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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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현재의 삶 못 받아들이는 자의 ‘변명’
판도라 상자 집착말고 ‘無願’ 추구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욕망에 의해 발현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가능하게 하고 또 이루고 있는 것은 욕망(慾望) 그 자체인 것이다. 화엄의 장엄한 세계는 결코 욕망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에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것도 우리의 욕망이었고, 특히 집착하는 욕망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면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關係)이다. 관계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욕망이란 있지 않다. 우리가 고정된 실체 없이 단지 관계의 결과로서 욕망의 모습으로 나타남을 알아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고통은 없어질 것이고, 주어진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삶에 감사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고, 종종 희망(希望)을 이야기 한다. 힘든 세상에 희망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지만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불자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희망이란 말은 참으로 잔인한 말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라는 꿈속에 살며 현재를 죽이고 있는 이들의 변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공부 하는 이들은 희망에 속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자리에 살아야한다.
서양에 판도라 상자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의 모든 악(惡)을 담아둔 판도라의 상자 마지막에 그나마 있었던 것이 희망이라고. 그래서 이 힘든 세상 속에서 희망으로 인간의 삶은 가능하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희망이 얼마나 인간을 기만하고 진정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면 모든 악을 담아둔 판도라 상자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담겨져 있었을까 한다.
그렇기에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살지 못하게 하는 희망의 반대말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바램(望)이 끊어진 상태인 절망(絶望)이 아니라, 바라는 바가 없는 무망(無望)이다. 이 무망을 불교적 용어로 다시 말한다면 보살이 성취해야하는 무원(無願)인 것이다.
마음 공부하는 이들은 희망 속에 그 무엇을 바랄 때 결코 얻지 못하리니 철저히 절망하여 무원(無願)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선(禪)이란 집착하는 욕망에 대하여 끊임없는 절망(絶望)이란 형태로 무망(無望)을 이루어 욕망을 욕망 그대로 진정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도반들은 결코 희망에 속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 살아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 철저하게 마음을 내어 욕망에 충실하되 단지 머무르지는 말라는 금강경 한 구절이 그대로 우리의 본 모습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선(禪)의 요점이 되니, 오직 주어진 일상의 삶을 수용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아 고통의 원인이 되는 나의 헛된 눈과 귀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이켜야 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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