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고 내는 구멍은 한 구멍밖에 없어
눈 뜨고 푹 자려면…
문
매번 감로법문을 청하오니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고 한편으로는 무거운 보은의 빚이 쌓여 가는 듯 조심스럽습니다. 스님 말씀 중에 ‘두 눈 뜨고 푹 자라’는 말씀이 있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저의 생각에 그 말씀의 뜻은 아상을 녹여서 내가 무엇을 했다는 상,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상도 다 녹이고, 너와 내가 한 몸으로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눈 뜨고 푹 자는 단계를 넘어선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수행으로 한 발 한 발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급히 질문을 올립니다.
답
눈 감고 자는 거는 자는 게 아니지요. 눈을 뜨고 자야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게 되는 거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계산해도 아니 됩니다. 그건 그런 거지요. 그래서 속으로 똑똑하더라도 겉으로는 좀 무식한 척하고 둔한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어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요. 머리로 다 알아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보는 거 듣는 거 거기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요. 그 자리를 통해서 자기한테 전부 오는 게 있는데,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요?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못난 내 탓이란 말입니다.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에요.
내 탓이라는 그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 가정에서도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에 언짢은 일이 있다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을 이익하게, 마음 상하지 않게 말을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야 하고 안에다 놔야 된다 이거예요. 모든 걸 내공(內空)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돼요.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야 돼요, 그 자리에. 그렇지 않고 내가 나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는 것을요. 말로만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을 해봐야 진정한 뜻을 감지하리라 믿습니다.
집중하는 것과 놓는 것에 대해서
문
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으라고 하시는데, 어떤 스님께서는 지나가는 모든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라 하십니다. 그 하나가 ‘나무아미타불’일 때, 자나 깨나 염불하는 것과 놓고 관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답
그래서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드리는 거는 ‘나를 찾는 게 아니다. 말하고 보고 듣고 하는 놈이 바로 그놈이니까 나를 찾는 게 아니라 거기에 오로지 몰입해서 놔라.’ 이런 겁니다. ‘오로지 거기에다 몰입해서 놔라.’ 놓는 작업을 하게 되면 우리가 스스로 들고 나는 것이 그대로…. 들고 남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예를 들어 “아버지!” 하면 그대로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들어오고 스스로 또 내는 거죠. 그렇게 여여하게 작용을 하죠.
그런데 우리가 공했기 때문에, 『반야심경』에 ‘고정됨이 없이’라고 이렇게 했죠? ‘고정됨이 없어서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다.’라고 했습니다. 고정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보고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차를 타는 거, 시발점이 종점이고 종점이 시발점인 거, 이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로 한군데서, 한군데라고도 할 수 없는 데서,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데서 그 모두가 나온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여여하게 나고 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깨우쳤든 안 깨우쳤든 우리가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찰나찰나 지나가 버리죠. 찰나찰나 가 버리고 또 듣게 되고 찰나에 가 버리고 또 듣게 되고…. 남편이 되었다가 그건 돌아가 버리고 아버지가 되고, 또 아버지는 돌아가 버리고 아들이 되고, 이렇게 자꾸자꾸 돌아가니까 공했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찰나찰나 돌아가고 공해서, 색이 공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공이 즉 색이다.
그러니까 그냥 찰나찰나 쉬지 않고 돌아갈 뿐이니 함이 없이 그냥 공해 버렸다. 그래서 각자 여러분이 함이 없이 이렇게 하고 있고 사는 게 없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탤런트가 연기를 할 때 죽는 역할을 해도 그 역할이 끝나면 여전히 살아 있듯이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원래 모자라지 않게 자리를 잡고 계신데도 어떤 분은 자리를 잡고 계신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자리를 잡고 한 발짝 한 발짝 떼 놓고 가시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상당히 실천하기가 어려운데, 그냥 실천하는 것이 그대로 뛰는 거예요. 그건 자기가 스스로 알아져야 되겠죠.
나를 이끌어 가는 선장은 나한테 있습니다, 모두. 그렇기 때문에 그 선장하고 나하고 상봉을 해야만 자리가 잡히는데 그 전에는 자꾸 놓고 몰입해야 완벽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얘기죠. 그리고 스스로 실천을 옮기게 되죠. 조그만 거든 큰 거든 실천을 옮기는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고 봅니다. 어쩌다 한 번 실천을 하게 되고 어쩌다 한 번 느끼게 되고 그러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벌써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차차 그럭하다 보면 문이 활짝 열리게끔 돼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인간으로서 참답게 살아가려면…
문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 인간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인생의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답
우리 인생이란 지수화풍으로부터 우리 몸을 형성시켜서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나중에는 지수화풍으로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은 지수화풍으로 가공된 물주머니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속 생물이 물속에서 벗어나면 못 살듯이 그렇게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지금 현재 상황입니다. 또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실에 여러분이 모두 자기 몸뚱이 속의 생명들로서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 몸뚱이 속의 생명들은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연쇄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우리들 몸뚱이에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느냐.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성이라든가 영계성 세균성 업보성, 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서 내 영혼과 더불어 정자 난자를 비롯해서 같이 형성된 것입니다. 형성됐다는 이 자체를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불가에서는 이름해서 오신통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천이 천안 신족 숙명 타심, 이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종합해서 현재의 말로 한다면 자동적인 컴퓨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왜냐. 우리가 차원에 따라서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을 바로 불기둥이라고 이름한다면 땅을 딛고 하늘을 꿰고 불기둥이 서 있는데 수레가 불기둥을 싸서 돌고 있어요. 이 기둥이 가운데 섰고 그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게 우리 생활이에요, 모두가. 우리 생활인데 그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항상 그 근본 기둥, 그 자체에 부합이 돼야만이 오신통에서, 그 수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아까 용어를 변경해서 오신통을 자동적인 컴퓨터라고 그랬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됐다가, 영계성이니 뭐니 모두가 지금 솔솔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벗어나게 하려면, 그 나오는 구멍에다 다시 입력을 해야만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면서 새로이 들어가는 대로 되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만이 여러분이 알아듣기 쉬울까 해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오신통 자체가 컴퓨터라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컴퓨터에 입력이 돼 있던 것이 현실에 자꾸 나오니까 그 구멍에다가 다시 일임해 놓는다면 입력이 다시 돼서 앞서의 입력이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털구멍이라고 했어요. 그것도 방편으로 말입니다. 한 털구멍의 들이고 냄이 그렇게 광대하다고 그랬어요. 털구멍이라고 하는 것은 털구멍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들이고 내는 것은 단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들이고 내는 구멍은 한 구멍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다 들이고 낼 때에 진정코 의심을 하지 말고 ‘나를 이끌어 나가고 형성시킨 주인이 바로 나의 마음 가운데의 선장이로구나. 나의 뿌리로구나. 내 몸이 싹이라면 나의 근본 뿌리는 바로 나의 주인이로구나.’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세요. 진정코 내가 움죽거리고 보고 듣고 가고 오고 말하고 하는 일거일동이 바로 그놈으로 인해서 움죽거린다고 생각할 때 진짜 믿고 거기다가 맡겨 놓을 수 있는 겁니다. 그거를 진짜 맡겨 놓고 있을 때에 통신이 돼서 생명의 의식들이 전부 작용을 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모습과 생명이 의식을 가지고 이 몸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걸 큰 혹성이라고 해도 되고 별성이라고 해도 되고 큰 회사라고 해도 됩니다. 이걸 국토라고 해도 됩니다. 이 국토에서 모든 자생중생들이 살고 있는데 신호가 가면, 내 마음에서 통신이 가면 벌써 대뇌를 통해서 중뇌를 통해서 책정이 돼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사대로 통신이 되면 모든 생명체의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공장장들이 전부 작용을 하게끔 합니다.
이것은 심성의학이기도 하지만 심성과학이기도 합니다. 이름만 거창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천이 문제입니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잘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하면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그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신호가 가서 내 한생각에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따라 줄 수 있다면 바로 더불어 같이 공존하는 겁니다. 즉 시쳇말로 한다면 원자 속에서 분자로 인하여 입자가 돼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이고 내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응신이 되신단 말입니다.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자생중생들에게 안과 밖을 조복받게 되면 부처님 국토에서 낱낱이 보살로 화해서 헤아릴 수 없이 나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 정신세계 50%를 아주 망각하면서 모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걸려서 돌아갑니다. 50%와 50%가 같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여여하게 돌아가며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고 물리가 터지고, 아주 마음이 천 리를 가도 간 사이가 없고 와도 온 사이가 없이 모두가 이렇게 될 수 있으련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면서도 “가고 오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보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아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듣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네가 어디서 나온 줄 아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그러셨어요. 과학적으로는 그릇이 얼마만하고 물이 얼마나 담겼다는 것을 알아내는 거지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뜻은 이것을 보기만 하는 건 도가 아니다 이런 겁니다. 있는 줄 알면서도 이거를 갖다 먹지 못한다면 이건 도가 아니다 이거지요. 남이 목마를 때 줄 수 있고 내가 목마를 때 먹을 수 있어야만이, 그것도 이름해서 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수행자로서의 마음 자세
문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 깨달음의 세계가 밝고 맑아서 너무나 환희롭고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서원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단 순간에 깨달음의 세계에 다다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세속에 살면서 생활 속에서 수행해 나가는 저희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기 위한 수행자로서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아주 추운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다가 봄이 오면 활동하기가 좀 유하시죠? 그래서 마음의 봄이 와야 살기에 좀 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배우는 데 세 가지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에 순응해야 하고, 둘째는 그 뜻을 따라야 하고, 셋째는 시대에 따라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 세 가지가 어긋날 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과 같아서 그거는 불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이 정신세계의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한번 숙고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나가면서 갖가지로 생활에 얽매이죠. 그러나 만물에 대해서 한번 거론해 봅시다. 모든 생물들,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떤 새들이든, 어떤 곤충이든 개든 고양이든 모두가 자기 분수를 안다 이겁니다, 말이나 소나 개나 돼지나 다 알고 삽니다. 돼지는 자기가 돼지인 줄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새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오직 한 군데에다 몰두하고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바를 틀림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건이 주어지면 개는 개로서 사는 방식을 허탈하게 보내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인간처럼 아주 악순환을 겪고 얽히고설킨 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집착과 관습에 의해서 그냥 얽매이고 살지는 않죠.
어떠한 사람들이, 사대 선지식들이, 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그러면 거기에 끄달려서 아예 한 발짝도 떼 놓지 못하죠. 부처님께서도 “말에 끄달리지 마라, 뜻을 봐라. 뜻에 따라야지 말에 따르면 안 되느니라. 그 말을 들어서 뜻을 가지고 행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람은 그렇게 얽매이고 지내는데 동물들이나 식물들은 아주 편리하게 얽매이지 않고 산다 이겁니다. 그것은 어떠한 점 때문이냐 하면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얽매이고, 집착과 욕심에 분수를 모르고 끄달리는 그러한 일들이 허다 많습니다. 아니, 모두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자기 다리가 긴지 짧은지 그걸 모른다면 개천을 건너뛴다 하더라도 아마 개천 중간에 빠질 겁니다. 그러나 자기 다리가 짧은 줄을 안다면 뛰지를 않겠죠. 넓은 데는 뛰지 않고 자기가 뛸 수 있는 만큼만 뛰겠죠.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안 그래요. 개천이 넓으나 좁으나 막론해 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만 하거든요.
이 공부하는 자체도 그래요. 우리가 분수를 안다면 나부터 발견하려고 애를 써야지, 말을 많이 들어서 첨단을 넘어서려고 기어오르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그건 자기 자리도 모르는 그런 위치가 되죠. 자기 내면의 자기가 철저하게 그렇게 해 나감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생중생들이 제도가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를 않는 모양 같습니다. ‘어떡하면 빨리빨리 알아질까? 어떡하면 빨리빨리 깨달을까?’ 하지만 내 자생중생들부터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게 되고, 자생중생들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고, 또는 자생중생들이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고, 그러니만큼 모든 것은 자생중생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제도를 해야 내가 제도를 받고, 자생중생들이 제도를 받아야 내가 깨달음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정신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문
지금처럼 첨단과학의 시대에 마음공부를 해서 정신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걸 가만히 보십시다. 여러분은 애고(哀苦)가 많으니 고(苦)가 많으니 병고가 많으니 온통 야단들인데 난 병고다 애고다 고통이다 이런 생각 안 합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 보신 분들이 그 낙(樂)을 알 수가 있는 거지 고통을 모르면 남의 고통도 모르고, 또 사람이 발전을 하고 진화돼서 창조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동시에 평등한 겁니다. 그래서 항상 재료로 알라고 그러죠. 여러분이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이치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알아야 될 일인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걸 말을 어떻게 해야 여러분한테 잘 비벼서, 비빔밥을 맛있게 해서 먹게끔 하고 나중엔 소화를 잘 시키고, 나중에는 대변을 잘 눠서 속이 시원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도 때로는 부실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한테 표현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걸 생각해 보십시다. 영화를 찍는데 미리미리 대사나 모든 것을 준비해서 촬영해 가지고 영화를 찍지요? 인간들도 자기가 살아나가는 데에 자동적으로 촬영이 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생활을 해 나가는 영화를 돌린다 이겁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영화 제작이 되고, 또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대사와 모든 것이 그렇게 정신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영화를 볼 때에 때에 따라서 국민이 ‘이렇게 이렇게 이거는 잘못됐다.’ 하고 말을 하면 좀 고치기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 80%, 90%는 고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벌써 그렇게 역할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그래서 자기가 한 것대로 방영을 해 주는 겁니다. 아주 요만큼도 빈틈없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태양계가 모든 행성을 이끌고 다니되 태양이 잘나서만이 아니고 행성들이 잘나서만도 아니에요. 서로 주고 서로 받고 이렇게 공용(共用)하는 겁니다. 공식(共食)이 없다면 공용이 없습니다. 상대성이 아니라면 우리가 움죽거릴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아주 이 도리를 확실히 안다면 한 치도 어긋날 게 없고, 진리에 순응하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우리 생활도 시대에 따라서 용어가 변천되고 바뀌고 하는 대로 발전이 돼서 아마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테두리 안에서,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나면 벗어나는 대로 정신계와 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저 우주의 근본과 직결이 돼 있다고 그랬죠?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건 가설이 돼 있다고요.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가지고 나온 거죠. 이 세상에 나왔다 하면 내가 나온 게 바로 화두요, 앉고 서고 생활하는 게 그대로 참선이요, 그 모든 살림살이 하는 것이 바로 자기이기 때문에,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자기이기 때문에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하고 행하고 그런 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정신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세계와 통해야 우리가 정신세계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옷을 벗고. 즉 말하자면 원자가 발전을 해서 은하계라든가 태양계라든가, 만약에 거기의 지배자가 된다면 수명은 더 길어지고 모든 각계각층 중생들을 다 건지게 되고 살리게 되는 거죠.
그런 반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나가 다 내가 되지 않는 생명들이 하나도 없고 나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한 뜻이 뭔 줄 아십니까? 만약에 이렇게 여러분이 잘 아시는 태양계의 지배자라면 모든 행성, 혹성을 이끌어가고 있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의 줄에, 염주알이 한 줄에 꿰어서 돌아가듯이 다 돌아갑니다. 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인간의 한마음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서로가 주고 받고 공생 공용 공체 공식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조금도 빈틈없이 저 갈고리에 걸려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기가 바다를 벗어나서 살 수가 없듯이, 우리가 지구를 벗어나서 살 수 없듯이,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과 둘이 아닌 까닭에 나는 한 사이도 없고, 어떤 거를 집어서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나는 한 사이도 없다고 했겠지요. 허나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길을 일러 주시지 않았다면 반드시 우리가 지금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거다 이겁니다. 역력히 지금도 그분의 마음은, 진리와 그분의 마음과 세상과 전부 일체 만물만생과도 더불어 같이 마음을 한마음으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도 진리는 여여하듯 부처님의 그 뜻과 말씀은 여여하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데서 만약에 원자에다가 입자들을 그냥 수없이 이 우주 공간에 있는 걸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이름만 다르지 뜻은 다 똑같애요.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내놔서 활동을 해도 줄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될 수 있으면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여기만, 자생중생들이 모인 이 세계만 믿고 모든 걸 ‘주인공의 뿌리에서 뿌리가 가닥가닥 헤아릴 수 없이 있는 이 자체 여기서 모든 게 나오는구나. 여기서 모든 게 드는구나. 나고 드는 게 여기구나. 그러니까 너만이….’ 이렇게 해서 다 거기다 놓고, 자생중생들이 ‘아, 이거 마음의 선장에 의해서 모두가 돌아가는구나!’ 하고 다 알았을 때, 그때는 털구멍을 통해서 보이지 않게 원자에서 입자가 나가듯 다 나가서 조절하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같이 돌아갈 수가 있죠. 예를 들자면 미국에 아들이 사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곳까지 가서 자꾸 도와줄 수도 없고 이럴 때는, 내 마음에서 탁 나가면 벌써 거기서, 그걸 이름을 하자면 입자로서 그 활동을 하게 돼 있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내가 그래요. 허허.
그러니까 입자로서 거기 가서, 입자라도 원자가 될 수 있고, 원자 속에서 입자가 나오고, 나온 그 입자가 바로 원자가 될 수 있는 거니까요. 일할 땐 원자가 되는 거죠, 그 속에 둘이 아니게 가니까. 그래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원자에서 입자가 돼서 나가서 그쪽에 가서는 원자가 되고, 원자가 돼서 그쪽에서 그 뜻을 알았으면, 그러면 또 전화를 해 주고 아, 이러면 자연적으로 공부가, 느끼고 체험하고 이렇게 되면 자연적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데 여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죠.
그러니 여러분이 정신계의 이 공부를, 마음공부를 아니하신다면 앞으로 살기가 극난히 어렵다 이겁니다. 왜냐. 앞으로 물질세계의 발전은 고도로 진전이 되겠으나 이 정신세계의 공부가 없이는 물질세계도 광대하게 발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