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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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쥐고 있지 말고 찰나찰나 놓고 가라
못났든 잘났든 자기 마음의 주인이 제일

틀을 깨고 삶을 바꾸려면…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혜안으로 보실 때에 중생 나름대로의 정해진 길이 다 보이고, 그래서 아마 부처님께서도 개개인의 문제를 대신 해 주지 못하는 데 대해 답답한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바꾸고 중생 개개인의 굴레라고 할까, 틀을 타파하여 참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요?

나는 누가 이렇게 이렇게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불쌍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걱정할 게 없지 않느냐. 너도 불쌍한 대로 그대로 있는 게 아니니까 불쌍하지 않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불쌍하다 하면 불쌍하지 않은 게 닥쳐오고 불쌍하지 않다 하면 불쌍한 게 닥쳐오니 그거를 어떻게 말을 해야 옳으냐 이겁니다. 그럼 불쌍하다 불쌍하지 않다를 다 놔라. 믿고 놔라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그 미래와 이 현재를 닦아 나가느냐 하면 그 양면을 다 놓아라 이럽니다. 믿고 놓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믿으니까 그대로 자동적으로 돌아갈 게다.’ 이럽니다. 이거는 천차만별 아닙니까. 어느 결에 그냥 부지불식간에 닥쳐오는 것도 있고, 병이 들 때가 있고, 그냥 재산이 몰락하는 수가 있고. 그런 모든 게 닥쳐오는 것이 미리 예고가 온다 이거예요. 우리가 생각에 의해서 다 그게 오는 거니까요.
그럴 때에 꿈이라든가 뭔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하는 거를 다 믿고 놓아 버린 상태에서 생각의 생산을 해라 이거예요. 좋은 방향으로 나가라 이거예요. 어떠한 생각이 들든지 거기 놓아 버리고선 좋은 생산의 마음을 키우세요. 언짢다 그러면 좋은 게 닥칠 거고 좋다 하면 언짢은 게 닥칠 테니 이걸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그러면 이 양면을 다 놔라, 믿어라 이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체 없는 그릇에다가 놓을 것도 없지마는 거기다 마음을, 없는 마음을, 그 다가오는 마음을 거기다 놓을 때에 양면을 다 놓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다 놓게 된 상태에서 나는 좋게 생각을 해라 이겁니다, 좋게. 아주 죽을 꿈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또는 좋은 꿈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대로 좋고 그대로 밝아 있으니 좋다.’ 이렇게 생각하라 이거죠. 그러면 이 양면이 다 들어가서 그냥 거름이 돼 버리고 그냥 우쭐우쭐 자라게 되어 있다 이거예요. 그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구덩이에서 나오느냐 들어가느냐 여기에 휘말리게 되는 거죠. 양면을 다 놓고 내 마음 씀씀이를 잘 생각을 한다면, 산만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닥쳐오는 대로, 내 앞에 닥쳐오는 대로 그냥 좋게 생각을 하라 이거예요. 양면을 믿고 거기다 놓고 그냥 생각을 좋게 하라 이거예요. 그러면 빨리 다가오는 것도 있고 조금 더딘 것도 있고 아주 더딘 것도 있지마는 언젠가는 그것이 돌아가면서 돌아오게 돼 있으니까요.
그러니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미래로부터 이렇게 돌고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그 양면을 다 놓는다면, 과거 미래 이것을 다 놓는다면 우리는 생산처에서 자유권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 마음먹는 게 자기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미래를 귀신을 만드느냐 부처를 만드느냐, 이것도 바로 거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꼬집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만 미래를 그 사람들한테 줄 수 있느냐. 자기가 해 봐야 맛을 알지 해 보지 않고 어떻게 맛을 아느냐 이럴 때, 믿고 양면을 놓고 그렇게 한다면 그게 타파가 될 것이고, 그게 타파가 된다면 삼세심 내공이 타파가 된다 이거예요. 그냥 왕래하게 된다 이거예요. 그럼으로써 그걸 알게 되거든요, 다. 아주 손살피 나오거든요. 근데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르는 사람 앞에 이걸 말로다가 하려니 안되고 그래서 우선적으로는 이거 공부할 때는 내공에 세우지 않고는 안되니까, 내공이라고 하는 거는 나의 모든 돌아가는 그 근본을 쥐고서 거기다가 믿고, 내가 과거에 살던 것이 지금 현재에 나오는 거, 습이 나오는 거, 또는 미래로 갈 거, 또 꿈을 꾼다든가 이러한 거를 다 거기다 믿고 놓아라 이겁니다. 거기서 돌아가는 거니까. 거기다 생각을 잘해라. 꿈도 해몽을 잘하면 잘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생산이다 이거예요.
‘에이, 저거는 천상 봐도 그 꼴이 그 꼴이야.’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 꼴이 그 꼴이죠. 또 자식들한테도 그렇고, 지금 사는 사람 전부 그래요. 남편한테도 그렇고 아내한테도 그렇고 또 조상한테도 그렇고 전부, 벌레한테도 그렇고 모든 걸, 물질을 보면 보는 대로 이 생각에 따라서 그냥 생각을 해 버리거든요. 근데 물질을 백 가지를 봤더라도 다 그냥 거기에 놓아 버린 뒤에 그 자기가 내면의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거예요.
바로 자기한테 부(父)가 있고, 자기한테 스승이 있고, 자기한테 부처가 있고, 자기한테 법신이 있는 것을, 그것을 모르고 콩싹이 콩씨를 저 바깥에서 찾듯이 그렇게 찾는다면 그거는 천 년이 가도 안되고 백 년이 가도 안된다는 것을 꼭 아시기 바랍니다.

어디에다 어떻게 놓아야 하나요?

늘 수행 과정에서 방하착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합니다. 어디에다 어떻게 놓고 생활해야 곧 참선이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하착을 ‘방하착이다’ 하면 방하착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데 모두가 참선 아닌 게 없죠. 그러니까 본래 진리라는 것이 고정된 게 없이 돌아가니까 그대로 거기다 놓고 가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딱 쥐고 있지 말고 하루살이로 그냥 찰나찰나, 놓고 가란 말 안 해도 지금 놓고 가는 겁니다. 모두들 놓고 가면서도 그 마음으로 당겨서 잡고 있기 때문에 지금 스스로 자꾸 걸리죠. 그러니까 그렇게 본래 놓고 가는 건데 마음으로 놓고 가질 않으니까 ‘그것 좀 놔라, 놔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또 이차적으로 “야! 네 뿌리에다 놔라. 네 뿌리만이 너를, 네 나무를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으니까 네 뿌리에 믿고 놔라, 놔라.” 영 안 놓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아, 내 뿌리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내 뿌리만이 나를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믿고 무조건 ‘너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어.’ 하고 놔라 이겁니다. 그것이 방편 중에 제일 첫번 관문입니다. 제일 지금 필요로 하는 게 그겁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마음 먹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하지마는 난 그렇게 어렵다고 보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이름에 끄달리거나 남의 몸뚱이에 끄달리거나 허공에 끄달리거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거든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 마음의 주인이 제일인 것입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모든 일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겠걸랑 하루하루 해 나가면서 누가 하는가 지켜보라 이겁니다. 그러면 알 바가 있을 테니까요. 누가 똥을 싸고 있고 누가 자고 있고, 누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고 누가 생각하고 있고, 누가 생각을 잘못해서 구덩이에 빠져서 울게 되고 그러는가 한번 잘 지켜보라 이겁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하나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알고 본다면 모두가 바로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을 때 비로소 생각을 좋게 낼 수밖에는 없는 거예요. 자비하게 낼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 그 마음을 자비하게 내니까 좋게만 생산이 되고 두루 하게 되니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요, 자유인이요, 바로 그게 멋진 사람이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안으로는 움죽거리지 않으면서 바깥으로는 천차만별로 움직이면서 그 자비심이 그냥 통틀어 돌아가니 그게 생산이라 누구도 건져지지 않는 게 없게 되는 겁니다.

색즉시공과 산은 산 물은 물

진리는 모두 하나로 통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신 것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시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이랬기 때문에 ‘공도 색도 둘이 아닌 까닭에 공은 공대로 있고 색은 색대로 있느니라.’ 하는 걸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한다면 이치가 납득이 되기가 힘듭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해야 되겠죠? 모습은 다 다를지언정 뿌리는 한 뿌리이다. 뿌리는 한 뿌리고 생명은 한 생명이기 때문에 바로 모습은 다 다르다. 각계각층이 말입니다. 먹는 것도 각계각층이 천차만별로 다 자기 먹는 게 따로 있듯이, 곤충이 먹는 게 따로 있고 사람이 먹는 게 따로 있고 짐승이 먹는 게 따로 있듯이, 모두가 천차만별로 먹고 사는 그 도리를 전체 바다로 비유를 해서 부처님께서는 ‘바다를 삼키고 토해서 만 중생들한테 각계각층에 먹을 거를 알맞도록 내려 자비를 베푸신다.’ 이런 말이 있죠.
그러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모두가, 우주 전체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대천세계를 아주 작게 정맥 동맥으로 비유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정신세계 물질세계를 한데 합쳐서 정맥 동맥이라고 한다면, 정맥이 없어서도 안 되고 동맥이 없어서도 안 되죠. 정맥 동맥이 둘이 아닌 까닭에 정맥은 정맥대로 있고 동맥은 동맥대로 있다 이런 거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죠? 그렇게 비유를 하면 여러분이 잘 납득이 되실 것 같아서 전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정맥 동맥으로 하나로 묶어서 얘기해 드린 것입니다. 정맥 동맥 양면이 돌아가지 않으면 몸 전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맥과 동맥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름해서 정맥이라는 이름이 있고 동맥이라는 이름이 있느니라, 이런 거죠.
그러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데’도 소용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그 가운데서 우리가 자유롭게 응용하고 살아라 이거지 산이 어떻고 물이 어떻고 이것 따지게 됐습니까, 지금? 우리가 목마르면 그냥 먹고 또 나무가 필요하면 나무를 가지고 꽃이 필요하면 꽃을 보고 이렇게 자꾸 돌아가는 거지, 산이 고정되게 있는 것도 아니고 물도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 몸체가 바로 물은 물이고 산은 산입니다. 우리도 지수화풍이니까요.

육신의 옷을 벗었을 때…

우리가 한 철 나왔다가 육신의 옷을 벗었을 때 신령한 의식만 남는다고 했는데 그 의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꽃씨가 떨어져서 또 꽃이 피고 그러듯이, 연어가 자기 몸뚱이를 형성시켜 놓고 죽듯이, 우리가 자기 껍데기 헌 옷을 벗으면 새 옷을 입고 다시 형성이 돼서 나옵니다. 그렇게 한 찰나에 돌아갑니다. 우리가 알고 보면 생사가 둘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육신의 옷을 벗게 하는 것도 주인이요 벗지 않게 하는 것도 주인입니다. 이 세상에 나온 것도 주인이요 이 옷을 벗는 것도 주인이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입은 것도 없고 벗은 것도 없습니다. 본래 밝아요, 그냥. 그렇게 믿는다면 바로 그것이 진짜 자기 자부처를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보살인 것입니다. 바로 부처인 것이죠.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그래서 차원이 높으면 높은 대로 끼리끼리 모이고, 차원이 낮으면 낮은 대로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래서 소천세계 중천세계 대천세계가 있다 합니다. 그것도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세계지 그 세계가 그대로 그렇게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네 마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한 철에 차원이 높아져서 이 한 발을 벗어 놨다면 세세생생에 끄달리지 않을 겁니다. 생사에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요, 자유스럽게 껄껄 웃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죠. 부처님께서도 자유인이시죠, 부처님이라는 이름은 모두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라고 했고, 둘이 아닌 까닭에 여여하게, 정맥 동맥이 막 같이 돌아가니까 즉 여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어느 분 한 분을 가지고 부처라고 했던 게 아니고 여래라고 했던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기를 진짜로 부처로 만드실 수 있어야 합니다.

불법을 배워야 할 당위성

왜 우리들은 불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서 여쭈고 싶고, 그 다음에, 중생이 세상을 살다보면 생노병사를 비롯해서 슬프고 괴롭고 어지럽고 하는 많은 일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을 증득해야만이 그런 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 마음공부를 해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증득을 하게 되면 어떠한 세계가 열려지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지요?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 것은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는 도저히 나한테서 벗어날 수가 없고 너와 나한테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렇게 된다면 사생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끄달리게 되면 영원히 고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도리는 알아야 되겠다 이러는데, 왜 여기서는 몰락 놓으라고 하느냐.
만약에 어떠한 것을 체계적으로 규명을 지어서 이것을 가르친다면, 이 선법이라는 것을 규명을 짓고 틀이 딱 짜여져서 가르친다면 이 전체 일체 사생하고도 화합이 되질 않아요. 그리고 같은 자리에 할 수가 없고 같이 말을 할 수가 없고, 같이 들을 수가 없고 같이 볼 수가 없고, 이런 까닭에 나는 그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러한 까닭에 내가 이 도리를 공부를 안 하면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죠.
지금 무(無)의 세상이나 무의 법, 무의 활용, 유(有)의 활용, 유의 법에서 모든 진리의 규합된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고(苦)를 받는데, 그 결과에 도달을 하게 되면 또는 그거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전부 융합이 돼서 나는 자유권에 도달하게 되죠. 대자유인이 되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우주의 이 섭리나 지금 세상의 섭리나 모든 걸 알게됨으로써 또 세상의 생명들이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나 보이는 모습들이나 다 자기가 찰나찰나에 같이 할 수 있고 같이 활용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무한의 묘법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자기가 벗어나는 반면에 자기는 자유인이 됨으로서 슬퍼도 슬픈 걸 모르고, 괴로워도 괴로운 걸 모르고, 또 욕심도 애착도, 이런 것도 다 녹아버려서 항상 찰나찰나 하루살이로 살면서 여여하다는 그 말도 하나 붙지 않고 그대로 저 강물이 저렇게 아무 물이나 들어가도 도도하게 흐르듯이 그냥 그대로 흐른다 이겁니다.

자유인에게도 내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나라고 하는 그 나가 없다고 하셨고 이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 영원하지가 못하고 항상 바뀌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네 욕심을 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거라고 봅니다. 나를 죽임으로써 진리의 세계를 보거나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자유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인이 될 때에도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온다. 그러니까 나한테로 일단은 다 놔라. 그러면 나한테 놓으면 나로 인해서 나를 거쳐서 바깥으로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몽땅 한 군데서 나고 든다는 것을 자기가 증득한다면, 그것을 안다면 스스로 자기는 감응이 되고 스스로 자기와 자기가 둘이 아니게 된다 이겁니다. 스스로. 즉 말하자면 둘이 아니게 자기가 발견이 된다면 그때서부터 진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그 자심을 얻었을 때 첫째 타심통이 옵니다. 타심통이 올 때는 그걸 자심으로 돌려라. 자심으로 돌리되 바깥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안으로 자심을 다시 돌린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숙명통이 온다. 타심통이 올 때는 숙명통까지도오거든요. 그러면 숙명통이 오게 되면 그 숙명통조차도 자심으로 돌린다. 또 천안통이 오면 천안통대로 자심으로 돌린다. 또 천이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도 나의 자심으로 돌린다. 그럼 신족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건 자심으로 돌린다.
다섯 가지를 왜 다 자심으로 돌려야만 되느냐. 이것이 타심통으로 왔을 때에 이거는 이렇고 저건 저렇고 다 알게 되죠. 요 속은 요렇고 저 속은 저렇고. 그런데 만약에 그걸로써 끝난다면 그건 점쟁이밖에는 안됩니다. 그렇죠?
또 숙명통이 올 때 그것을 바깥으로 발설을 해서 지나온 걸 다 아는 그런 말을 하고 이렇게 되면 점쟁이하고 미치광이가 된단 얘기죠. 자유권을 얻지 못하는 그런…. 거기에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타심통도 자심이요, 숙명통도 자심이요, 천이통도 자심이요, 신족통도 자심이요, 천안통도 자심이요, 이렇게 자심으로 돌리다 보면 그때 무심이 되는 겁니다. 무심이 됐을 때에 무심이 됨으로써 무심에서 이 골수를 통해서 그대로 또 작용을 할 때에 이 무심 자체도 인제 없어지는 겁니다. 무심 자체라는 그 언어도 없어지는 거죠. 왜? 골수를 통해서 이거는 자유자재하게 굴리는데 거기서 또 이 자심이라는 걸로, 이 하나로 들고 난다 하는 걸 그거를 무심으로 돌리기 위해서, 공심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굴리는 것을 숙달을 하는 겁니다, 그때서부터. 이 다섯 가지를 자심으로 돌렸을 때에 그걸 숙달을 또 해요.
이거는 하나로부터 모든 전체가 돌아가는구나. 그러면 하나로부터 무엇이 돌아가느냐 하면 이 가고 옴이 없는 것도 하나로 인해서 내 마음으로 돌려서 가고 옴도 없을 것이요, 두루 보는 것도 가고 옴도 없을 것이요, 보는 것도 없을 것이요, 남의 모든 마음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게 없으며, 또 숙명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게 없으며, 이렇게, 이렇게 돌려 가지고 그것이 다 됐을 때에 오신통에서도 벗어나는 겁니다. 그것도 놓는 반면에 말입니다.
오신통에서 벗어나면 그때에 이제 활용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무위법의 활용을 하는 데에 이건 각본대로 오는 거를 자기가 오는 대로 그 숙달을, 즉 말하자면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만나 봐야 될 때는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만나 보기도 하고, 이승에서 만나 볼 때는 이승에서 만나 보는데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있는 전자의 숙명을 보면서 그것을 다 숙달을 하는 거죠, 체험을 하고. 그 누진통을 배우기 위해서 그것이 숙달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도 놓고 저 사람이 어떻게 지내온 것도 놔야 되고 저 사람을 내가 두루 보는 것도 놔야 하고 듣는 것도 놔야 하고 가고 오는 것도 놔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 오신통에서 ‘아, 이것이 이렇게 내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게 돌아가는 거로구나.’ 하고 그때서야 오신통에서도 탁 벗어나고 무심으로 벗어나는 겁니다.
무심으로 벗어났을 때에 그때 오신통을 하는 거를 하나하나 인제 정작 배우는 겁니다. 오신통을 벗어난 뒤에 오신통을 하는 거죠. 오신통 하는 거를 숙달하는 거구요. 그것을 1차의 면벽, 2차의 면벽, 계단 없는 면벽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3차의 면벽이 되면 오신통도 벗어나서 정작 활용할 수 있는 거죠. 듣는 것도 보는 것도 하나하나 동시에 굴릴 수도 있고. 중심점이 있기는 있는데 중심점이 없는 것이 왜냐하면 이 자의와 타의를 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의와 타의를 다 놓았기 때문에, 벌레 하나 풀 한 포기도 다 놓았기 때문에 이것이 풀 한 포기도 버릴 게 없는 겁니다.
무아가 돼서 내가 했다 뭐 이런 게 없습니다. 기준도 없고 목적도 없으면서 딱 부닥쳤을 때에 그대로 그냥 저절로…, 마치 돌과 돌이 한번 탁 칠 때에 불이 반짝 일어나듯 하는 그런 결과입니다. 그래서 산은 푸르르고 이러는 것은 전체를, 물이 흐른다 하는 건 돌아가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대로, 그대로 그냥 닥치는 대로 용도대로 돌아가니 그래서 하루살이지요. 판단이 개재되지가 않고 뭘 해야겠다 이런 것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진다 이거지요. 자동적이고 자동컴퓨터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무위법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 무위법으로 인해서 보이는 생명들, 보이지 않는 생명들, 보이지 않는 체, 보이는 체, 이런 것을 다 포함할 수가 있는 겁니다.

통일을 한 발 앞당기려면…

해년마다 6월이면 호국보훈의 달이라 하여 이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산화해 가신 모든 영령들을 추모합니다. 그렇지만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이 한반도가 반 토막으로 살아온 지가 벌써 60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을 한 발 앞당길 수 있을까요?

통일을 하는 것이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우주 삼라만상에 다 통례가 있습니다. 이 모든 걸, 지금으로 치면 회의를 해서 적합하다 할 때에 하게 된다는 말도 됩니다. 그래야 그때가 되면 어느 사람이 주어져서 그 사람이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그걸 말하자면 굴레 없는 수레라고 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데에 연기처럼 구름이 돌아가듯 이렇게 돌아가서 통신이 되는 것이 그것이 진짜 그렇게 돼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도리를 다 알았으면 뭐 천지가 뒤집힌대도 걱정 없지만 그렇질 않으니까, 지금 우리 국내에서 살기도 너무 어렵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들도 그렇고 남북통일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어떡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봐서 그대로 하십시오. 그대로 해야 몇 년 지나면 스르르 이렇게 돌아서 되는 거지 억지로 강제적으로 뛰다가는 안됩니다. 그러니깐 뭐든지 언제나 이렇게 스무스하게 돌아서 돼야 되겠죠.
지금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빨리 서둘러서 꼭 이거를 해야 한다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이 집이 위태합니다. 어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위태한데 그 위태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공해로 인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하고 그러는데, 삼분지일은 공해로 인해서 생기죠.오존층이라고 할까 이게 자꾸 압축이 되니까 얼음이 만약에 다 녹는다고 해봅시다, 땅덩어리는 파산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심각한 문제죠.
그러니까 잘들 생각해 보세요. 이 마음공부를 해서 그 모든 거를 타파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마음 이 자리밖에는 없다는 거, 우주하고 통과할 수 있는 것도 마음밖에는 없다는 거, 그것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고 우리 생활의 문제든 통일의 문제든 지구의 문제든 그 자리에서 다 해결이 되게끔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200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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