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성 항상 활발히 살아 있어
불가에서는 우리 안에 부처의 씨앗(佛種)이 있다고 하며, 유정무정 개유불성(有情無情 皆有佛性)이라고 하여 모든 것은 본래면목인 생명의 작용으로 나타남을 설하고 있다. 우리 안의 그 씨앗은 우리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항상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어 그것이 곧 우리의 어묵동정 행주좌와 중에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禪)이란 무엇인가?
비유하자면 귀 기울여 항상 작용하고 있는 그 생명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떠 그 생명의 소리를 보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외부 조건이 어떠하건 조용한 자신의 마음으로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이 곧 선(禪)이다.
우리는 선을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모습으로 받아들여 어려워한다. 그래서 선을 삶과 유리된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마치 네가 곧 부처다’라고 했을 때 대부분이 믿지 못하고 놀라며 어떻게 내가 그 높고 거룩하신 부처님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듯 말이다.
하지만 선이란 내 안의 생명(佛種)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에 그러한 행위야 말로 반야심경에서 언급된 것처럼 반야바라밀을 깊게 행하는 것이며, 관자재보살은 이를 통해 모든 고액을 뛰어 넘는다. 굳이 말로 하자면 선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얼핏 선이라 할 때 그 대표적인 형태로서 화두를 통한 간화선을 연상한다. 물론 간화선은 참으로 좋은 참선법이지만 결코 간화선만이 선의 모든 것도 아니요, 일상의 삶 그 자체가 선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일상적 삶이 그대로 선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오직 깨어서 자신과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원래 면목의 모습을 향하여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치성한 관념(識作用)을 쉴 수 있어서 항상 귀 기울여 자신 내부의 깊고 깊은 영혼의 소리를 듣는데 달려있다.
산사(山寺)에 가서 흔히 볼 수 있는 네 발밑을 돌아보라는 뜻의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평범하고도 기본적인 이 한 마디가 바로 참선의 요체이다. 마음공부를 한다면 마음을 쉬고 쉬어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아 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특별한 것을 찾아 밖으로 헤매거나 마음을 분주히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마음공부에서는 그 과정과 목적지가 결코 둘이 아니기에 공부를 끝마쳤다는 잘못된 견해도 짓지 말아야 한다. 믿음과 용맹심 그리고 자신 내부를 향한 꾸준한 방향 전환으로 반드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생명에 한 생각 일어나 삼라만상이 펼쳐지고 이 펼쳐지는 모습 속에 오직 연기(緣起)로 인하여 무명이 생기고 분주함이 생겨나니 부처가 생기고 불법(佛法)이 횡행하게 되었다. 삼세제불이란 무엇인가? 오직 선(禪)을 통해 생명의 바다 속에서 그 머무를 바 없는 기쁨을 맛 볼 수 있기에 부처님과 조사의 그 큰 은혜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