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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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2) 누구나 불교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음’ 알고 닦는데 너·나 구분 없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 부재
왜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나서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 관한 한 저는 아마추어입니다. 불교학생회나 수련회에도 나간 적이 없고, 불교에 관한 전문적 커리큘럼을 거친 적도 없으며, 더구나 염불이나 참선을 본격 수련해 깨달음이란 것을 얻은 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를 아는 데는 그런 준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육조 혜능은 그런 정규 커리큘럼이나 경전 지식의 권위가 오히려 불교를 아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만 한 가지 조건만이 필요한데, 그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든 불교를 알 수 있고, 누구든 불교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교(頓敎)의 뜻입니다. 육조 혜능은 이 마음을 알고 닦는데 있어, 재사(在寺)와 재가(在家)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아마추어가 외람되이 나선 것은 전문가의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입니다. 지금 불교는 너무 높고 험준해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다 그것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버겁습니다. 이렇게 난해와 모호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번에는 너무 격이 낮고 곁가지인 지루한 이야기들이 번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한편에서는 한문 경전의 용어와 어투를 그대로 외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화두선을 중심에 세워 일상의 대화와 상식의 접근을 근본 차단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가 이 소통의 부재입니다. 스님들과 재가 신도들 사이에도 그렇고, 불교학자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최근 그 틈을 메워보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습니다. 불교를 두고 대학에서의 강독이나 대중 상대의 문화강좌가 많이 생기고 있고, 사설 참선 단체들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런 벤처의 노력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절간에서도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를 정착시키고, 논강 등을 열어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을 모색하게 된 것은 크게 고무적인 일입니다. 제 소견에, 참선지도나 템플스테이 등 실참 지도나 문화체험 등은 아주 훌륭하고 앞으로 한국불교의 큰 밑천이자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불성은 잊고 있던 옛 추억과 같은 것”
행입(行入)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제가 힘을 보탤 곳은 아무래도 이입(理入)쪽입니다. 저는 불교의 이치를 다루되, 그것도 ‘아주 낮게’, 어디까지나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너무 수준 높은 논의에, 옛 한문의 거친 어법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을 대중들에게 작은 위로와 이해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강의를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불교가 너무 어렵다는 소문에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불교가 가르치는 마음의 진실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내딛자면, 그 마음은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새삼 알 필요도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 수는 없습니다. 만일 안다면, 그것은 마군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상대방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가르침이란 본시 내 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 주는, 선가의 말을 빌면 지시(指示)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발을 찾아 천리 먼 길을 쫓아온 혜명에게 육조 혜능 스님은 분명히 일렀습니다. “비밀은 이미 너에게 있다.”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마음의 소식은 흡사 방 한 구석에 먼지 덮여 있는 어릴 때의 장난감 같은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시선은 세상사는 일에 고착되어 있어, 한때 순수한 기쁨이었던 그 물건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장난감은 늘 그곳에 있었다. 아련한 향수가 밀려들거나, 누군가가 일깨워줄 때, 그는 거기 그 장난감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우리의 불성 또한 그와 같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알려져 있는 것들입니다. 혜능 스님의 권위를 빌리면, “보리 반야의 지혜는 본래 세인들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 저는 불교가 노리고 있는 그 지식이, 비록 비밀스럽다고들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특별한 오랜 수련을 통해, 그동안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것들이 비로소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마음의 밝음으로서, 욕망과 분노와 무지의 먹구름 틈 사이에서 늘 빛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깨달음 이후 지속적 실천 과정이 중요
저는 그것을 일별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심에 찌든 마음이 잠시 숨을 죽이고, 자비와 동정과 기쁨과 공정함 등의 무량한 네 마음들이 문득 피어날 때, 저녁 고요 속에서 들뜬 마음을 참선을 통해 가라앉히고, 그날 지은 죄가 무겁게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마음이 먹먹히 일 때, 그때 우리 마음의 본래의 빛이 환하게 떠올라 옵니다. 문제는 그 마음의 빛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깊은 평화와 만족 속에서 더욱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 쪽에 기웁니다. 돈오(頓悟)는 쉬운데 정말 점수(漸修)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또한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돈오를 이렇게 가볍게(?) 해석하는데 대해 눈을 흘기시는 분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방패막이 삼자면, 이 또한 제 독단이나 창안이 아니라 옛적 지눌 스님께서 돈오를 해석하신 그대로입니다. 스님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知的) 이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돈오(頓悟)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에 속합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적 과정입니다. 깨달음 한 번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마치겠다는 턱없는 과욕과 오만을 버리십시오. 그럴 수는 천만 없습니다. 술과 고기를 마음대로 먹는 경허 대사께 진응 스님이 그 방광색의 연유를 묻자, 대사께서는 천연스레 옛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돈오했으니 부처와 같은데, 다생의 습기가 깊어서, 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 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頓悟須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요컨대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등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 연재는 불교에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여는 괜한 야단에 법석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 그런 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이야기를 골라볼까 하다가 <금강경>을 골랐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가장 알고 싶은 이야기가 이 <금강경>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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