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미전 30년, 이제 전망을 갖도록 하자
무엇보다 나는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이하 불미전)’의 발전을 염원하고 있다. 하여 제20회에 즈음하여 ‘제언’ 한마디를 한 것이다. 이는 불미전의 역사가 30년이라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30년이라, 적지 않은 세월의 축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걸맞는 성과를 이룩했는가. 이 대목에서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제언에 대해 불교미술가와 주최측인 조계종 문화국장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나의 견해와 입장을 같이한 현역작가의 글도 발표되었다. 이렇듯 뜨거운 반응은 송구스럽기 그지없게 한다.
나의 제언은 단순했다. 역사도 흘렀으니 이제 불교집안만의 행사에서 일반 미술계를 아우를 수 있는 미술전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 전통미술의 복제와 창작품의 차이를 생각하고 시대정신을 강조했다. 전통미술 자체를 비하하는 발언은 한 적이 없다. 전통미술과 복제 혹은 창의성의 결여는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염원한다. 사찰의 성물과 미술전의 창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술이라는 이름 아래 치루어지는 전시는 창작품을 대상으로 삼는다. 미술이라는 단어에 이미 창의성이라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미술계와 무관한 미술전, 그것도 30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불미전은 아마 ‘세계 유일의 전시’일지 모른다. 여기서 세계 유일 운운의 표현은 불미전 주최측이 언론사에 배부한 보도자료에서 인용한 것이다. 결코 내가 지어낸 표현이 아니었다. 또한 현대미술(창작) 분야의 제외 관련은 당시 <불교신문>의 기사에도 나와 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불교미술은 글자 그대로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찬탄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는 수준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불교미술의 찬란한 전통이 오늘에도 살아 우리들 곁에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미술전에서도 이와 같은 희망이 통하기를 바라고 있다. 불미전이 국내의 현역 미술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 아니 외국의 손님들까지 운집할 수 있는 그런 미술전이 되기를 꿈꾸어 본 것이다.
몇 십억 혹은 몇 백억 원의 불사를 소화해 내는 불교계의 역량을 염두에 둔다면, 불교비엔날레 하나 개최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의지이다. 하여 비전이 관건이다. 전망이 없는 미술전은 암담하다.
불미전 30년, 이제 전망을 갖도록 하자. 장단기의 계획을 수립하여 불교미술의 찬란한 전통과 오늘의 미술을 국제무대에 올려놓도록 하자. 예산타령보다 이는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
현재 불미전의 장르 구분조차 무색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멀티 미디어의 시대이다. 오늘의 젊은이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서 불교미술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현재의 상황이 만족할 수준인가. 불미전은 전문가의 기획에 의한 특별전을 수용하여 대중적 호응을 이끌어 내야 하리라.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 불교미술일 수도 있고, 외국의 전통적 불교미술일 수도 있고, 해외의 현역작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아니 이렇듯 다양한 불교미술이 하나의 주제로 한자리에 모여지는 특별전을 둘 수만 있다면, 이는 꿈에 불과한 것인가. 다양한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아 그야말로 불교미술의 국제적 향연을 개최할 수 있는 날, 이는 꿈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장기적 전망의 유무이다. 더불어 그런 일을 진행시킬 인재를 키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재양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에게 불교미술관 하나 반반하게 있는가. 전시기획자를 양성하고 있는가. 아니 현역작가에게 창작의 열기를 넣어 준 적이 있는가.
예술처럼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포교의 차원에서 예술분야에 적극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재를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 전망을 곧추 세워야 한다. 이런 커다란 그림 속에서 불미전의 역할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30년의 세월을 염두에 두고 빌어보는 한 비평가의 꿈인지도 모른다. 불교미전의 발전을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