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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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상덕 스님
70여년 무소유 실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자기 일에 촤선을 다하며 살면 그게 다인거야.”
상덕 스님(사진)에게 법문 한자락 부탁했더니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내 비구니 암자 약수암 상덕 스님은 세수 80, 법랍 72세로 비구니 원로 중 원로다.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 절에 가지 않으면 15세 전에 죽을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듣고 살았다. 이미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스님의 부모는 귀한 딸을 잃을까 저어해 해인사 약수암 재희 스님에게 보냈다. 이 때가 스님 나이 8세.
어린나이에 약수암 재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5세에 비구니계를 받고 20세에 해인사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동진 출가한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무하고 불지피고, 밥하는 등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렇게 시작한 수행자의 삶은 13세 때 은사스님을 따라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가서 꽃을 피운다. 스님은 부인사에서의 삶을 가장 소중히 기억한다.
스님 나이 20세 때인 해방되던 해 은사 스님이 “네가 불사를 해야 한다”는 한마디를 남긴채 열반에 들자 스님이 모든 절 살림을 맡아야만 했다. 당시 부인사는 기와가 틀어지고 다 쓰러져가는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였다.
당시 100원이면 아주 큰 돈이었다고 회고한 스님은 7년을 하루 세끼 시래기죽을 끓여 먹으며 농사를 지어 부인사 법당불사에 들어갔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하여 죽마저 모자랄 것 같으면 배고프지 않다며 뒷산을 산책하며 다른 이들에게 죽을 양보하면서 오로지 불사에 매달렸던 것이다.
세수 40세되던 해, 스님은 그렇게 어렵게 부인사 불사를 마치고는 대중과 함께 살겠다는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내어놓고 다시 해인사 약수암으로 들어왔다.
“지금도 그 당시 어머니께서 어쩌면 지혜롭게 나를 절집에 보내셨을까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상덕 스님. 어느 누구 부러울 것 없는 수행자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 엿보인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호랑이 스님’으로 통한다.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내며 철저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기에 제자들에게 그만큼 철저히 공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세수 80세인 지금도 스님은 약수암 젊은 수좌들이 행여 수행자의 위의에 어긋날까봐 몸가짐 하나 하나를 따끔하게 지적해 주신다.
“수행자는 그저 편하려면 못쓴다. 아니 수행자뿐 아니라 일반 재가자도 마찬가지다. 옛날 조사스님들은 그저 몽치미(베개) 하나 베고 좌복 하나 덮고 그렇게 살았다.”며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요를 깔고 자리에 눕는 것조차 경계하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스님의 기운 양말과 속옷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삶을 항상 조심스럽게 살라”고 이르고 또 이른다. “내 삶도 나의 삶이 아니라 모두의 은혜로 비롯되었음”을 거듭 강조하며, “쌀 한 톨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으로 보은하라”고 일러준다. 그런 삶을 행으로써 보여주는 상덕 스님은 당당하고 자유스런 수행자의 모습으로 약수암을 지키고 있다.
합천=배지선 기자
200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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