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계행으로 70년 수행
한국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보문종 前 총무원장 혜일(慧日·86) 스님을 어렵게 찾았건만 만나자 마자 “남에게 보여줄게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나 15세에 전주 정혜사로 출가했고, 이제껏 한번도 정혜사를 떠나지 않고 정진한 세월이 무려 70년. 어찌 하고픈 말이 없으랴 싶어 졸라대니 “그저 ‘청정계행과 인욕행를 바탕으로 참선수행하라’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란다.
혜일 스님의 은사는 근세 비구니계의 큰 스승인 명주(明珠) 스님이다. 어려서 부모님따라 정혜사에 오면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던 자상하기 이를데 없던 스님이었다. 그 인품에 끌려 출가하게 됐고 50년 가까이 곁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셨다.
이렇게 시작된 혜일 스님의 출가생활은 흐트러짐 없는 수행자의 표상 그대로였다. 스님은 정혜사에 강원이 개설되자 일찍이 경전을 섭렵하고 선방에 들었다. 그렇다고 여느 수좌들처럼 전국 제방의 선방을 전전하지는 않았다.
정혜사 완산선원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했고, 후에 선원장을 맡아 정혜사만의 청정가풍을 세우며 무난히 30안거를 성만했다. 지금도 사중에 문제가 있을라치면 스님이 먼저 찾는 곳은 선방이다.
“요즘 물질은 부족함없이 풍부한데 사람들 마음은 각박하기 이를데 없어요. 모두가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현대야 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부처님 가르침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1998년, 혜일 스님은 은사스님이 이루지 못한 대중포교를 위해 큰 결단을 했다. 전주 삼천동에 도심포교당 ‘완산불교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그때는 IMF로 어려웠던 시기여서 주위의 반대가 있었지만 연건평 600평에 이르는 대형 포교당을 세웠다.
자체 학사가 없어 이리저리 셋방살이하는 전북불교대학을 위해서였다. 재가불자들이 운영하는 불교대학을 위해 스님들이 건물을 지어 무상 임대해 준 것은 유례가 없는 일로 불교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정혜사는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는 이름없는 고아원이기도 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정혜사에서 살았다. 3칸 법당 하나 뿐이던 암자가 세 번에 걸친 중창과 적극적인 포교에 힘입어 이제 전주에서 으뜸가는 가람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정혜사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중심에 항상 혜일 스님이 있었다.
“노스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도로 일관하세요. 수많은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장애가 없었던 것은 노스님의 큰 원력과 수행공덕이라 생각합니다.”
혜일 스님을 가까이서 보필하고 있는 총무 지섭 스님은 “노스님에게는 엄격함 속에 부드러움이 있고, 절약 속에 무주상 베품이 있으며, 대중화합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하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비구니 승단을 지키기 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난해까지 10여년간 보문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 “바깥나들이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하신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입니다. 일 따로, 공부 따로가 아닙니다. 특별히 뭔가 한다는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 하세요.”
전주=이준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