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진실해야 하고 물러서지 않아야
여러분을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듯 합니다. 하지만 한 찰나도 떠나지 않고 여러분과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됩니다. 물론 같이 돌아간다 하더라도 전력을 내가 끌어 쓰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하지 못하리만큼 그렇게 천차만별로 자꾸자꾸 화(化)해서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끌어 쓰는 데 달려있다 이 소립니다. 끌어 쓰는 그 자체가 묘한 도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큰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끌어서 먹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주 만유를 창조하여 나가는 그 인과 필연의 법칙. 우리의 몸과 생명, 정신 작용으로 인한 일상생활 그 자체가 바로 인연의 법칙에 따라서 운전되고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연의 법칙을 벗어나서는 우리가 발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불도 중생도 이 모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아침 쇳송에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이라고 있습니다. 오종대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오종대은이라는 뜻은 일체제불의 종지를, 즉 말하자면 모든 우리들의 생명의 씨, 불씨의 그 어마어마한 뜻을 알고 감사함을 느낄 줄 알라는 것이죠. 그걸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면, 즉 말하자면 우리를 인솔해 나갈 수 있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의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도 거기에 포함이 됩니다. 못하든 잘하든, 예를 들어 우리 가정의 부모가 자식을 잘 이끌어가려고 애를 쓰지 잘 이끌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하든 못하든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는 행입니다.
그와 같이 “그 뭐 대통령에게 무슨 은혜가 있어?” 이러지만 잘하든 못하든, 못났든 잘났든 내 부모가 있기 때문에, 마치 각 나라의 임금과 임금이 접하듯이, 대통령과 대통령이 서로 회의를 할 때도 내 나라를 중요시하지 남의 나라를 중요시 안 합니다. 그리고 내 국민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든지 마다 않고 하는 그런 계기는 있다고 봅니다. 또 부모의 은혜, 낳고 길러주고 가르치고 그랬건만 머리털이 세어서 죽을 때까지 내내 마음고생을 있는 대로 시키는 것이 바로 자식입니다. 그 은혜를 모른다면 아니 되기 때문에 국왕의 은혜, 부모의 은혜, 사장의 은혜, 국민의 은혜, 땅의 은혜, 불의 은혜, 바람·공기의 은혜, 물의 은혜 모두가 감사함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둘 아닌 도리를 얼른 납득할 수가 있다 이런 얘깁니다.
수차에 말을 해왔지만 거기서부터라도 얘기합시다. 미생물에서부터 쫓고 쫓기면서 그 아픔을 당하면서 찌그러지고 일그러지면서 잡아먹히면서 잡아먹으면서 이렇게 진화돼서 인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렇게 올 동안에 남의 자식도 됐었고 남의 부모도 됐었고, 짐승의 부모도 됐었고 짐승의 자식도 됐었고, 사람의 부모도 됐었고 사람의 자식도 됐었고, 넓게 생각을 한다면 하나도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겁니다.
좁게 보고 한 가정에서 요 한 철 나는 생각만 하지 마시고, 사람이 쳇바퀴 돌아가듯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진화되고 화하는 도리를 안다면 아마도, 네 부모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해도 좋고 내 부모니까 잘 해야 되고 이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둘 아닌 도리를 확실히 증득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부드러운 말이 나오고, 부드러운 행이 나오고, 진실한 구함이 생기고, 진실한 구함이 생김으로써 진실하게 나 아닌 나의, 참나의 소식을 알 수 있다 이겁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항상 말을 하지만, 불교라는 그 자체가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요 말과 말이 통하는 것이 교(敎)라 한다면, 하다못해 곤충에 이르기까지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식물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존경하고 대화하고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이 통함이 바로 교란 말입니다. 죽은 세상이나 산 세상에서 통하듯이, 또는 저런 곤충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하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다못해 개미도 요만한 거 하나를 발견을 하면 물고 그냥 가지만 큰 과자를 하나 발견했을 때 보십시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금방 소식이 통해서 그냥 떼를 지어서 옵니다. 이건 무슨 까닭입니까? 얼마나 묘한 도리입니까? 말없이 말을 전달하는 이 소식 말입니다. 개미뿐만 아닙니다. 모두가 다 그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일체 만물만생에 의해서, 내 몸속에 있는 그 중생들이 화해서, 천백억화신으로 화해서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짐승들이나 모든 곤충들, 하다못해 무정물까지도, 목신까지도 원한다면 다 응해주십니다. 응해주시되 묘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뱀이 공부를 하면서 원하면 한 찰나에 드실 때 뱀으로 응하신다 이겁니다. 뱀으로 응하셔야 뱀이 저항력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하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습을 천태만상으로 나투시면서 응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을 관(觀)하면 관세음보살로 나투어주시고, 지장을 염하면 지장으로 나투어주시고, 약사를 염하면은 약사로 나투어주시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까 얘기했죠. 하다못해 풀포기 하나까지도, 곤충 하나까지도, 안 보이는 세상의 모두를,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또는 죽은 생각이나 산 생각이나,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다 그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이겁니다. 그거 하나를 생각할 때 우리 가정에서 무조건, 조건 없이 자식들에게 주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여러분한테 모든 것을 베풀어줄 때에 그 마음의 보시, 이것은 제일 으뜸 나는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마음, 조건 없이. 물질을 주더라도 조건 없이 주는 보시, 조건이 조금이라도 붙었다 하면 그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오시면, ‘너는 죄가 얼마만큼 있고 너는 죄가 얼마만큼 있으니까 이것이 안 된다.’ 이럴 수가 없는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죄가 있으면 얼마나 있으려고요. 작은 거든 큰 거든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무조건 조건 없이 줄 수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말입니다. ‘나는 죄업이 많으니까 이렇게 받을 수가 없다.’ 하는 생각, 또 ‘나는 이런 거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업보가 다 녹아야 된다.’ 하는 조건, ‘나는 이러한 병이 걸렸는데 과거로부터 이 업보가 얼마나 많으면, 얼마나 죄가 많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서 조건 없이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도리를 배우고 아는 사람들은 조건 없이 줘야만이 마음으로도, 길을 지나가다가도, 하다못해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도 무명을 벗겨줄 수 있고, 그 소의 의식을 바로 나한테로 넣는다면 즉시, 그건 죽지도 않아서 벌써 환토를 한 거죠. 천도가 된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벗고 사람이 돼서, 굴려서 사람으로 환생을 할 때 소는 그 은혜를 생각해서 이 불법에서 떠나지 않게끔 됩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것은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진리 속에서 우리들이 인연에 따라서 활짝 개이기도 하고 인연에 따라서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쁜 대로 이끌리기도 하죠. 이 몸뚱이 속에는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대로 이끌어주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대로 이끌어주는 그런 수십억의 중생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도 가끔 하죠. 팥죽을 쑤는데 끓어오르는 팥죽 방울을 보고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주걱으로 쳤다는 얘기 잘들 아시죠? 그 주걱으로 죽 방울을 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뜻을, 그 속에 있는 뜻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행하고 또는 경을 달달 외워서 강의를 잘하고 이런 게 참선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무지렁이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처님 법을 한시라도 떠나지 않는다면 그게 참선이죠. 내가 먼저 나왔으니까 나로부터 화두요, 나 자체부터 알 양으로 노력하는 것은 불씨를 심어서 싹을 틔우는 거나 같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모두가 이러한 관계상 인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그것은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자동적인 법칙입니다. 모든 만남이, 교류가 그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발전을 하고, 또 ‘이것이 안된다 된다’ 하고 법석이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거를 가만히 생각한다면 ‘아이고! 이 나라가 혼란스러워서, 이거 이거 뭐 이렇게 혼란스럽고 이렇게 해서야 나라가 잘될 수 있어?’ 이러지마는 부딪치지 않는다면 불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이 모두가 상대적인 원리로써 이렇게 가는데, 부처님 법에 의해서 우리가 ‘선(禪)이다’ 그런다면 이거를 붙이고 안 붙이고를 떠나서, 인연에 따라서 딱 붙이면 즉, 전선줄과 전선줄을 한데 붙이면 불이 확 일어나서 불이 들어오는 그 광명을 바로 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양면의 이 줄을, 갖다 붙이는 줄을 가지고 이게 틀리다 이게 옳다 하니까 그래서 ‘놔라’ 하는 겁니다. 선과 악을 놔라. 물질계와 정신계를 그냥 놔라. 놔야만이 이게 하나로 이루어지면서, 모두가 하나로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중심이 일체를 다 자동적으로 굴리고 있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그 하나는 움쭉도 안 합니다. 눈도 깜짝 안 합니다. 우주가 다 망가진다 하더라도 꿈쩍도 안 하는 겁니다. 꿈쩍도 안 하는데, 그게 왜 꿈쩍도 안 하느냐? 은하계의 중심도 태양계의 중심도 이 우주의 중심도 이 인간의 중심도, 모두가 중심은 하나로 전부 연결이 돼 있습니다. 은하계에서 태양계로, 태양계에서 지구로, 모두 별성이나 혹성이나 다 연결이 돼 있습니다.
그 에너지 광력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 뒷면에서 나오죠, 중심 뒷면에서. 서로가 서로를, 우리가 마음의 샘터다 하는 것도 모두가 연관성이 있음으로써 이 마음의 샘터에 샘도 나올 수 있고, 그냥 누구나가 다 ‘아이고, 저 사람은 아예 쓸모가 없어.’ 그러고 그냥 다 내치면 아예 그냥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산 송장이 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내가 인연에 따라서 이렇게 잘 가는 동안에 의욕이 생기고 할 일이 생기고, 얼굴이 좋아지고 다복해지고 짜증도 안 나고, 그런 거 아닙니까? 조그만 것 하나로부터 큰 우주의 삼천대천세계를 집어먹을 수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이 집어먹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나를 죽여서 내가 될 수 있어야만이 그렇다 이 소리입니다.
이 몇 마디 안 해드리는 것을 잘 참작하셔서 행하세요. 스님네들은 신도들을, 법우님들을 만날 때 무조건이요, 이유가 없어야 하고, 신도님들은 신도님들대로 믿음이 진실해야 하고 물러서지 말아야 하고, 또는 마음과 마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도리를 알아야 하고,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고 일체제불의 마음, 이 스님들의 마음이 여러분 마음먹는 대로 한 찰나에 들고 한 찰나에 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됩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자1(남): 오늘도 법 자리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는 중에 어느 날 수행자 한 분이 “불경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하니까 “성경에는 삼십육천(三十六天)이 있고 불경에는 삼십삼천(三十三天)밖에 없으니까 우주를 다 간파하지 못했지 않느냐.”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견해로 볼 때는 유(有)의 법으로 보면은 사람이 겨자씨만 하지만 영체이탈한 성인의 경계로 볼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공만할 건데 어떤 면에서 이렇게 경에 차이가 나서 범부들이 헷갈리게 하는지 그게 좀 의심스러워서 여쭙니다.
▲스님: 하하하,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과거를 보러 가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아, 백지를 보고 있거든요, 백지 말입니다. 그거 옆에서 아무리 봐도 백지를 보고 앉았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과거 보러 가는 사람이. 그래서 “아니, 노스님은 어째서 백지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도 볼 게 없는 백지를 왜 보십니까?” 하니까 그 노승이 있다 하시는 소리가 “자네도 백지를 볼 줄 알아야 과거를 볼 수 있네.”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 과거만 봐서뿐이 아닐세. 또 국민을 제도하는 데도 역시 백지를 볼 줄 알아야 제도를 할 수 있네.” 하거든요. 그러나 그걸 수긍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도리가 없더랍니다. 정신계로부터 물질계로 나오는 이 사실을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알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깐 그날 저녁에 “자네는 내가 지금 아무리 말을 해줘도 모르니 이따 보세.” 아, 그러더니 밤에 자는데 꿈에 턱 나타나서 이러 이러하다 하고 일러주더랍니다. 그래서 과거를 봐서 박문수가 되었답니다, 하하하.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지구 사바세계를 중세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중생이 체를 벗어나면 마음따라 마음세계로 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도리를 볼 때 이곳 사바세계처럼 색류의 체를 갖고 공심(共心)·공생(共生) 하는 땅이 우주에 또 있는지 의문이 생겨서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 이거 보세요. 마음의 도리라는 것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먹어도 남음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고 없고 그것을 생각 마시고 지금 몸속에 들어 있는 수십억 마리의 의식이나 한마음으로 모아서 내 말을 척척 들을 수 있게끔, 따라줄 수 있게끔만 하시면 이 우주 공간의 전부를 알게 될 겁니다, 아마.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부처님 제자는 숙명명·천안명·누진명의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누진명은 용심으로 해석을 하여도 무방한가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 그것도 다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천안 천이 타심 숙명 신족, 이 모두 이것이, 예전에도 그렇게 표현을 했죠. ‘야,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먹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이것이 도가 아니니라. 아무 이름 없이, 오신통(五神通) 이름 없이 그냥 물을 줄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참선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라 이것입니다.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보시·업보 두 가지 경우에 대하여 더 여쭙고 싶습니다. 누가 인도에 가서 거지에게 돈을 주니까 인도 거지가 고맙다 인사를 안 하고 또 달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돈을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느냐 하니까, 인도 거지가 하는 얘기가 “당신이 공덕 베푸는데 왜 내가 고맙다고 하느냐.” 그래서 돌아서 갔더니 또 돈 달라고 해서 “조금 전에 줬지 않느냐. 당신 복 지으라고 그러는데 뭣이 나쁘느냐.”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더랍니다. 요 경우와 누가 보면 절에 ‘오늘 얼마 갖다줘야지.’ 하고 나가다가 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은 ‘어디 어디서 왔는데 오늘 요거만 냅니다.’ 하고 돈을 주고 갑니다. 이런 경우에 보시의 과보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 그거는 틀립니다. 왜냐하면 줬으면 준 대로 그냥 받는 것이, 받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지마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때에 돈을 주고 물건을 샀는데 아, 내가 돈 준 거 생색내겠습니까? 그와 같거든요. 그런데 굳이 또 달라는 건 뭡니까? 굳이 달래서 주는 것은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요만한 것 하나를 시주를 한다 하더라도 내 주인공에, 이게 주인공과 더불어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이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다 할 때 내가 했다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갖다 내는 거지, 스님네들을 위해서 갖다 내는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들 해보라고, 나를 위해서 갖다주는 게 있던가 없던가?
그러나 이 스님네들이 잘못 생각하고 ‘나는 스님이니깐 날 갖다줬겠지.’ 한다면 이거 오산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쓰레기를 치워달라고 갖다주는데 내 이 고깃덩어리가 치울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나요? 그러니까 그 모든 일체제불의 한마음, 즉 불바퀴에다가 집어넣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받은 사이도 없고 준 사이도 없이 보시를 하고, 누구한테 무엇을 건네주더라도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공덕입니다.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스님: 아까 첫번에 뭐라고 그랬죠?
▲질문자1(남): 성경에는 삼십육천 하늘이 있고 불경에는 삼십삼천 하늘이 있다.
▲스님: 그 말을 묻는데 내가 그 대답한 것을 잘 이해를 해서 생각해보세요. 그런 거는 모두 이론이다 이겁니다.
▲질문자1(남): 예. 알겠습니다.
▲질문자2(남): 저는 부처님 뜻에 따라 이곳에 온 것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몇 가지 궁금해서 배우고자 나왔습니다. 불가능과 가능성에 대해서 좀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난 며칠 전에, 제가 여기 처음 와서 한마음 공부를 시작한 날은 1월 17일인데 한 일주일쯤 있다가 한·일 축구 시합을 봤습니다. 한·일 축구에 대해서 일본은 한국에게 비겨도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돼 있어서 유리한 입장이고, 우리는 일본을 꼭 이겨야만 나갈 수 있는 그런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시간이 가도 골이 안 터지니까 굉장히 저로서는 불안하고, 또 저뿐이 아니라 국민들도 다 그렇겠지요. 우리나라가 올림픽에 나가고 안 나가고가 저한테는 문제가 아니고, 일본한테는 어떡해서든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그런 조바심, 그것은 아마 제가 말은 안 해도 우리가 일본한테 36년간 억압된 그 시절을 생각해서 그랬던 모양이죠. 골은 안 터지고 한참 조바심을 내다가 시간은 다 되었는데 제 처가 하는 말이 “여보! 당신은 한마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한마음 공부 한다면서 조금 침착하세요.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주인공한테 맡기는 그런 공부를 해야죠.” 그러면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주인공이요, 지는 것도 주인공 그 자리니 주인공한테 맡겨보세요. ‘좀 이기게 합시다’ 하면 될 거 아니요. 해서 안 되는 일이 없잖아요.”
그러고 나서 처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더라고요. 그래 저는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니깐 ‘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한 50초 정도, 1분도 안 남았을 때 정말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골인이 났습니다. (대중 웃음) 그래서 이것이 다 우리 한마음 뜻의 기도 덕인가 하고,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50초, 40초 이렇게 남았는데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는 겁니다. 아마 루즈 타임을 적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1분이 1시간, 2분이 2시간 심지어는 10시간이 간 것 같았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그때는 나도 ‘아, 한마음 주인공, 이 공을 지켜주십시오. 빨리 끝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순간에 끝이 나서 결국 한국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10초, 20초에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이긴 건지 아니면 불가능이란 게 있는지, 만약에 불가능이란 것이 있다면 이 한마음 공부를 함으로써 녹아내릴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중 웃음)
▲큰스님: 마음이라는 거는 아주 광대무변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묘하냐? 이 마음은 천리라도 멀지 않고요, 발밑이라도 가깝지 않습니다. 단 있다면 내 마음에 불을 켜면 저 사람의 마음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이죠. 이 한생각의 가설이요. 이건 두고두고 뭐 전기 가설 하듯이 꼭 해놔야 가설이 되는 게 아니라 한생각의 가설이란 말입니다. 이러니깐 묘하죠. 그래서 마음 속에 불을 켜면 만 명이라도 가설이 됐다면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겁니다. 모두 여러분이 가정에서 ‘아이구, 저놈은 믿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이것이 믿지 않는다고 말로 하고 끌어오려면 그게 부러집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불을 켜면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요 그것이 바로 묘법인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법을 일일이 파헤쳐 보면 참 신기한 일과 불가사의한 일이 많은데, 그것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라 본래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바들바들하고 애를 쓰면 내 육신 자체가 벌써 망가지고 해(害)를 보고, 그런데 그렇게 바둥바둥 뛰면 되겠습니까?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야지, 밝게. 그러니까 마음을 침착하게 두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지.’ 한다면 그것이 그냥 한 찰나에 불이 가서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 그 한 사람의 불이 들어가면 수십억 마리의 의식이 불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하이고, 수십억 마리에 불이 들어온다면 거기서 또 연결이 돼 있지 않습니까? 연결 연결, 가설이 돼 있죠. 한 패가, 전부 한식구가 해야지 이런 절망감과 의구심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연방 연방 연줄이 불이 들어오게 돼 있으니까 그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질문자2(남): 예. 감사합니다. 이제 배우는 과정에서 계단을 한 발자국 올랐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스님: 아이구, 이거 보세요. 하하하. (대중 웃음) 이 공부하는 데는 한 발 계단을 올라섰다 내려섰다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동쪽에 가는 것도 서쪽이요, 서쪽에 가는 것도 남쪽이요, 남쪽에 가는 것도 북쪽이니, 북쪽이다 서쪽이다 남쪽이다 동쪽이다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그 마음. 마음은 이리로도 갔다 저리로도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갑니까? 그런데 무슨 한 계단을 올라서요? 하하하. (대중 웃음) 선생님 같은 분도 있어야 웃죠. 하하하.
▲질문자2(남): 배우는 데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라고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 예. 우리가 탑을 쌓으려면 자꾸자꾸, 벽돌 하나를 갖다놓고 또 하나 갖다놔서 다 올라갈 때까지는 잠자코 그냥 쌓는 겁니다, 잠자코. 뭐 하나 더 갖다놨느니 덜 갖다놨느니 할 것도 없이 그냥 무조건 쌓아 올라가요. 그러다보면 한순간에, 그 봉우리는 한순간에 올려놓게 되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그저 침착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