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현 보살이 구도여행의 처음과 끝 확고한 믿음이 보현행 성취의 큰 토대
미륵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현의 수행문에 들어가서 성취하는 법을 물으라며 찾아가기를 권하는 선지식은 문수보살이다. 그가 문수보살을 권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문수사리가 가진 서원을 다른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보살은 가지지 못했다. 선남자여, 문수사리동자는 그 수행이 광대하고 그 서원이 그지없어서 모든 보살의 공덕 내기를 쉬지 아니한다.
선남자여, 문수사리는 항상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며,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보살의 스승이 되며,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성취하여 시방세계에 소문이 났으며, 모든 부처님 대중 가운데서 법을 연설하는 법사가 되어 모든 여래가 찬탄하는 바이며, 깊은 지혜에 머물러 있어 모든 법을 사실대로 보고, 모든 해탈의 경계를 통달하고, 보현이 행하는 행을 끝까지 마치었다. … 그러므로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문수사리에게 가야 하나니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 문수사리는 그대에게 모든 공덕을 말하리니, 왜냐하면 그대가 먼저 선지식을 만나고 보살의 행을 듣고 해탈문에 들어가고 큰 원을 만족한 것은 모두 문수사리의 위덕과 신통의 힘인 것이다. 문수사리는 모든 곳에서 구경(究竟)까지 얻게 해준다.”
선재동자가 처음에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선 것은 문수보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 동안 많은 선지식을 만나 뵙고 법문을 들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여 이제 최후의 선지식인 보현보살만을 남겨 놓고 있는 마당에서 지나온 일백 일십 성을 되돌아가서 다시 한번 최초의 선지식인 문수보살을 만나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재동자가 지금까지 만나 온 선지식들은 제각기 한 가지 씩의 해탈 법문을 해주었지만,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의 수행을 칭찬할 뿐 어떠한 특별한 법문을 설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최초에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보현행을 갖출 수 있는 도(道)를 구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라고만 할 뿐 특별한 법문을 설하지 않고 있는 데도 나타난다. 그리고 최후의 선지식인 보현보살 또한 광대한 자비행인 보현행에 대해서 말할 뿐 특별한 법문을 설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구법여행의 시작을 열고 또한 마무리하는 보살이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의해 보현의 훌륭한 행을 갖춤으로써 구법여행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의 가르침은 선재동자의 모든 구법 과정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앞의 경문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문수사리보살은 항상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고,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보살의 스승이 되어서 모든 곳에서 보살행을 구경(究竟)까지 얻게 해주기 때문에 이제 다시 선재동자를 문수보살에게로 가라고 하는 것이다.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가르쳐준 대로 보문국(普門國)의 소마나 성(城)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생각하며 두루 널리 찾아보려고 하였다. 이 때 문수보살은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일백 일십 유순이나 뻗쳐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면서 말하였다.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여, 만일 믿음의 뿌리(信根)를 여의었던들 마음이 용렬하고 후회하여 공 닦는 행을 갖추지 못하고 정근에서 물러나게 되며 한 선근에도 집착하고 조그만 공덕에도 만족한다 하여 교묘하게 행과 원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법의 성품, 이러한 이치, 이러한 법문, 이러한 수행, 이러한 경계를 알지 못하고 두루 알음과 갖가지 알음과 근원까지 지극함과 분명하게 이해함과 들어감과 해탈함과 분별함과 중득함과 얻는 것을 모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문수사리는 이 법을 말하여 가르쳐서 통달하고 기쁘게 하며, 선재동자로 하여금 아승지 법문을 성취하고 한량없는 큰 지혜의 광명을 구족하여 보살의 그지없는 다라니, 원 삼매, 신통 지혜를 얻게 하고 보현의 도량에 들어가게 하였다가 선재를 도로 자기의 머무른 곳에 두고는 문수사리가 작용을 거두고 나타나지 않았다.
문수보살은 선재동자가 보현행을 성취하게 된 것은 결국 최초에 선지식의 가르침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구도의 발심이 있을 수 있었고, 그 발심이 온갖 수행을 성취케 하였음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수보살은 처음에 한 생각을 일으키는 신심(信心)에 절대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법문은 선재동자가 이루는 공덕은 모두 문수보살의 힘이라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믿음(信根)이 없으면 깨달음의 경계에 증입(證入)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