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어먹을 수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 道
여러분! 이 여름 나느라고 노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덥고 추운 것을 놓으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높고 낮고, 크고 작고, 여자 남자, 동서남북 모두가 둘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이 공부 해나가는 데는 여러 가지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따라오는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기도 합니다. 물론 모두가 천차만별로 다릅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즘 더 병고가 많은 거 같고, 요사이는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게 많은가 하면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어디가 깨졌다거나 이러한 문제라면 병원엘 아주 재깍 가야 하겠지만 여러분이 조심해야 할 것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일을 가서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놓는 일이죠. 아마 한두 건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아무리 가서 해봤던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구태여 몇 달 더 살면 뭘 하고 덜 살면 뭘 하나.’ 하는 그 믿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기 마음의 주인을 투철히 믿고 거기에 맡겨 놓는 데에 묘법이 있다고 봅니다.
그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살아나가는 데도 고통이 많은데, 병고에 휘달리고 또는 자녀들을 키우는 데 휘달리고 또는 먹고 살기 위해서 휘달리고 사람 살 길이 참, 얼마나 천차만별로 고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름이 위대하고 돈이 많다고 해서 고가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이 있는 집들이 허다 많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 아집과 아상과 또는 욕심과 착, 이런 거를 다 버리신다면, 그러고도 놓고 맡겨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밝게 한마음의 등이 켜지게끔 한다면, 자녀들도 이탈을 안 할 것이요,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놓는 그 새싹들도 역시 뿌리가 튼튼하고 싱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마음,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마음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한생각 내서 악으로 가느냐 또는 한생각 잘 해서 선으로 가느냐는 문제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 속에 들어 있는 그 입력된 사실과, 팔자 운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점을 여러분한테 수차적으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운명이니 팔자니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저질러 놓고 “그건 운명이야. 죽는 것도 운명!” 이러죠. 그러나 그 운명이라는, 팔자라는 그 말이 말입니다. 어처구니없이 여러분이 저질러 놓고 당하는 것을 그냥 위안이라도 할 양으로 “그게 운명이야!” 하는 거지, 그 운명이라는 이름이 사람들한테 다 붙어 있답니까? 누가 빼앗아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갖다주는 것도 아닌데다가 우리의 마음으로써 구성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고 멋진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인데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지수화풍이 바탕으로 돼 있어서 광력이나 전력·자력·통신력이 바로 재료로 갖춰져 있고, 여러분이 능히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는 재료가 그렇게 돼 있다고요. 그거는 미리 말해서 여러분이 다 아시리라고 믿고요.
우리가 이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내 몸 안에서 이탈을 하고 또 가정에서 점프해서 나갈 수 있는, 그 감옥 아닌 감옥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지금 배우시지만, 이 마음 하나가 우주를 조절하고 이 세상을 조절하고 평화 문제 또는 남북통일 문제와 수많은 청소년들 문제를 조절하고, 정치하는 사람들과 과학자들을 조절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하게, 마음의 등불을 켜준다면 우리는 모두를 건질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조그마한 나라에도 아주 새 빛으로서 역력하게 역사를 이끌 수 있는 그 능력이 여러분 앞에 아마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한 입 걸러 두 입 건너, 한생각에 바로, 여러분 한생각이 우주 법계에 직결돼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딴 사람이 아무도 몰라도 우주간 법계에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고 계십니다. 물론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요.
우리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즈음 인구가 너무 많이 팽창됨으로써 생기는 병들, 우리 마음들이 산란함으로써 그 혼백, 즉 영(靈)이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세균과 영계성이 너무도 많이 꽉 찼다고나 할까요? 그럼으로써 알지 못하는 병 증세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빈 까닭에 그저 빈집을 왔다 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해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간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며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며, 앞으로 자라나는 새싹들은 어떻게 되며 우리 지구는 또 어떻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이 주인이 있어서 조절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신다면 여러분의 한생각에 우주 법계를 울릴 수도 있고 웃길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걸 보통 마음 공부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말 한마디 할 때에 여러분이 미쳤다고 하거나 또는 옛날에 소크라테스나 달마 대사 같은 사람들, 약사발을 안겨서 죽일 정도로 지금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한마디 하겠는데, 우리가 이 공부가 중요하다는 그 점,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중요한 점은 우리 지구라는 혹성도 혹성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걸 조절해나가는 일, 세계평화도 바로 우리 마음의 조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구의 수명도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고 당장 부딪치는 자원 문제, 즉 말하자면 인구가 팽창됨으로써 우리 지구의 자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 달렸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바로 인구의 팽창도 여러분의 마음의 조절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주간 법계에서 모두 한마음으로써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주간 법계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佛)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이라는 것은 그대로 영원히 변함없이 흘러 도는 불덩어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자기의, 자전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진 불성이 바로 그러한 능력으로 충만하기에 우리 마음들이 자전하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법계의 법바퀴가 되는 것이죠. 여러분 몸 안에서 벗어나서 법바퀴를, 우주 전체 법계를 두루 굴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이 세상을 창조하고도 남음이 있어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그런 일도 여러분이 다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자들이 되실 겁니다. 물론 과학자도 무시할 수는 없겠죠.
그것은 부처님 당시에 말씀해 놓으신 거나 지금 우리가 하고 가는 거나 증명해줄 수 있는 여건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여러분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또는 나라를 이뤄서 정치도 하고 모두를 하고 가시는데, 나한테 주어진 여건이 있어야만 용기가 나고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마음의 여건이 충만하게 드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는 아예 그냥 여건이 주어지지 않죠. 그리고 힘도 빠집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첫째는 나로부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실천을, 즉 내 몸속에 있는 그 의식, 마음들을 한마음으로 뭉쳐서 요리할 것. 둘째, 요리를 한다면 바깥으로 남을 이익하게 전부 조절할 것. 셋째, 우리가 마음이 충만하다면 어떠한 것이든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여건들이 모두가 내가 돼서, 즉 가고 옴이 없이 나툼으로써 바로 내가 되어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에 세계평화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건과 더불어 이 우주의 근본이 마음이라고 그랬는데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우주도 조절할 수가 있죠. 우리 지구에만 생명이 살고 있다는 거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이 마음공부 하는 것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꿰뚫어보고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꿰뚫어본다 해도 부처님께선 도가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왜냐하면 보기만 하면 뭘 합니까? 내가 실질적으로 행하지 못하는데. 내가 집어먹을 수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만이 그것이 도지, 어찌 보기만 하는데 도라고 하겠느냐는 얘깁니다. 가고 올 수 있어도 도가 아니니라. 또는 남의 속을 빤히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다고 말할 건덕지도 못 되느니라. 즉 과거에 어디서 왔는지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건덕지가 못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묵묵히 걸어가면서 한 발 한 발 실천을 하는 데에 게으름이 없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써, 아집을 갖지 않는 마음으로써, 또 관습을 갖지 않음으로써, 우린 통틀어 내놓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그런 마음으로 실천을 해야죠, 첫째. 그것이 역시 내가 아님이 없는, 내 발 아님이 없는 평발이라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들어서도 아시겠죠. 발이 밋밋하고 평등해서 평발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느 벌레의 발 하나라도 내 발 아님이 없기 때문에 평발이라고 했겠죠.
여러분은 ‘이 마음공부를 해서 어디 써먹을 것인가?’ 또는 ‘마음공부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고, ‘그저 왔다 갔다 하다가 병이나 나으면 고만이지.’ 이런 정도로만 공부를 하신다면 병 자체도 못 고치거니와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도 제도 못할 것입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과학이다 뭐다 하지마는 원자에서 그렇게 입자가 많아서 분자로 화(化)해서 수없이 대기권을 지키고 나가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거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모르시더라도 잘 생각해두십시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만, 어떤 때는 모르는 게 약이지만 그건 설 알아서 그렇습니다. 진짜 안다면 아는 것이 약이지 어째 모르는 것이 약이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약이겠죠. 알고 모르는 척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모르는 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팔자 운명을 자초하는 것이죠.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게 죄지, 죄는 없습니다. 붙을 자리도 없고 운명도 팔자도 붙을 자리 없습니다. 이거 엉터리로 주워 모아서 막 말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체계를 세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라는 것이 이렇게 값비싼 건 줄 몰랐다 하는 생각을 가져보십시오. 마음공부라는 것은 우리 마음이 물리가 터져서 우주간 법계와 더불어 개미 한 마리도 따로 없이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이 얼마나 기묘하고 보배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지금 보십시오. 별성이 얼마나 많은가.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인구는 참, 나라마다 조절할 수 있고 “몇이냐? 몇억이냐?”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별성이나 혹성이 얼마나 많은지는 헤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관내에 있는 혹성만 하더라도 지금 아홉 개니 열 개니 이렇게 따로 태양을 끼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지구에만 이렇게 생명이 살고 움죽거린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됩니다. 내가 나이 젊었을 때 얘깁니다. 6·25때 접시비행기를 봤습니다. 그때는 여기서도 봤다 저기서도 봤다 야단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저기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데까지 앉은 걸 봤습니다. 여자로 보이는데 여자 하나를 듬뿍 안더니만 그리로 태우고선, 그 양쪽에 모두 고슴도치 같은 것도 있습디다. 얼마 크지도 않은 것이 밑으로다가 철컥 뭐가 내려오니까 그냥 그리로 머리만 이렇게 수그리니까 그냥 올라가고 있어요. 그런 거를 똑똑히 저 아래 틈에서 봤거든요.
그래도 나는 그때는 그 생각을 못하고, ‘아휴! 지금 싸움이 벌어졌으니 저런 비행기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죠. 그때는 영 몰랐습니다. 그러곤 그냥 가까이 얕게 떠서 반딱반딱하면서 자유자재하는데 ‘야! 저런 비행기가 있으니 우리가 질 수밖에!’ 이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후에 생각을 해보니까. 그러니 여러분, 우리 지구에만 사람이 산다고는 절대 못합니다. 그리고 뜨거워서 생명이 없고 차서 생명이 없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얘기는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어디다 쓸 것이냐 하시지마는 우리 불종(佛種)을, 참 ‘선의 불종’ 이 자체는 이 ‘악의 불종’의 무리를 없애기 위함이요, 또는 ‘악의 불종’을 없앰으로써 우리 각 금성이나 토성 같은 데도 생명의 존재가 살 수 있게, 움죽거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중요시 안 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넓히면 크고 좁히면 작고, 고무줄 인생이라고 하죠, 그래서. 이 고무줄 같은 마음을 좀더 우리가 계발해서, 정신계로 발전을 해서 계발을 한다면, 우리가 지금 그러한 문제들도 잘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이 ‘악의 종’에 ‘선의 종’이 딱 거기에 입력이 된다면, 그것이 스스로서 착해지고 그 모습을 아주 밝게, 자력과 광력이 여러분에게 충만할 것이라는 얘깁니다. 믿어지지 않으시죠? 믿어지지 않아도 앞으로 믿어지게끔 될 겁니다. 아마도 이것이 증명되려면 한 백 년 거리는 두어야죠.
그러나 그 작업이 뭐가 문제냐 하면 악종, 잠들어 있는 악종을 우리가 바로 선종으로 깨닫게 해줘야만이 그것을, 말하자면 모든 얼은 조건이나 뜨거운 조건을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이것이 증명도 안 되거니와 그러나 이건 엄청난 문제라고 봅니다. 이건 자동적인 끝간 데 없는 진리 속에서 우리가 화합을 하고 모두의 마음이 같이 동조하고 같이 이룩해야 한다는 문제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런 공부를 많이 해야 첫째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나쁘게 될 일이 없죠.
그때에 접시비행기를 볼 때, 그때는 몰랐는데 그후에 생각을 하니까 ‘아, 저런 사람은, 저런 비행기를 움죽거리는 사람들은 너무 에너지가 많아서 우리들이 범접을 못하게끔 돼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구가 많아지는 반면에 자원이 부족해지고 능력이 손상되고, 정신을 뺏기고 이러는 수가 많습니다. 혼을 뺏기는 수도 많고요. 여러분의 집에 만약에 집주인이 없다면 여러분은 다른 세계에 혼을 악으로 뺏길 수도 있죠. 선은 빼앗아가고 빼앗아오고 하는 것 없이 여러분에게 성능을 더 넣어주려고 애를 쓰지만, 악으로써 넣어주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혼을 뺏기 때문입니다. 악으로써 존재한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며 지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태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태양이 끼고 돌 수 있는 그 별성들은, 그 생명들은 어떡하겠습니까? 우리의 생명과 똑같습니다. 수명이 길고 짧을 뿐이지.
그러니 여러분의 그 마음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의 그 한마음 주인공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지금 현실에 병고를 앓고 있는 사람마저도 해롭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해롭고, 어떠한 요건에 대해서든가 용도에 따라서 거기에 모든 게 달려 있으니깐요. 여러분 마음이 그렇게 귀중하다는 거죠.
서산 대사는 왜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렸겠습니까? 괜히 새를 죽이려고 그랬겠습니까? 아니죠. 공부시키느라고 학인들을 위해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계란을 거꾸로 쌓기도 하고 그랬겠죠. 그러나 지금 시대는 또 다릅니다. 우리는 보이는 데 계란을 쌓고, 보이는 데 떨어뜨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생각에 지금 우주를 한꺼번에 보고 돌아가야 하는 그런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한쪽만 봐서도 아니 되죠. 우주복을 입고 지금 화성에도 가고, 달에도 가고, 많은 과학자들이 선동을 해서 그렇게 가곤 했습니다. 인공위성을 띄워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쓰고 다녔지마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전부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데 50%를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데 마음들하고 접근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발견이 되지 않는 것이죠. 또 한쪽에만 가 봐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지구에도 만약에 저 북극이나 남극에 침투했다고 봅시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산다고, 생명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지구 안에도 모르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북극을 따라서 해안을 쫓아서 섬이나 이런 데는 우리가 모르는 그런 문제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그냥 요가를 한다 또 나는 명상을 한다, 또 단전을 한다 이러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몸 떨어지면 다 떨어지는데 뭐가 끝간 데 없이 남겠습니까? 내가 끝간 데 없는 도리를 체득한 뒤에야 요가는 요가대로, 좌선은 좌선대로, 명상은 명상대로 내가 서려면 서고 앉으려면 앉는 거지 그게 무슨 이름이 주어졌고 이름이 박혀 있습니까? 이 몸이라는 건 사대로 흩어지면 그뿐이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영원한 것입니다.
후일에 내가 만약에 아니, 나 말고라도 말입니다. 역대 조사들이 사대가 흩어졌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역시도 그렇고요. 요 우물 안에서만 보지 마시고 바다로 나갑시다. 바다에 얼마나 생명들이 많은가.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도 ‘물 밑에, 태양열이 들어가지 않는 깊은 데 있는 생명들을 건지기 위해서 파도가 치고 소용돌이를 친다.’ 이런 거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얼음이 언다’ 하는 것도 더운 김과 찬 김을 조절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바로 도전이다, 그리고 작업이다, 이런다면 그 얼음 하나도, 파도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거죠.
차차로 여러분이 이 공부를 소중히 알고 열심히 하신다면 과학자들이 해결 못하는 것도 여러분 스스로서 해결하게, 아마 그 마음이 응해주실 겁니다. 가고 옴이 없이 말입니다. 하는 사이 없이 하고, 보는 사이 없이 보고, 듣는 사이 없이 듣고, 자유자재권을 한 손에 쥐고 중용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겁니다. 아주 너무 잘 아시는 겁니다. 선사들에게 있었던 얘기니깐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기는 다 아시는데 행이 없다면 그건 아나마나 아닙니까? 행이 문제지 말이 문제고 아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때에, 아마 중국에서는 공부를 하는데 학인들이 너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동당이니 서당이니 하고 만들어 놓고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은 남전 스님이 왁자지끌해서 내다보니까 아, 동당 고양이다 서당 고양이다 하고 싸움이 붙어가지곤 온통 학인들이 야단법석이 났거든요. 그래서 남전 스님이 가만히 보다가 하도 괴이하고 그 공부하는 것들이 정말 너무 기가 막혔죠. 그래서 보다 못해 고양이를 가서 덥석 집었습니다. 덥석 집어들고서 “너희들이 한마디 한다면 이게 두 동강 나지 않을 것이고, 한마디도 대답을 못한다면 두 동강이가 날 것이니라.” 이렇게 말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그냥 쥐 죽은 듯이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답니다. 이걸 어떡합니까? 남전 스님은 약속은 해놓고 그거를 행하지 않으면 뭔 꼴이 됩니까? 그래서 삽시간에 그냥 두 동강이를 냈죠. 그랬는데 외출했던 조주 스님이 저녁에 들어오니까 남전 스님이 낮에 있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조주 스님은 또 아무 소리 없이 그냥 신발 한 짝만 머리 위에다 얹고는 휙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게 있습니다. ‘고양이를 죽인 것이 옳겠습니까, 살려둬야 옳겠습니까?’ 하는 것이 첫째 관문이요. ‘그럼 그 얘기를 했는데 왜 신발 한 짝을 머리 위에 이고선 휙 나가버렸느냐.’는 그게 둘째 관문이요. 셋째는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살생하지 마라, 살생하지 마라 하고 아주 첫 구절에 그랬는데 어떻게 해서 남전 스님은 고양이를 삽시간에 그냥 살생을 해버렸느냐?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라는 관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첫째, 둘째, 셋째 말입니다. 말은 함이 없이 대답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야 하겠고, 흉내를 내서는 절대 안 되고, 내 마음에서 그냥 우러나온다면 함이 없이 하고 작용으로써 대답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 모르고서 남이, 전자에 종사들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해서 덩달아 따라서 그것을 했다면, 그거는 큰 업보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모르게 하나 훔쳤다고 해서 뭐 알겠느냐 이러겠지만, 이거는 컴퓨터에 입력이 그냥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거 그냥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청이 되고,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고, 입력이 돼서 그냥 고대로 나오는 거죠. 판사가 어딨습니까? 자기 속에 판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모든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게 공생으로 돌아가고 공용으로 돌아가고 공체로 돌아가고 공식하고 돌아가는데 뭐가 어디 딴 데 있겠습니까? 아는 걸로만 알아서 아니 됩니다.
우리가 보배로운 이 마음을 어떻게 써야만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나 정신병자들 문제나 이런 것들을 해소시킬 수 있을까? 이 공부 아니면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천 분이 오셔도 그건 해결 못합니다. 과거도 현실이고, 어저께도 과거니깐요. 남을 우습게 알고, 남의 생명을 우습게 알고 죽이거나, 죽여서 그저 내 살 궁리만 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마음을 내고, 이러한 문제들을 갖는다면 내 앞에 닥친 것을, 닥쳐오는 것을 어떻게 막습니까? 그래서 이 공부를 하라고 한 거고, 거기서 물러서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말라느냐. 이거는 컴컴하기만 해도, 컴컴해서 저 산 속에만 들어가도 벌벌벌벌 떠는데 아니,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이판사판이지, 그깟 놈의 거.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 번 살다 가기는 마찬가지인데 뭐이 그렇게 두려운 게 있겠습니까?
나는 그전에 그랬죠. 어려서 참 많은 세월을 부모를 떠나서 살았습니다. 일제 시대의 일입니다, 딴 집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집을 가니까 건빵을 갖다가 우거지를 좀 썰어 놓고선 물은 흥덩그러하게 붓고는 솥에다 끓이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한 그릇씩 끓여도 내 몫이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내가 먹는다면 어머니는 굶게끔 되어 있어요. 어머니밖에는 굶을 사람이 없거든,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래서 “나는 저기서 먹고 지금 바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되돌아 갔어요. 그 집에서는 배불리 먹고 산다고…. 가다가 고만 하루 종일 굶고 온지라, 너무 배가 고프니깐 길에서 쓰러졌죠. 쓰러지다보니까 어느 사람이 날 부축을 해서 그 움막집으로, 정말 부엌에는 거적을 해놓은 그런 집으로 가더니만 물에다 간장을 타서 한 사발을 주더군요. 그거를 먹고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죠. 자기가 경험 안 해보면 모릅니다, 그 아픔과 그 모두를.
여러분, 지금은 먹을 게 많아서 버리기도 하고 그러죠? 먹을 게 많으니까 상하는 것도 있고요. 맛없는 것도 많겠죠. 그때엔 정말 무청 하나를 생으로 씹어 먹어도 맛있었으니깐요. 사람의 입이라는 건 그렇게 이를 데 없이 간사한 게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습니다. ‘먹고 살기만 하면 됐지, 뭐이 그렇게 맛을 찾느냐?’ 하는 생각도 어떤 때는 듭니다. 그런 생각만 하면 가슴 속에서 눈물이 머금어 올라옵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자기 재량대로 살겠지만, 그렇게 못나 떨어져서 그렇게 못나게 살았죠. 그러나 못났다고 해서 남의 거 훔치거나 더 먹으려고 하진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나와 같이 불쌍하기 때문에, 항상 어떡하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옛날에 중국에서 길을 떠나 인도로 공부하러 갈 때 소금 한 웅큼을 허리에다 차야만 갔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금 한 웅큼씩 차고 가도 삼십 명이 가면 한 명 남을까 말까 했답니다. 그게 이해가 됩니다. 그때는 그 말을 듣고 너무도 울었습니다. 전자의 종사(宗師)들이, 전자의 스님네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 스님네들이 얼마나 가엾게도 그렇게 쓰러져갔을까 하는 생각에서 엉엉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문제가 생겼죠. 요런 옹달샘에 너무 배가 고파서 그때도, 배가 고플 때가 왜 그렇게 모두 많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시대에는 그렇게 됐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 물을 떠먹으려고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내 모습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어떤 마구니, 그냥 보잘것없는 게 비쳤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내 모습이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 모습이 왜 이렇게 험한가?’ 하고선 생각을 하는 찰나에 말입니다, ‘그 또한 부처니라.’ 이런단 말입니다. ‘그 또한 부처니라. 조성이 돼서 잘 꾸며 놓은 그 부처가 부처가 아니고 그 속에 진짜 부처가 또 있느니라. 그러니 부처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마구니 소굴도 들어가고 오간지옥도 들어가고, 남의 집 며느리로도 되고 남의 집 남편으로도 되고, 동생으로도 되고 아들로도 되고, 개구리도 되고 짐승도 되고, 돼지도 되고 개도 되느니라. 그러니 어떤 것이 될 때 부처라고 하겠느냐? 그렇게 소중한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둘도 없고, 둘도 없는 그것이 바로 그 보배니라.’ 이렇게 말씀을 듣고서 나는 거기에서, 여러분이 지금 아리송하듯이 ‘야! 어떻게 그렇게 이게 됐다 저게 됐다, 이것이 됐다 저것이 됐다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물 먹는 것도 잊어버리곤 그냥 거기 앉아서 빠져들었죠. 그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세 가지의 관문 그 자체가 바로 여러분이 공부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드는데, 예전의 종사들도 그렇게 해서 익었나 안 익었나 두들겨봤다는 얘기였죠.
바다 깊은 물
얼은 것도 파도도 관계없이
도도히 흘러도니
청산의 푸른 잎 낙엽졌다 말 없이
돌부처 도리천에 연꽃 머리 위에 얹어
끝간 데 없이 걸어 도누나.
검은 구름 활짝 밝아지니
그 모두가 밝고 밝았노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오른손 주먹으로 법상을 세 번 치심)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모르시죠?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이것이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돼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말일 뿐입니다. 진짜는 그냥 우리가 목마르면 마실 수 있고, 눕고 싶으면 눕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잘 소화시킬 수 있어야 똥을 잘 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똥 누고 싶으면 똥 누고’ 이 소리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걸림 없이 소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오늘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47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