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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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라
악과 선을 다 놔라

같이 벗어날 수 있다는데…

스님 법문에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상들의 마음도 내 마음자리에 놓으면 다 공법으로 돌아가 조상도 후손도 벗어나게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어떤 이치에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이 항상 오늘’이라는 말씀을 가끔 드리곤 합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늘 말입니다. 오늘이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조상들의 영령들이건 뭐건 모두, 내 앞에 거론되는 사람들은 전부 주인공 안에다 다 흡수해야 하는 겁니다. 이해가 갑니까?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도 우리가 같이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에 살아나가는 데도 걸림이 없고 애로가 없고…. 걸림이 없다 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융통성이 있게 돌아가서 공생으로 살게 된다, 그러고도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 걸림 없이 살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지금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뛰면 빠르고 느리게 뛰면 느린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뛰고 안 뛰고가 없이 빠르게 생각하면 되고 빠르게 생각지 못한다면, 이해가 안돼서 느리다면 뭐든지 결정이 안 나고 적응이 되지 않죠. 이해가 돼야 뭐든지 결정적으로 흡수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넣으면 넣는 대로 없어진다 해야 되나요? 넣는 대로 둘이 아니다 이런 소립니다. 넣어도 넣어도 늘어나지 않고,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꺼내는 사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령들을 다 집어넣으면, 집어넣어서 공심으로 공생으로 공체로 된다면 정말 더하고 덜함도 없이 따뜻하고, 모든 게 자기를 자기가 죽이는 법이 없으니 평화스럽단 얘깁니다, 가정에서도.
여러분도 가정에서 무척 애들 쓰시고 살 겁니다. 이게 너무도 중요한 말입니다. 둘로 보지 않는다면, 둘로 하지 않는다면 둘로 보지 않는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공생으로 되는 것이고, 공생으로 되면 공심으로 되는 것이고, 우리가 혼자 본다고 해도 혼자 보지 않고 서로 더불어 보는 거니까요. 그렇게 해서 공심으로만 볼 수 있다면 불안(佛眼)이 되죠. 이 육안으로 보는 거는 그냥 우리가 지금 현실에 보는 거고 심안으로 보는 거는 마음으로 보는 거고, 그 경지가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차원을 모두 여러분은 모르고도 올라가야 되죠. 모르면서 올라가고 올라가면서 알게 되고, 또 살다 보면 알게 되고,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공부를 못하고 깨우치질 못했다고 ‘그거 우린 깨우치진 못해서 그걸 못해!’ 이러지 마시고, 그렇게 하시는 동시에 그게 안팎으로 벗어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모습도 벗어날 수 있는 거지만 돌아가신 영령들도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집안도 편안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살다 보면 남인데도 영령들이 ‘저 사람한테 가면 내가 세세생생을 아주 벗어날 텐데…’ 하고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면 꿈에도 보이고 그냥 그럽니다. 그러면 그거 얼른 응해 줘야죠. 응해 주고, 응해 주는 동시에 하다못해 법당에 와서 절이라도 서너 번 올리고 마지막으로는 주인공에다 다 합쳐서 둥글려서 그렇게 관하시면 아주 좋은 일인 것입니다.
내 마음 주인공 하나가 겨자씨라면 일체제불을 다, 일체제불도 각처 각급에 부처님 상이죠, 부처님의 모습이고. 그런 걸 다 이 가죽 속에다 넣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모시고 쫓아다니면서 받들고 그러지 않아도 될 수 있겠죠. 일체 중생들도 다 넣고. 둘이 아닌 까닭에요. 우리가 이 세상의 모두 일체를 몽땅 다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한 주먹 쥐어다가 넣어도 쥔 사이도 없고 넣은 사이도 없다. 그러면서도 넣어졌다. 또 꺼내서 풀어 줘도 풀어 준 사이가 없이 풀어 줬다.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며 보살의 법도입니다. 즉 공법의 도리인 것입니다.

외도가 되지 않으려면…

스님, 바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흔히 외도(外道)라고 하는데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외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진정한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어떤 이름에 팔린다거나 형상에 팔린다면 그것처럼 나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외도가 다른 게 외도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을 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미신적으로 돌리니까 미신인 것이지 내 마음이 미신이 아닌데 어찌 미신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기르십시오.
여러분 마음 속에는 바로 금강 같은, 즉 말하자면 태양 같은 마음의 그 빛이 충만하고 여여하고 아주 원만해서 항상 비추어 줄 수 있고 바깥으로나 안으로나 항상 여여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그 능력이 충만합니다. 광대무변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독 안에다 불을 켜 놓아서 바깥에 비치지 않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독 안에 불을 아무리 켜 놔 보십시오. 바깥으로 비치지 않는 불이 무슨 소용이 있나.
여러분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불은 다 켜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으로다가 코드를 꽂고 안으로다가 믿어야 될 텐데 바깥으로 믿는다 이겁니다. 왜 타의에서 구하고 바깥에서 구합니까? 좌선을 한다고 앉았기만 해서, 또는 경을 아무리 읽고 절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서 마음을 발견하고 터득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것도 또 아닙니다. 모든 일체를 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하는 그 자유성을 보장하라 이겁니다. 자유성을 보장하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내 마음의 부처를 믿으면서 거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불성의 에너지는 모두가 같이 돌아간다는 거, 무궁무진하다는 거, 원만하고 광대무변해서 언제든지 어느 때고 쓸 수 있다는 거, ‘이렇게 늠름하고 여여한 것을 왜 내가 바깥에서 구했을까?’ 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꼬박 앉아서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한다고, 그냥 꼬박 손을 꽂고 나 좀 잘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잘되는 게 아니에요.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면서도 똥을 누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내 마음 그 가운데에 있는 거기다 코드를 꽂으셔야 합니다. 참불성 자체는 꺼지거나 켜지거나 이런 게 없기 때문에 자가발전소라고 비유해도 됩니다. 그 자가발전소의 그 에너지는 무한량 나올 수 있는 에너지며 바로 밝은 달과 같고 해와 같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여여한 자부처의 그 늠름하고 여여함을 두고도 코드를 거기다 꽂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코드를 안에다 꽂으십시오. 그리고 이름은 아무 이름이라도 좋지만 “관세음보살!” 하고 이름을 부르면 벌써 바깥으로 이렇게 모시게 됩니다,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꼭 “주인공!” 이렇게 부르십시오. 그것도 이름입니다만 자기 안으로 “주인공! 당신은 여여하고 원만해서 뭐든 두루두루 삼천대천세계 우주를 다 비칠 수 있고, 여여하게 이 능력을 줄 수 있지 않아?” 하고선 안으로 들이대세요, 생활불교를 하시려면.
만날 남한테 빌고만 다니지 마시고 무슨 “잘되게 해 주십시오. 재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슨 삼살방이 들었으니깐 이렇게 해 주십시오. 또 어디가 막혔으니, 북쪽이 막혔으니 이사를 못 가겠는데 어디로 잘 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그런 미신이 어딨습니까? 이런 외도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데도 급급하고, 사랑을 하기에도 24시간 동안에 5분이고 10분이고 진정 사랑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쳇바퀴 돌듯 살아나가기도 어려운데 그것까지도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 여러분이 여러분대로 사람이 돼서 나오기도 어렵거늘, 사람이 돼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그냥 부적을 써서 붙여서 재수가 있게 한다, 아픈 것을 내보내기 위해서 부적을 붙인다, 관재구설이 없게 하기 위해서 부적을 붙인다, 이게 뭐 하는 짓들입니까? 자기 마음에 모든 일체만법이 다 있거늘 어찌 그런 행을 합니까? 모르고 그렇게 하겠지마는 그 모르고 하는 것을 알게끔 자기가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에 모르고 그런 망발적인 행위를 하게 되면, 즉 그 나쁜 행을 하는 것을 따라간다면 억겁을 거치면서 자기가 노력을 해 봤던들 이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윤회에 걸려서 항상 끄달리면서 그 삼계의 고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삼천대천세계의 우주 법계를 다 싸고도는 이 대표인으로서의 인간이 없다면 대표인이 못됩니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 그 법계가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진리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여러분의 근본인 그 마음의 주처가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상응하면서 이 정원을 꾸며 놓고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전체가 다, 지구덩어리 하나가 바로 우리들 집입니다, 안식처고. 그런데 단란하게 살고 여여하게 살지 못한 채, 남한테 이런 소리 듣고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린다면 갈대와 같은 거지 어디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깨달으면 이 지구덩어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법계가 다 내 한마음에 들어있다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될 겁니다.

사람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나

사람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인지요? 이 몸이 형성이 될 때 불의 기운이 많은 사람은 화를 잘 내고 물이 많은 사람은 물 같고 그렇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몸이 지수화풍이 뭉쳐서 된 거라고 하는 이치에 맞는 것인지요.

처음의 근본은 다 똑같은데 그 다음에 다 똑같지 않게 되는 게, 그것이 자기가 한 생을 살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 때에 속상하다고 그냥 남을 때리고 발길로 차고 또 물어뜯고, 예를 들어서 사람이 아닌 짐승의 모습일 때는 물어뜯고 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그것이 업이 된 거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화를 많이 낸 사람은 화가 조금 더하고, 마음이 비꼬아져서 울기도 잘하고 그래서 돌아서고 하는 사람은 물의 습기가 더 많고, 뚝심이 세고 남을 눌러서 잡아먹고 이렇게 한 사람들은 흙의 정기를 더 많이 가져서 그렇다 이러는데, 그것이 일일이 말로 하자면 그냥 너무나 복잡하고 많아요. 그래서 복잡하지 않게, 네 마음에 달려 있으니 마음으로 결정을 짓고 마음으로 해결하면 그냥 그 고(苦)와 집(集)은 없어지고 멸도(滅道)가 생긴다 이러는 거죠.
그래서 사람이 내가 선하고 내가 악하지 않으면, 그리고 부드럽게 말해 주면 다 돌게 돼 있어요. 근데 그거를 잘못했다고 또 그냥 뇌까리고 마음속에서 그러면 그쪽에서는 더 마음속에서 죽이 끓듯이 끓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인연이라고 그러는 것이 이런 게 왔다 갔다 이렇게 해서 서로서로 응하고 서로서로 이어진다 이겁니다. 고리 없는 고리가 이어지고, 그 모두가 이어지기 때문에 한 고리에 달려 있고 한 줄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모두 일체 중생이 다 말이에요. 그리고 다 똑같이 지수화풍으로 모습이 돼 있고 지수화풍을 또 먹고 살고 지수화풍으로 도로 헤어져서 간다 이겁니다.
태어날 땐 지수화풍으로 모이는데 죽을 때는 지수화풍이 헤어진단 얘기죠. 헤어져서 자기 본 고장으로 전부 찾아간다 이겁니다. 바람은 바람대로 바람으로 찾아가고 또 물은 물대로 찾아가고 불은 불대로 찾아가고 흙은 흙대로 찾아가고. 그래서 생겨날 때는 다시 인제 모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두가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이거는 절대로 안되는 일이다’ 이러죠, 왜? 사람의 법칙으로는 이런 걸 정말 할 수 없다 이렇게 되죠. 그럴 때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 즉 말하자면 ‘할 수 없다’는 없거든요, 거기에는. ‘안된다’도 없고 또 그 반면에 ‘된다’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가운데서 자유권을 얻는 거지 그렇지 않고 된다가 있고 안된다가 있으면 어떻게 자유권을 얻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격이 이러니 저러니 하기 이전에 지금 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잘 살펴서 지혜롭게 해나간다면 우리가 과거에 지어놓은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것을 해결하고 넘어갈 수가 있는 계기가 다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우글거리는 것 같아

스님, 저희 집안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이 제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자꾸 생기고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 안의 조상님들을 모두 천도시키고 저의 집안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딴 혹성을 보려고 한다면 가서 보는 사이도 없이, 들고 와서 보는 사이도 없이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 정신계의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 정신계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질계와 정신계가 혼합이 돼서 같이 수레가 돌아가듯 하니까 우리는 언제나 같이 둘 아니게 쓴다고 했습니다. 그런 거와 같습니다.
수차에 얘기를 드렸지만, 수억겁을 내려오면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엇갈리면서 나온 것이 우리들의 이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 년 전, 삼만 년 전이라도 그것은 내 부모였으니까, 내 자식이었으니까 이것이 오늘이란 말입니다, 오늘.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은, 공부를 할 때는 모습이 있어야만 부딪침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모습이 없으면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탑을 만들어서 조상들을 모시게 하는 것도, 모습이 없으니깐 그 탑에 모습을 두고선 모두 공부를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뜻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탑을 지금 가지고 다니니까 내 탑 속에다 다 넣어도, 이 세상 만법의 만 중생들, 만 부처님들, 이런 분들을 다 넣고 다녀도 손색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이 이치를 통틀어서 아시려면 이걸 따라서 둘 아니게 그냥 잡고 그렇게 해 가시면 그게 저절로 바탕이 되고 저절로 길이 터지고 저절로 그 길이 어느 길인가 알게 됩니다. 누가 나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에요. 남으로 인해서 내가 배우는 거죠.
악도 선도 둘이 아니다. 그럼 악은 악대로 악하게 구는데, 만약에 나한테 따귀를 때리고 악하게 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따귀 맞고 한 번 관해 주는 거죠, 뭐. 전자에 자기가 그 사람을 한 번 때려 줬으니깐 맞았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분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인연 없이 그렇게 오는 건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가 한 일이 없고 받은 일이 없다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남을 해하게 했으니까 나한테 해가 돌아오지 해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해한 일이 어떻게 돌아오겠습니까? 지금은 알게 모르게 그냥 정신을 뺏어가고 정신을 치고 그러니까 모습도 망가지고, 이렇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 사람도 자꾸 이렇게 관해 주면 그냥 바꿔져요. 그런 사람도 그렇게 해서 바꿔지니까 외려 미안해하고 그렇게 돌이켜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도 악한 대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선한 사람도 선한 대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악과 선을 다 놔라. 잘하는 것만이 선이라고 그러지만 잘하는 것만 있다면 나중에 잘못하는 것도 있다. 그러니깐 잘하는 거나 잘못하는 거나 다 놔라. 다 놓고 그 가운데서 너의 결정을 해라. 그 가운데서 너의 결정을 하되 항상 중심을 두고 중도를 택해라. 남을 해치지도 말고 나를 해치지도 말고, 또 일체 부처를 원망하지도 말고, 일체 조상들을 원망하지도 말고.’ 그러는 겁니다.
부모님이 잘못 돌아가셨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힘들게 죽었다거나 6·25때 죽은 그런 사람들, 물에 빠져 죽었다든가 목을 매서 죽었다든가 이런 분들도 그냥 아무리 어렵게 살았고 아무리 악하게 살았고 잘못하고 살았고 그래도 이것이 그냥 무효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 속에서 우글거리고 집안에 외려 더 문제가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주인공 자리에다 모든 거를 넣으면 그냥 바꿔지는 거죠. 이해가 됩니까? 이게 이해가 돼야 여러분이 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연등불의 의미는?

삼세의 부처님이라고 하면, 현재불인 석가모니불과 과거불인 연등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통념적으로 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직접 현세에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셨고 미륵불은 우리가 추구해 가야할 궁극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과거불인 연등불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연등불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자불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자기의 부처님이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불의 연등이라는 뜻은 그렇게 초를 태우듯이 자기를 태움으로써 그 불을 더불어 같이 밝혔으니 연등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연등부처가 ‘너는 모두를 종합해서 너는 석가모니가 돼라.’ 했던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더러 그런 거니까 주고받은 사이가 없죠. 그래서 우리가 항상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연등을 밝히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이 동시에 둘이 아니라는 뜻을 연등으로 표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들의 근본, 그 근본이 불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죠. “불성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라. 물러서지 말라. 불성이 없다면 송장이 된다.” 초가 없어도 불이 없고 불이 없어도 초가 없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없어도 불성이 없고 불성이 없어도 몸이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이 있는 줄 알라. 알면 그냥 믿고, 그렇게 일거수일투족 다 그놈이, 불성이 하는 것이라고 믿고 거기 놔라. 그러면 몸과 그 불성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에 그게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항상 ‘모자라는 게 많아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만약에 모자라는 게 없다면 갖출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모자라는 거 잘하는 거, 악한 거 선한 거, 긴 거 짧은 거, 못난 거 잘난 거, 잘사는 거 못사는 거, 어려운 거 어렵지 않은 거 모두가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부처의 몸이라고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니라. 너희들과 똑같이 아프고 너희들과 같이 똑같은 모습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넉넉하게 어려움이 없이 그냥 걷는 걸음과 모르고 그냥 아이구! 하면서 발을 동동거리면서 걷는 걸음과는 다르겠죠. 부처님께서는 이 도리를 바로 일대사의 인연으로 둘 아니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몇만 년 전으로도 갈 수 있고 몇만 년 후로도 갈 수 있고 현재로도 항상 계시면서 너다 나다 할 것도 없이 영원한 것입니다.

깨친 사람과 나와의 차이

이 마음의 도리는 무궁무진해서 어떤 걸로도 다 활용하여 쓸 수가 있다고 하는데, 막상 해 보면 자기가 아는 분야나 자기가 해 본 일 말고는 그렇게 생각의 영역이 넓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깨치신 분들과 우리 범부 중생들의 마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처음 1년간은 공통으로 하는 수업을 하게 됩니다, 똑같이들 공부합니다. 어느 과를 막론하고 똑같이 공부를 하는데, 우리도 지금 어떠한 한 계단을 잡을 때까지는 똑같이 공부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1년은 다 똑같이 공부를 하는데, 예를 들어서 내가 과학을 전공했다 한다면 과학으로 전진을 해서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과학으로 갑니다. 그런데 철학으로 가는 사람은 철학으로 가고 공업으로 가는 사람은 공업으로 가고, 정치학으로 가는 사람은 정치학으로 가고, 그래서 의학으로 가는 사람은 의학으로 가고 이렇게, 1년은 똑같이 배우고 난 뒤에 그렇게 갑니다, 자기 전공대로.
그런데 그 전공대로만 그렇게 가는 그 도(道)는 부분적인 도고, 전체적인 도가 바로 선지식들이 공부하신 그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거든지 그 칼 하나만 가지면, 어떤 거든지 할 수 있는 공부입니다, 지금.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을 그렇게 넓히느냐 좁히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만 전공해. 이런 걸로 전공을 해 나가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면 고 부분 내에서만 그 칼은 쓰여집니다. 이 생각이 넓혀지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거만 전공을 했으니까.
그러나 이 칼은 여기에도 쓰고 저기에도 쓰고 다 다양하게 이 우주를 싸고 내가 운행을 할 수 있구나. 이것은 바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것이구나. 바가지로 담으면 한 바가지가 돼서 하나가 되고 엎으면 바로 전체를 덮고, 제껴서 돌리면 담을 수도 있고 쏟을 수도 있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무궁무진한 내 활용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며 그대로 무궁무진한 것이며 그대로 삼천대천세계를 한생각에 녹일 수도 있고 한생각에 그 삼천대천세계의 그 업덩어리를 질 수도 있는 겁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참 묘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는 소리죠.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가지고 전공을 했다면 과학의 도(道)고, 도 아닌 게 없으나 전체적인 걸 가지고 나툴 때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그럴 때, 내가 과학으로써 뭔 일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면 과학자로서 나투고, 철학자로서 나투고, 공업으로 나투고, 정치로 나투고, 이거는 의학으로 나투고 이렇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 할 때에 나라고 세울 수가 없는 그 자체가 바로 열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평생을 설법을 하셨지만 마지막에 “난 한 마디도 안 했노라.” 고 말씀하신 게 바로 그겁니다, 나투니까. 때에 따라서는 이거를 하고 때에 따라선 저걸 하고, 때에 따라선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이렇게 자꾸 나투면서 돌아가니까,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평등 공(空)으로서의 나툼이죠. 그래서 이름해서 열반이라고 하면서 사생자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큰 전체를 껴잡고 가는 공부나, 그거 하나만 껴잡고 가는 공부나 공부하는 건 똑같습니다마는 생각을 넓히느냐 좁히느냐에 달려있는 겁니다. 즉 마음으로서의 지혜를 넓히느냐 좁히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똑같은 공부를 했으나 이 칼 아닌 칼이 아무 데고 다 쓰여진다는 거를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이 칼은 칼이 아니라, 칼이라고만 말을 할 수도 없고 나무때기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이건 빗자루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깐 한 바가지로 표현을 하기도 했고 일산으로 표현을 하기도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칼이, 나중에는 그 칼이 우뚝선 것만 칼이 아니라 이게 전체 둥글려진 이 자체가 바로 그대로 공(空)이 돼 버리고 마는 거죠. 그 공은 공대로 때에 따라선 칼이 될 수도 있고 주장자가 될 수 있는 거죠? 작대기가 될 수 있고 물이 될 수 있고 불이 될 수 있고 바람이 될 수 있고, 때로는 공기가 될 수도 있고 산소도 될 수 있고, 여러분이 다 될 수 있는 겁니다. 어떠한 생명이라도 다 나툴 수가 있고 그랬을 때에 비로소 그것이 나툼이라고 하고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도리는 자기가, 그것도 이름해서 깨쳐보지 않으면 맛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방미인이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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