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를 버린다면 일천만 가지가 다 잠을 자고 쉬게 됩니다
요새 날씨도 추워지는데 여러분 가정이 항상 건강하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라는 것을 진정코 깨닫는다면 정말이지 여러분 가정에도 모두 행복이 깃들 것을….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첨단을 간파하는 공부입니다. 조그만 것부터 큰 것까지 절대로 놓치지 마시고 실험하고 체험하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냥 왔다 갔다, 나를 버리지 않고 왔다 갔다만 하신다면 그 공부는 간파를 못합니다.
나 하나를 버린다면 일천만 가지가 다 잠을 잡니다. 쉬게 됩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됩니다. 내가 살 양으로 하고, 내가 ‘나’라고 항상 생각하는 그 물질세계에서의 관념을 가졌기 때문에 죽질 못하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은 몸이 죽으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데에 순응하고 놓으라는 얘기죠. 물이 흘러가는데 거꾸로 흘러가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물이 흘러가다가 큰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흘러내리고 있죠? 또 많은 비가 와서 한데 모여 흐르듯이 어떠한 문제든지 닥쳐오는 그 애고(哀苦)를, 모든 것을 한데 모아서 흘리게 되면 바다로 들게 돼 있죠. 그 바다에서는 더럽고 깨끗한 게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는 게 없이 가라앉으면 그대로 맑습니다.
그러니까 인생길을 허무하다고 하지 마시고 항상, 허무한 건 없다고 생각하셔야죠. 사실이 그러니깐요. 항상 말하듯이 우리 몸뚱이는 장갑 끼었다가 벗는 거와 같고, 우리 마음의 근본은 장갑 끼는 손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갑이 이러니저러니 이러니저러니 하고 논의할 것이 못 되죠. 될 수 있으면 여러분에게 애고와 병고와 가난과 질환이 없고 평탄하게 한마음으로써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신다면 내 마음도 아프지 않고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뭐든 잘못되고 잘되는 것은 여러분 마음에 달려 있고, 또 잘되고 못되는 것을 겸해서 알아야 같이 작용을 할 때에 빛이 일어나는 겁니다. 부딪침이 없다면 빛도 없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해서 빛이 있도록 하시는 것이 제 마음이나 여러분의 마음이나 아마 똑같을 겁니다. 공생 공용으로써 공심으로써 돌아갈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종교를 믿는다고, 이 종교 저 종교 모두 믿는다고는 합니다마는 종교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불교라는 것,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에 매여서 애를 쓸 필요가 없고, 어느 국한된 종교에 끄달리지 마시고, 어느 종교를 가졌든 그건 이름일 뿐이요, 여러분의 상상력이란 말입니다.
나는 종교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여러분이 그렇게 고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에 진정코 아픕니다. 내 마음은 속일 수 없겠죠. 양심은 속일 수 없겠죠. 내 양심을 속인다면 우주법계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모두 여러분을 위한다는 것은, 행동과 말과 그 뿌리가 성실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익이 갈 수가 없고 이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생각하셔서 종교라는 이름을 떨쳐버리세요. 불교라는 이름도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 내용에 들어가서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란 얘깁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어서 일체가 다 같이 공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고에 휘달리고, 요새는 학교 가는 자녀들 때문에 모두 애를 쓰고 있는데 거기에 한마음의 손길이 가야만이 된다는 겁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들도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거, 이거는 잊지 마십시오. 개별적인 손이 가서는 절대로 모두가 불리합니다. 포괄적인 한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공덕이라고 하는 거죠. 공덕의 한 손길이 미쳐야만 여러분한테 이익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한테 진실된 내용만 얘기했지 간접적으로 재밌는 얘기를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재밌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한테 속속들이 이를 테니 배우시려면 질문도 하십시오. 질문을 안 해야 될 일도 있지만 함이 없이 하십시오. 왜냐하면 걸어오는 길 자체에 발자취를 담아가지고 옵니까? 말씀도 담아가지고 있지 말고 하십시오. 걸음 걸어오면서 발자취를 담지 않듯이 말씀하시는 것도 질문하시는 것도 담지 말고 질문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 소생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육신이 떨어지면 더 이상 공부할 수 없고, 그냥 몸 떨어질 때의 업식에 따라 윤회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천도란 무엇인가요? 육신이 떨어진 중생을 어떻게 제도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마음이 보입디까?
▲질문자1: 아직까지 안 보이고 있습니다.
▲스님: 마음이 보이지 않듯이 육신이 떨어진다고 해서 마음 자체의 그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원의 근본은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됩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내세에 다시금 그 입력된 게 나오는 것이고 과거에 입력된 것이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공(空)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여러분 몸속에 악업 선업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업 선업의 그 의식들은 잘되고 못되고를 모릅니다. 사람의 생각이, 거기까지 다스리는 생각이 미쳐야만이 그게 따라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입력된 것을 현실에 입력을 다시 한다면 과거의 업장이 다 무너져서 안팎을 잘 검토하고 파악할 수 있어서 실천을 해나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는 얘깁니다.
체가 없는 마음의 의식이 물질계의 관습에 의해서 죽어도 자기가 몸뚱이가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고도 또 체가 없으면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체가 없어진 뒤에는 차원에 따라서 윤회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바로 비가 한데 모이면 개울물이 되듯이 그런 것이 윤회라고 합니다. 그럼 마음이 차원에 따라서 체가 없으니까 자기가 체가 없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생시 때 마음은 체가 없다는 걸 알아야 될 텐데 그걸 모르고 산 사람은 자기가 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면 죽어서 영혼이 발자취를 옮기려면 악업·선업의 그 애고에 의해서 전부, 크고 작은 것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에 한 발짝도 에누리 없이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또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갈래도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알고, 빠져 죽을까봐 못 건너가고 불에 타 죽을까봐 못 들어가고 이럭하니까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천도라는 게 생긴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친구가 죽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 친구가 개구리 소굴로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탁 막고서 “너,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고 악을 벽력같이 써도 그 영혼만이 듣는 말이죠. 그래도 이 생시의 사람들은 못 듣겠죠. 그래서 악을 쓰니까, “이 집이 2층, 3층으로 된 기와집이라서 좋기 때문에 들어간다.” 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타고난다면 다시 모습을 바꾸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개구리 소굴로 들어가서 개구리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 모습 속에서, 그 환경 속에서 살아서 그냥 머리에 젖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 환생하기는 극히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을 해드렸으면 좋겠는데 간단하게 그냥 어줍지 않게 말을 하면은 또 알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깁니다.
▲질문자2: 스님께 여러 번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께 법을 구한 제자들 가운데 지통이라는 스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이 스님이 법을 구한 뒤에 지은 게송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행을 일으킴은 모두가 망동이요, 머물러 지킨다 해도 또한 참이 아니라.” 하셨는데 어떠한 경지를 일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이리 오십시오. 가르쳐드릴 테니까. (질문자에게 손짓을 하시며) 이리 오세요, 가르쳐드릴 테니까요. 이리 오세요. 아, 가르침을 받으려면 이리로 와야죠. 손 내미세요. (오른손으로 질문자가 내민 손바닥을 ‘딱!’ 소리나게 치시고 질문자가 합장을 하자 답례로 합장하시며) 가르쳐드렸는데 또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2: 지금 질문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3: 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시는 책도 보고 나름대로 공부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사무(四無) 사유(四有)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고요. 또 이렇게 제 아이가 축농증이 상당히 심한데 다른 사람은 뭐 신문을 5분도 못 보고 앉지도 못하고 서도 못하고 이런 신도가 있었는데, 제가 그 집을 가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그 순간부터 그분은 평상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하고 2시간도 이야기를 하고, 그 뒤로 제가 전화를 자주 드렸더니 지금은 상당히 다 좋아졌다고 하던데 저의 아이의 일은 해결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그런 문제점은 무엇인가 의문도 나고요.
또 저에게 신도님들이 극락이 어디 있냐고 가끔 묻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저도 스님께 배운 대로 “네 마음 안에 극락이 있다. 평상시에 편안한 마음으로 항상 산 사람이 죽어서도 극락을 간다.” 아, 그러면 “극락을 간다는데 어디냐?” 이렇게 물어요.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범천세계(梵天世界) 저쪽 어디에 극락이 있다고 그렇게 써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혼동이 됩니다. 이 마음이 편안할 때 극락이라고 했는데 또 우리 우주법계를 벗어나는 어느 곳에 극락이 있다면 제가 과연 어떻게 그 사람들한테 대답을 해야 될지, 제가 조금 더 절에를 다녔다는 신도로서 확신이 서지 않아가지고 어떻게 대할지 상당히 망설여지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래서 스님께 이렇게 감히 법을 여쭙니다.
▲스님: 보살님, 가만히 보니까 대답 잘해주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질문자3: 저 자신도 그걸 잘 모르겠고요.
▲스님: 자신을 모르니깐 대답도 못하죠.
▲질문자3: 예.
▲스님: 자신을 모르고 어떻게 남에게 대답을 함부로 해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범천(梵天)에 있다고 그랬습니까?
▲질문자3: 아, 범천(梵天)세상이 있다고 어느 책에 보니깐요, 쓰여져 있어요.
▲스님: 범천(梵天)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지옥도 있고, 이 세상에 바로 범천도 있고, 또 천당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모두 보세요. 일을 잘못해서 붙잡혀가질 않나, 마음에 죄를 가지고서 사는 사람은 마음의 지옥에서 살지를 않나, 또 마음에서 벗어나서 활달하게 사는, 천당에서 사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잘못하지 않아서 몸으로 또 받지 않으니 천당이요, 모두가 천당 지옥이 딴 데 있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거지요.
▲질문자3: 그런데 죄송합니다마는 아까 말씀하셨듯이 그러면 사람이 죽어가지고 물을 못 건너고, 블랙홀이라는 그걸 통과를 못하고 또 영원히 통과를 못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것인지요?
▲스님: 아, 못하면 못하는 대로 또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겠죠. 보세요. 넝마는 넝마대로 출현을 하고, 헌 무쇠는 무쇠대로 출현을 해서 끼리끼리 모입니다. 또는 물건이 새로 나왔으면 나쁘든지 좋든지 새로 나온 물건으로 또 나옵니다. 연방 바뀌어서 돌아갑니다, 가공돼서 말이에요. 그와 같습니다.
또 아까 딴 사람은 다들 잘 낫는데 왜 내 집 애는 안 낫느냐고 그랬는데 나부터 한번 검토해보세요. 내 아이에게 관하는 도리를 일러주었나. 그릇을 들어야 얻어먹더라도 담아주죠. 마음이, 믿는 마음이 소상히 밝혀져야 그게 즉각적으로 들어가죠. 오래되고 온 지가 얼마 안 되고는 문제가 안됩니다. 겉으로 끄달리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지 겉으로 끄달리지 않는 데는 그런 문제가 안 생깁니다. 그것을 알려면 어서 하루속히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내 안으로 모두 놓을 수 있게끔 작업을 하십시오. 사무사유(四無四有)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50%, 보이는 세계의 50%를 사무사유라고 합니다.
▲질문자3: 그런데 저 아이는, 제가 스님한테서 배운 주인공에 관하는 도리를 얘기를 해가지고 스님을 꿈에서도 뵙고 또 굉장히 관하는 도리를 믿고 있는데도 그게 잘 안되고 있거든요.
▲스님: 그래도 잘못돼서 그렇죠. 수박 겉만 핥듯이 그렇게 핥아서 수박 속 맛을 알겠습니까?
▲질문자4: 오래 다녀도 스님 앞에 직접 와서 질문드리는 게 오늘 처음입니다. 스님 법문 중에 부(父)와 자(子)는 원래 둘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둘이 아닌 부와 자가 만나기는 만나야 되겠는데, 백지 한 장 차이로 만나기가 어렵다고 늘 일러주셨는데요. 그 백지 한 장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 법문 좀….
▲스님: 즉 말하자면 영원한 근본의 그 마음이 현실의 나를 진화시켜서 끌고 가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 자체는 그 테두리는 부가 되고, 즉 마음내기 이전을 말합니다. 마음내는 것은 자가 되고, 마음내기 이전은 부가 됩니다. 전력은 부가 되고 이 들어오는 전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전력은 부가 되고 이 전구에 불 들어오는 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구에 불 들어오는 거와 전력과 둘입니까, 어디? 둘이 아니죠. 전구가 없어도 안 되고 전력이 없어도 안 되죠. 그 가운데 가설이 되지 않아도 안 돼요. 찾는 마음이 없어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삼합이 한데 합쳐져야만이 무난히 돌아갑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전구 자체가 바로 전력을 알아야 이게 상통한다는 얘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나를 끌고 다니는 나가 과거뿐이 아니라 현실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을 겁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내가 없으면, 부모한테 몸을 받았어도 영원한 내가 없으면 거기에 삼합이 한데 합쳐지지를 않아서 태어나질 못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대로 업대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인연이 돼서 만남이 뭉쳐지는 거는 바로 이 몸속에 들은 의식들입니다, 생명들, 모습들이죠. 그러니까 부와 자가 둘이 아닌 줄 알아야,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자기가 온 데가 어딘지, 가는 데가 어딘지, 지금 하고 있는 자리가 어딘지 그것을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하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아야만이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질문자5: 저는 여기 처음 왔는데 하도 이 몸뚱이 아랫도리가 아프고 해서 스님께 한번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친구애가 자꾸 여기를 가보라고 해서 오늘 참 처음 여기를 왔는데 살려주는 셈 잡고 한번 좀 알아주세요, 왜 이렇게 아픈지요.
▲스님: 살려주는 셈 잡고요? 하하하. (대중 웃음) 어디가 아프신데요?
▲질문자5: 요기서 요기 아랫도리, 궁뎅이 요기가 아파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아주 죽겠어요 그냥.
▲스님: 나는 의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마음공부를 수행을 해나가면은 그 병 붙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병도 자세히 얘기하자면 몸속에 들은 의식들이 전부 모르니까 내 마음 쓰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럼으로써 악취적인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문제가 생긴다는 얘깁니다. 댁에서 믿는 마음이 출중하다면 역시 나하고도 마음이 둘이 아니요, 일체제불과도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의 그 손길이 간다면 금방 괜찮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공부를 못하게 되면 그 병만 낫지, 도로 어떠한 일이 닥쳐도 그것은 해결을 못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질문자6: 저는 광주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왔습니다. 스님을 아미타불로 생각해가지고 여기가 극락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 쓰레기를 어떻게 쓸어내야 하는 것인가 질문하고자 합니다.
▲스님: 극락세계가 따로 없다고 말씀드렸죠. 마음먹기에 달렸다, 간단한 표현이지만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는 이치가 참, 마음 하나가 때에 따라서는 법이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황천길을 갈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극락으로 갈 수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부처님께서 한생각을 내시니 아촉불도 될 수 있고 아미타도 될 수 있고, 즉 동방에 아촉이요, 서방에 아미타요, 세상에 관세음이요, 또 지천국(地天國)에는 지장보살이요. 이렇게 마음으로 내는 것이지, 그건 이름이지 한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모든 것을 내 마음 속에 같이 뭉쳐놓으면서 공부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저 한마음의 주인공, 여기에서만이 나의 몸을 이끌어줄 수 있고, 나의 죽음도 그냥 익지 않은 콩깍지 까듯 아프게 하지 말고 익은 콩깍지가 툭 터지듯이 되도록 믿어보십시오. 진짜로 거기서만이 나를 아프지 않고 죽게 만들 수도 있고,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고, 내생에도 진화해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도 할 수 있고, 자재천에 갈 수도 있고 하니까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질문자6: 지난달에 여기 다녀갔습니다. 다녀간 뒤로는 우리 자식들이 전부 모두 다 극락세계가 되었습니다.
▲스님: 하하하. 자식들이 극락세계 됐습니까? 예. 그러면 감사합니다. (합장하심)
▲질문자6: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맡겨버리니까, 머리가 가쁜해지고.
▲스님: 너무 집착을 하고 맡기지 마세요. 그냥 그대로 맡겨진 겁니다. 우리 살림살이 하는 거 그대로 일체 만법이 다,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없을 거 아닙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나로 인해서 들이고 내고 상대성 원리로써 돌아가는 거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턱 놓으시고 턱 믿고 그냥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네놈이 있으니깐 나를 이렇게 움죽거리게 하지.” 이렇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질문자6: 감사합니다.
▲질문자7: 이렇게 질문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꼭 질문도 질문이지만 이 질문하는 것도 공부려니 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먼저 재가자로서 현실의 노동을 기피하고 그 다음에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힘든 일을 싫어합니다. 그런 쪽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주십시오.
▲스님: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받아야 할 것은 받아야 하겠지. 그리고 또 가는 거 일부러 잡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지. 그러니까 언제나 진리에 순응하면서 우리가 마음을 턱 놓고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여여하게 말이야.
▲질문자7: 부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스님: 중생이 만들었겠지.
▲질문자7: 마음은 내는 겁니까? 나는 겁니까?
▲스님: 내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니야.
▲질문자7: 흔히 나를 없다고 말합니다. 없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스님: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거지. 아까도 얘기했잖어? 발자취를 거둬가지고 왔느냐고. 한 발짝 한 발짝 뗄 때에 한 발짝 떼어놨으니까 ‘한 발짝 떼어놨으니까’ 이러고 걷나? 무심으로 그냥 걸어왔지. 그 말도 역시 그렇지 않어? 고정된 것도 없고 말이야.
▲질문자7: 감사합니다.
▲질문자8: 전에 법형제에서 제가 질문을 한 번 드린 적이 있는데요. 하나하나 오는 경계가 있을 때에 주인공에게 맡겨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고 또 갑자기 많은 경계가 밀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제 자신이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질문을 드려서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어서 또 제가 가는 길에 어려웠던 모든 일들을 해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다시 뵙는데요. 그래 감사한 마음을 갖다 보니까, 감사한 마음도 주인공 자리에 다시 놓습니다마는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라도 주인공 자리에 회향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데 회향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몰라서 스님께 회향의 도리가 어떤 것이며 회향의 공덕은 어떤 것인지 여쭙고 싶어서 앞에 나왔습니다.
▲스님: 항상 하시고 회향하시고, 항상 하시고 회향하시고 이러고 가는데 무슨 회향이 따로 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써 지켜나간다면은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회향이 아니겠습니까?
▲질문자8: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