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소통에 초점 맞춘 시각적인 글
<대승기신론>의 한역(漢譯) 둘과 영역 둘
대장경 가운데 중요한 경전들은 두 번 이상 번역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대승기신론>이 그렇습니다. 6세기의 진제(眞諦) 스님이 해 놓은 것과 8세기 실차난타가 해 놓은 것, 두 개가 있는데요, 7세기에 살았던 원효 스님은 당연히 첫 번째 진제의 역본을 두고 여러 번 주석을 가했습니다. 지금은 소와 별기만 남아 있습니다.
영역은 나중 실차난타의 것이 먼저 되었습니다. 스즈키 다이세쯔가 실차난타의 번역을 토대로 1900년에 처음 이 경전을 영역한 이후, 여러명이 영역에 손을 댔습니다. 지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하케다 요시토가 1967년대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출판한 것인데요, 대본부터 진제의 것을 택하는 등, 스즈키의 작업과 차별화하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습니다. 스타일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즈키가 <대승기신론>의 취지에 초점을 둔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하는데 비해, 하케다는 경전의 ‘문자’에 보다 충실해 어색한 표현이나 불분명한 대목을 그냥 감수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저는 스즈키의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한역은 둘 다를 좋아하는데요, 두 판본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에 투덜거리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거기에 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차와 어긋남이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여 <대승기신론>을 더 분명하고 풍부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선택한 구마라습의 <금강경>
이야기가 곁으로 흘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으려는 <금강경>은 두 번도 아니고, 무려 여섯 번이나 다시, 거듭 번역되었습니다. 이 횟수가 이 경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관 반야의 대가인 에드워드 콘즈는 이렇게 찬탄하고 있습니다.
“반야 바라밀다 문헌은,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600년 사이에 걸쳐 인도에서 이루어진, 38개의 서로 다른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국 일본 티벳 몽고의 불교도들은 30세대에 걸친 판단으로 이 가운데서 둘을 골라냈습니다. 성스러운 중에도 가장 성스러운 둘,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둘 다 아마 기원후 4세기쯤에 성립된 듯합니다. 처음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바즈라 체디카 프라즈나 파라미타Vajra cchedika Prajnaparamita>, 즉 ‘벼락처럼 짜르는 지혜의 완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중 것은 지혜의 완성의 심장, 핵심, 정수를 정식화하려는 시도로, 티벳의 라마사원 일본의 선방에까지 힘써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수지 독송하는 판본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맨 처음에 번역한 것, 즉 A.D. 402년에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번역은 나중 것이 처음의 실수도 고치고, 표현도 가다듬고 해서 처음보다 훨씬 좋아지고, 이렇게 좋아진 업그레이드판을 대중들이 선호하는 법인데, <금강경>의 경우는 오히려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저는 다섯 번째 번역에 해당하는, 7세기 중엽 삼장법사 현장의 번역본을 대강 훑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이 영 딱딱하고 전문적이었습니다. 정확한 불교를 알기 위해 인도까지 목숨을 건 여행을 다녀온 사람답게, 현장의 <금강경> 번역은 어디까지나 원문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읽기 힘든 번역을 만들었고, 결국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 다른 외국어, 가령 영어문장을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정확성에 초점을 맞추면 의미의 왜곡은 최소화하겠지만, 읽기에는 아무래도 거칠고 불편한 글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럴 땐 참고 읽기도 하지만, 아차 책을 잘못 샀다 싶어 후회하게도 됩니다.
구마라습의 번역은 이방인인 중국의 독자를 우선 배려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정확성보다는 이해와 소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구마라습은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어를 한문으로 옮기는 것, 그것은 흡사 엄마가 갓난애를 위해 밥을 씹어 먹여 주는 일과 같다.” 아무리 음식이 기름져도 그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면 음식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금강경>을 중국인들에게 ‘소화’시켜 주기 위해서는 맛과 풍미, 즉 경전의 정확성을 어느 정도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배려,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 그의 번역을 1500년 너머, 후발 다섯 명의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만세의 표준 번역으로 우뚝 서게 했습니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이 구마라습의 번역 정신을 깊이 벤치마킹하고,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의 五家解 가운데 단연 빛나는 육조 혜능의 구결
그래도 <금강경>은 읽기 힘듭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옛적 대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을 씹어 대중들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혜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이미 800가에 이르는 해석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의 주석까지 합하면 한우충동(汗牛充棟), 그 볼륨이 작은 도서관을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개장(開張) 다음에는 최략(撮略)이라, 그렇게 주석이 많아지면 또 골라내는 손이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가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 다섯을 골랐습니다. 필자들은 쌍림 부대사, 육조 혜능, 규봉 종밀, 야부도천, 예장 종경으로, 각기 일세를 풍미한 선장(禪匠)들입니다. 조선조의 건립 초기 함허득통이라는 스님이 이 선집의 틀린 글자를 바로잡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지금 <금강경>의 유통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금강경오가해>입니다.
다들 생각이 다르시겠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도 단연 육조 혜능의 구결(口訣)을 꼽습니다. 스님의 <금강경 구결>은 불교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용어들을 배제하고, <금강경>의 취지를 우리네 ‘마음’의 실제와 구체적으로 연관된 지평 위에서 깨우쳐 주고 있는 과시 걸작입니다.
이어질 제 강의는 <금강경>을 두고, 불교 안과 밖에서 제가 들은 이야기들, 때로는 모르는 이야기까지 흩어 놓겠지만, 주석이 필요할 때는 육조 혜능 스님의 친절에 기대겠다는 말씀을 미리 드려둡니다. 한 사람을 더 꼽으라면 <금강경>의 취지를 격외의 시(詩)로 부수어 나간 야부도천을 꼽겠습니다. 제 이야기가 늘어지고 지루하여 조는 분들이 많다 싶을 때, 가끔 그의 시를 불각시의 얼음조각처럼 등 뒤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금강경오가해>는 경서원에서 10년 전에 영인한 목판본입니다. 이 책을 발견하고는, 누가 집어갈세라, 얼른 두 권을 샀습니다. 한 권에는 내키는 대로 밑줄과 노트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한 권은 고이 모셔 두었습니다. 아, 이 책을 꼭 구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유용하기는 오히려 한글 번역이 붙은 <금강경오가해>일 것이니, 하나쯤, 가령 무비 스님의 <금강경오가해>를 구해 곁에 두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