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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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3) 왜 <금강경>을 골랐나
가장 친숙하기에 가장 낯선 경전

선의 소의경전, 혹은 교와 선의 접점
<금강경>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경전입니다. 조계사 근처를 오가는 길에, 혹은 문득 들른 산사에서, 불교신도라면 불교방송에서 새벽을 열고 밤을 닫을 때 유장하고 낭랑하게 울리는 이 경전의 독송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 잠결에 어머님이 새벽마다 예불하며 낮게 읊조리는 이 경전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때는 내용을 전혀 몰랐지요. 무슨 주문처럼 기이하고 낯설어서 거 좀 그만하시라고 어머님께 역정을 내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짓궂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 그거 무슨 소린지나 알고 따라하는 거유?” 이런 당돌하고 불경스런 질문에 어머님은 정색을 하고 자리를 고쳐 잡으며 일장 법문을 펼쳐놓으시곤 했습니다. 어머님은 <금강경>의 이름으로, 다니던 절에서 듣던 스님들의 말씀, 이런 저런 책에서 읽은 지식, 당신의 삶에서 겪은 경험들이 뒤섞인 교훈적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그게 좀 억지스럽고 견강부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금강경>의 문자는 대학을 나온 내가 뜯어보아도 모를 소리뿐인데, 어머님은 그 모든 세부 곡절을 무시하고, 전체를 휘몰아 “바로 이것이 <금강경>”이라고 단정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압니다. “아하, 그 총지(摠持)가 진정 <금강경>이었구나!”라고요.
그러니 문자를 몰라도 <금강경>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문자를 몰라야 <금강경>을 알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가에서 늘 말하듯이 말이죠. 둘 다 맞는 말이라면, 문자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금강경>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방편적으로도 <금강경>은 문자를 ‘통한’ 불교와 문자를 ‘떠난’ 불교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교와 선의 접점이 바로 이 경전입니다. 이 경전이 대승의 중심이면서 선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에 무슨 소의경전이 있는가 하는 분도 있겠군요. 불립문자라는데 말입니다. 선의 실질적 창시자인 육조 혜능은 주지하다시피 남방 벽지 시골에서 어느 스님이 지나가며 읊조리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불법의 소식을 얻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그는 나중 <금강경>의 가장 빛나는 주석이면서 또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육조 구결(口訣)>을 남겼습니다.
그 첫머리에 그는 <금강경>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선이 깨닫고자 하는 핵심이 <금강경>에 잘 표명되어 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이 뜻을 조선의 선종에서도 받아들였습니다.
서산대사께서는 “굳이 소의경전이 필요하겠느냐”고 썩 내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치신 까닭이 선이 표방한 불립문자의 방법에 더욱 철저하자는 뜻이었지, <금강경>의 취지가 선의 목표와 어긋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강의에서 문자를 ‘통해’ <금강경>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문자는 결국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이해가 깊어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문자 밖에 서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이 과연 불교의 중심인가
누가 이렇게 묻습니다. “<금강경>이 대승 중관의 대표이고, 또 선과 교의 접점이긴 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불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물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중심이 무엇이냐에 대해 수많은 논란과 견해차가 있어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팔만사천의 법문들이 시간적 순서를 따라, 학파의 발전에 따라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 중구난방의 한역 경전들을 놓고, 그 가치와 위계를 따지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유행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천태와 화엄의 것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분을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영미어권에서도 이 문제를 보는 시각과 판단이 제각각입니다. 원시불교에 초점을 두어 대승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람, 대승 가운데서도 유식이 정통이라는 사람, 반야가 붓다의 관점을 가장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람, 화엄이 불교적 깨달음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천태를 불교적 선교방편(善巧方便)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사람, 정토야 말로 종교로서의 불교를 성립시키는 토대라고 말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교학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어리석음”으로 쓸어버리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통해 불교의 취지에 직접 닿겠다는 선의 주장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원효 스님의 말씀처럼 불교는 능소능대, 한 마디로 끝낼 수도 있고, 팔만 사천 법문으로도 다할 수 없습니다. 근기와 인연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전과 방법을 골라야 합니다. 위의 분류와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의 성향과 근기에 맞는 방편을 찾아 나설 일입니다.
제가 한 말씀 드리자면, 설화적이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일상적이고 교훈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를 읽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들은 아비달마나 유식이 맞겠고, 직접적이고 간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의 문헌을 읽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잡담 제하고, 핵심만 추려, 불교의 체계와 골격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를테면 <대승기신론>이 제격입니다. 이도 저도 번잡하고 곧바로 핵심에 닿겠다는 분들은 화두를 들 만합니다. 그러나 이 돈초가(頓超家)의 방법은 보통의 근기에 권할 사항은 아닙니다.

불교의 비밀 늘 삶 가까이에 존재
이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경전은 <대승기신론>입니다. 다들 원효 스님의 소와 별기를 더 중시하지만 저는 그 짧고 간결한 대승기신론의 본문을 들여다보기를 더 좋아합니다. 낯선 구절이나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원효 스님의 주석과 스즈키의 영역을 참고로 들추어 봅니다. 처음에는 이 강좌를 <대승기신론>을 읽고 해설하는 자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신문의 처음 공지도 그렇게 나갔습니다만, 결국 <금강경>으로 낙착시킨 것은, 이 경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입니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친숙한, 그러면서도 낯설고 어려운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 아닐까 해서입니다.
제가 불교를 말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팔만사천의 법문을 모두 알아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십시오. 불교의 비밀은 여러분이 늘 말하는 그 익숙한 불교용어와, 늘 독송하는 사구게 속에 있습니다. 그 뻔한 구절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눈에 밟힐 듯 선명하게 다가올 때, 그때 여러분은 불교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좋은 법문이란 누구나 아는 공이니, 무아니, 법계니, 사성제니를 우리네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겁먹지 마십시오. 저는 이 강의에서 여러분이 모르는 불교 용어나 수많은 주석의 주석들은 가급적 쓰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낮고 쉬운 언어로도 우리는 충분히 불교를 말할 수 있습니다.
200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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