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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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설호 스님
충남 유구 동해사(東海寺)에 도착했을 때 설호(72·사진) 스님은 낡은 앉은뱅이 미싱을 돌리고 계셨다. 평생 남이 지어놓은 옷을 사서 입는 법 없었다는 스님은 자투리 조각천을 이어 여름옷을 만들고 있었다.
“평생을 일만 허구 살었어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늙은이를 취재 혀서 뭣헌다구…”라며 손사래를 치던 스님은 “점심에 보리밥 해놓았으니 먹고 가라”고 하셨다. 70평생을 엄격한 수행납자로 살아온 비구니 ‘육화문중’의 최고 어른스님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너무나 소박하고 인자한 모습이었다.
스님은 1954년 갑오년에 개심사로 출가해 이듬해 동학사 비구니 강원으로 갔다. 전쟁이 끝나고 종단이 정화로 어수선하던 시절이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 공부보다 울력이나 탁발하러 다니는 일이 더 많았다. 교재가 없어 누가 버리고 간 <초발심자경문>을 얻었는데, 앞장이 다 뜯겨 나가 ‘귀 6’부터 읽었다. 자경문을 다보고 <치문>을 배우는데 치문교재가 없어 밤이면 어른스님들 몰래 등잔을 켜놓고 남의 것을 베껴 읽었다.
따로 수행처 정하지 않고 자신이 있는 모든 곳이 수행처라는 생각으로 각지의 선방을 찾아다니며 수행에만 뜻을 두고 살았던 스님이 상좌인 주지 석문 스님과 함께 동해사를 창건한 것은 지난 1989년이다. 유구읍 동해리의 원래 지명은 와룡동(臥龍洞). 무학 대사가 이곳을 지나다 용이 누워있으면 승천을 못한다하여 용이 물에서 살수 있도록 동네 이름을 동해(東海)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원래 불사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다만 50평, 30평 등 조각 조각 널려있던 땅을 하나 둘 사들인 것이 지금은 4000평이 넘는 넉넉한 절터가 됐다. 대웅전 불사는 96년부터 시작했는데 덕분에 절이 훤해졌다며 좋아 하셨다.
절 어디에도 스님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매일 쓸고 닦으신다. 절 입구에 만발한 자귀나무 꽃길을 직접 만든 스님은 매년 도량 안팎에 온갖 나무를 심으셨다.
“풀 뽑는 행위 하나도 마음을 다스리고 경계를 끊는 일”이라는 스님은 말없이 실천으로 수행의 본을 보여주신다.
스님은 매년 방학 때마다 한문학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팔이 빠져라 글씨를 써가며 아이들을 정성으로 가르쳤던 덕분인지 스님에게 한자를 배운 아이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 학자가 됐다. 지금은 가르치려 해도 가르칠 아이들 없다.
스님은 요즘 여자아이 3명을 절에 데려다 키운다. 중학생 1명과 초등학생 2명이 스님의 품으로 왔다. 초등학교 5학년 경림이는 학교에서 늘 1등만 한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경림이는 한문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도 어려워하는 한자 2급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렇게 스님이 키워 세상에 내보내 제몫을 하게 한 아이들이 적지 않다.
동해사 주지 석문 스님은 “은사스님은 평소에도 누구를 나무라거나 큰소리로 꾸짖는 법이 없지만 수행에 게으른 상좌들이나 젊은 스님들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어른”이라고 말했다.
조용수 기자
200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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