만큼 죽음의 숫자가 기록되는 것이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이것을 생존본능이라 부른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이러한 인간의 지적 욕구는 생존 본능과 연결돼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늘리고자 하는 애처로운 몸짓마저 하게 만든다. 생명체라는 개체를 조금이나마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현대의 생명과학도 역시 이러한 애처로운 몸짓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리 생명과학의 발달로 각 개체의 형상을 유지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난다 해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주위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자그마한 곤충과 우리 인간들과 결국은 서로 다를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동일한 죽음 앞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구도자가 해왔던 것처럼 굳이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행위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미를 묻는 행위는 마치 지금 비 오는 바닷가에서 내리는 빗줄기와 바람을 향해 몸의 방향을 바꿔가며 웅크리고 떨고 있는 갈매기에게 너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 갈매기는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 갈 것이고, 또 다른 갈매기가 태어나 그 자리를 대신 할 뿐.
자신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끝은 그 출발점이 된 의미를 내려놓음으로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 마무리 된다. 다시 말하면 마치 갈매기가 태어나 열심히 살다가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죽어 가듯이 사람도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게 될 때 스스로 부여해서 그토록 자신을 얽매고 가두고 있던 의미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무의미한 것은 참으로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것이다. 심심한 것이야 말로 참으로 충만한 것이다. 끝임 없이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헐떡임으로부터 놓여나 생명의 다양함으로 가득 찬 이 화엄의 세상에서 그동안 하찮게 생각하던 미물과 더불어 내가 이대로 평등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빛내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인간만의 특별한 의미 부여는 전혀 필요 없음을 알게 된다. 부처님의 열반이 적멸(寂滅)을 뜻하듯, 그래서 불제자라면 우리 시대의 생명과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바빠지고 있음을 알아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하신 서암스님의 담담한 말씀을 새겨야 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