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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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신을 거기다 그냥 버려서 주장자 하나로 갈 수 있어야
찰나찰나 화해서 나툴 뿐 내 몸은 없는 것



초파일을 맞이하는 마음자세
오신 바가 없기 때문에 가신 바 또한 없다고 하시지만, 안팎으로 너무나 어려운 지금, 불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야 하는지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해마다 봉축일이 다가오고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했습니다만 올해는 부처님오신날을 계기로 해서 더 한층 우리가 분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건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모습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사람 되는 법을 가르치셨고, 사람이 사는 법을 가르치셨고, 그 뜻을 알고 자기를 깨달아서 그 길을 따르게끔 또 가르치셨고, 영원한 불생불멸의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누구의 탓을 하지 말고 각자 그 마음을 깨달아서 밝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켜는 연등이 우리 모습, 몸으로 표현했고, 그 등 속의 촛대는 우리네들 중심으로 표현을 했고, 그 불은 영원한 불성을 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등을 켜면서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마음과 더불어 내 마음을 계발시키고 내 마음을 진화시켜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서 그 길을 가르쳐 주신 그 뜻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갖는 거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실 때에는 ‘아집을 버려라. 너라는 것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환상을 놓아라.’ 하셨는데 모든 게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죠. 오늘이 옛날 그 시절에만 있던 오늘이 아니라 앞으로도 오늘이 있을 거고, 오늘도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삼천 년 전에만 진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분이 몸소 몸을 가지고 나오셔서 그 모습을 보여 주시고, 행을 보여 주시며 말씀을 해 주시면서 길을 인도한 그 뜻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해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길을 인도하시고 또 가르쳐 주시고 뜻을 표현해 주시고 “어려운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또는 고통스러운 사람이나, 그것을 한생각에 놓으면 그 고통은 다 사라지느니라. 아집을 갖지 않고 욕심 없고 또는 남을 탓 안 한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사람이 됐으니 부처도 될 수 있느니라. 부처도 될 수 있으니 바로 어느 것을 이름해서 부처라고 할 수 없으리만큼 그렇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고, 길에서 가신 님이 되실 수 있는, 내 마음과 내 뜻을 소상히 알 수 있느니라.” 이렇게 가르쳐 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배우고 나가면서도 한 치도 자기 마음속에 부처님의 밝음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이 어떠한 날인지도 모르면서도 등을 켜고 ‘우리 식구가 잘돼야지.’ 하고 등을 켜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은 버려야 합니다. 등을 켤 때 우리 마음이 항상 온 누리에 함께 하고 있고, 같이 공생하고 같이 공용하고 공체이기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온 누리가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데도 생각이 있고 보이는 데도 생각이 있고, 보이지 않는 데도 생명이 있고 보이는 데도 생명이 있으니 이렇게 조화를 이루면서 화목하게 돌아가는 찰나찰나의 생활, 시공이 없는 생활, 그대로 밝은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밝다 밝지 않다 하고 온갖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거기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침밥이 없더라도 껄껄 웃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라면 아침밥 굶지 않아요. 그래서 능력을 기르라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셨고, 그 길을 가르쳐 주셨고, 영원하게 건져 주셨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길을 인도하셨는데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아십니까? 조그마한 거, 큰 거 작은 거 아니, 언짢은 거 나쁜 거, 이러한 것을 내가 해야겠다 하는 그런 마음…. 천차만별로 변동하면서 찰나찰나 변해 가면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알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건져 줄 수 있는 그 길을 인도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이 안 들면, 내가 구덩이에 빠져 보지도 않고 구덩이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구덩이의 맛을 알며 어떻게 나와서 그 즐거운 맛을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마음, 고통 속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마음, 이 양면을 다 누가 하는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유스러우니라. 마음 한생각이면 자유스럽고, 한생각에 빠지면 바로 고가 붙어서 중생이니라. 그러니 한생각을 잘하라. 너희 맘대로 하는 생각인데 어찌 그렇게 어둡다고 하느냐.” 이렇게 모든 것을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뭡니까. 지금 모두들 보면, 전 세계를 보고 그래도 우리는 항상 아집과 내 것, 내 가족, 내 나라 이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지혜롭게, 즉 공용하면서 공식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면 아량과 지혜, 사랑과 의리 이런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폭넓은 자유인이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게 서로 쫓고 쫓기면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그래, 요런 물 한 컵 속에서 물끼리 싸워 봤던들 물이 물이지 뭡니까.
그래서 물이 튀겨서 물이 다 없어지면, 물이 마르고 그래서 잔등이도 들어갈 수 없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지구를 집으로 알고 우리나라도 집으로 알고, 가족도 집으로 알고 몸뚱이도 집으로 적게 생각하면 적은 그릇 한 그릇, 크게 생각하면 크게 한 그릇, 이렇습니다. 이 원리를 내가 질서 있게 얘기를 못해 드려도 그 뜻은 질서 있게 들으시고, 좀 더 감응이 되셔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행하실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아량과, 우리 모두 같이 먹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크게 가지신다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불 하나를 켜는데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항상 부처님이 밝아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는 바로 부처님이 밝게 계시고 여러분 마음도 밝으니 그렇게 마음으로 지어서 자기가 고통을 받지 마시고 부처님이 일러 주신 대로 밝고 고통스럽지 않게 사시기 바랍니다.



왜 둘이 아닌지요?
모든 선지식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니 일체를 내 생명과 같이 보고 내 아픔과 같이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왜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둘 아닌 도리를 마음으로 체득하고 실천해 나갈 수 있는지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더불어 주고받고 삽니다. 더불어 살지 혼자 사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옷도 더불어 같이 주고받고 입고, 먹는 것도 주고받고 먹고,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을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왜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분명히 줬고 분명히 받았는데 어찌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러겠죠.
내가 전깃줄 얘기를 가끔 합니다. 전력이 들어왔을 때는 방에 불이 들어옵니다. 전력이 끊어지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양면에 전깃줄을 갖다가 이어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렇듯이 서로 주고받을 때, 한순간 같이 마음이, 즉 말하자면 정신계가 둘 아니게 이어진단 얘깁니다. 이어지니깐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단 얘기죠. 그리고 함이 없이 살고 있고 삶이 없이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표현을 할까요? 머슴을 사는 사람은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죠. 주인이 맘대로 하죠.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랬듯이 주인이 이렇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듣는 순간, 주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대신 내가 하는 거죠. 그러니깐 항상 그 한 찰나 찰나마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이 없이 하게 된단 얘기죠. 그래서 자기 속에서 한생각이 나서 이걸 해야겠다 이러고 하는데도 함이 없이 하게 되는 거죠. 남이 주는 거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은 사이가 없고 그 상대방도 준 사이가 없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둘 아니게 실천을 해야 할 텐데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로 알고 있지 실천을 할 수가 없단 얘기죠. ‘항상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이게 어째서 둘이 아닌가. 저쪽에서 나를 줬고 내가 저쪽에서 받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시죠. 근데 한순간 전깃줄에 닿는 거와 같단 얘기죠.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빨라요, 속도가.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속도가 빨라서 한생각에 그냥 갖다 놓고 고맙다, 고맙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고 하나로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 없이 그냥 고맙게 되는 거죠.
근데 제일 문제되는 거는 어떻게 해야만 둘이 아니게 실천이 되느냐 이겁니다. 모두 내 몸뚱이를 가지고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를 줘도 상대방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 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게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 나가게 되죠.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것도 유유하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냥 들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악한 거나 선한 거나 둘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거는 모두를 합류화시키는 데 있는 겁니다. ‘몸뚱이도 나 하나로만 보지 마라. 수천 개의 생명이 몸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자 내 생명들이니 모습을 보고선 너라고 그러지 말라.’고 이랬죠.
그랬는데 이게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말이죠.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는 그 얘기는 내가 할 얘기가 아니죠, 사실은. 여러분이 그대로 마음 놓고 생각 없이 그냥 “아, 이것 좀 먹어 보오.” 이러고 줬는데, 그냥 줬는데도 그냥 둘 아닌 줄 알아라 이거죠. 그걸 생각을 일일이 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둘 아닌 줄 알고 줬어도 그렇고 받았어도 둘 아닌 줄 알게 되면 받은 것이 저절로, 대가가 그리로 가요. 가는 줄 모르게 가고 오는 줄 모르게 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모른다면 큰 도리를 모른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전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하는 것도, 어떻게 해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가 모르고 있죠. 그런데 그거를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우리가 개미들도 보고 여러 가지 벌레들도 많이 보죠. 벌레 둥우리가 하나가 터지게 되면, 삽으로 딱 터지게 되면 그게 그냥 쫙 헤지면서 땅에도 묻히기도 하고 그냥 모두 다리도 끊어지고 목도 끊어지고 다 죽게 되고 사는 놈은 살고 이렇게 되죠. 이런 거 보는 거나 우리가 지금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게 죽는 거나 뭐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죠.
그래서 자기가 한 거는 자기가 그것을 해결해야죠. 자기가 해결해야 그게 맞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다면 자기가 고통을 받을 때, 그거를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귀하다는 거를 생각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를 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는 자기가 진화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생산이 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찾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걸림 없이 걷게 될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한다 이겁니다.



공부 상태를 점점하고 싶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회광반조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위의 도반 중에는 어두운 산길을 밤새 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이 주저하는 그런 곳을 시험 삼아 다녀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스님, 저희와 같이 마음을 닦아 가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공부상태를 한 번 점검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편을 설하여 주신다면 공부의 지침으로 삼아 더욱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항상 한도량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들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해요. 왜냐하면 천차만별의 다른 모습들이 제각기 한 개체로 살지만 그 마음과 생명은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이지요. 그런데 왕창 그 주머니를 벗어나서 나의 육신 주머니를 벗어나야 또 한 개체인 주머니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자기를 자기가 점검해 보고 가는 거 잊지 말도록 하고, 자기를 돌아다볼 줄 알고 또 점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돼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실질로서 귀신이 내 앞에 딱 나타났다고 할 때, 그건 찰나지 일 초다 뭐 이 초다 이런 게 없어요. 그래서 관할 사이도 없구요. 그렇게 한 찰나에 귀신이 덤빌 때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되는지,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묵살시키는 그런 이치가 있는지, 한번 자기 점검을 자기가 해 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또는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 왔을 때 나는 과연 내 몸이 아니, 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가, 움죽거리는가. 움죽거리지 않을 수 있는가. 어때요? 자기 자신을 볼 때 움죽거리겠어요, 움죽거리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거는 똑같은 방편인데 큰 구렁이가 내 앞에 뜬금없이 나타났을 때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언제나 연습하고 자기가 자기를 점검하면서, 자기 마음을 말입니다. 점검하면서 행할 수 있는, 행하되 함이 없이 한다는 사실을 알면 꽤 나은 사람이에요. 자기를 순간 생각해 볼 때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치를 하겠는가 이걸 묻는 겁니다, 지금. 어떻게 대치를 하겠는가.
그래, 그 도리를 모른다면 마음이 안 움죽거릴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내가 항상 말하듯이 찰나찰나 화해서 나툴 뿐이지, 내 몸은 바로 없는 것이에요. 시자로서, 자기 자불의 시자로서 움죽거릴 뿐이지, 내가 그만한 자행을 할 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돼요.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불과 자아가 같이 둘 아니게 지금 현실에 콤비가 돼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반쪽은 항상 처지는 겁니다. 걸음을 걸어도 두 발로다 뚜벅뚜벅 걸어야 걷는 거지, 어떻게 한 발로 맞춰서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한 발 한 손은 그 두 발이 하나로 돼서 한 발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대답을 못하면 그 뒷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찰나찰나 화해서 나툰다 이겁니다. 고정됨이 없다. 그리고 내 몸은 내 몸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체 중생의 집합소죠. 집합소니까 내가 물을 한 모금 먹어도 더불어 같이 먹는 한 개체지, 내가 먹은 게 없다 이거예요. 또 내가 봐도 내가 본 게 없고 내가 들어도 내가 들은 게 없다 이겁니다. 왜냐? 더불어 같이 작용을 해서 보는 거니깐 말입니다. 자기가 따로 있을 수가 있나요? 자기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도 더불어 했기 때문에 내가 했다는 말 못하고, 내가 산다는 말을 못하고, 내가 잘했다는 소리 못하고, 내가 죽는다는 소리 못하고, 내가 산다는 소리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귀신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게 되는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내 몸이 그냥 그대로 버려져 있기 때문이에요. 버린다 안 버린다를 떠나서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예요. 버려져 있는 자기 몸을 함이 없이 움죽거리고 함이 없이 하고, 함이 없이 보고 함이 없이 듣고, 모든 것을 그렇게 해 나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죽는다 산다도 팽개친 몸이 돼서 그렇게 공했다는 얘기예요. 공해서 팽개친 몸이라서 마음이 절대로, 어떠한 문제가, 귀신들이 함빡 한 방으로 들어앉았어도 그것은 움죽거리지 않는다 이겁니다, 굴하지 않고. 자비로서 굴하지 않는 거지, 악으로서 굴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굴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나오고 모두가 조복을 받게끔 된다는 소리도 나오겠지요. 일단 막말로 내 몸이 본래 그렇게 버려져 있고 시자로서 움죽거려 줄 뿐인데 그 마음이, 마음의 줏대가 주인공의 줏대라면 그러고도 남죠. 내 몸을 그대로 자기 주인공에게 버린 거니까. 주인공의 시자일 뿐이지 내가 산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가 앞에 닥친다 하더라도, 내가 가끔 그러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가끔 이렇게 자기 점검을 자기가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과 하나를 들고 독사굴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똑같진 않지만 그냥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뜻을 가르치느라고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갔던 거거든요. 그 부처님께서는 거기 들어갈 때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갔는데, 독사를 대신해서 주려고 들어갔다고 그렇게 말들은 하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들어가서 앉으니까 이건 그 뜻을 모든 사람들한테 일러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거지요. 부처님도 없고 독사도 없고 사과도 없었던 거예요.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이지요. 그저 말을 방편으로 지어 놓는 대로 곧이듣고, 한번 뒤집어 보지도 않고, 재껴 보지도 않고, 덮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그냥 말로만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 속 내면에 뜻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귀신들이 찰나에 달려들었다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움죽거리겠느냐. 이건 사량과 이론으로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된다면이죠. 됐다 하면 어떻게 그거는, 우리가 지금 쉬운 말로 ‘관하면 되지’ 그러는데, 그때 통구리에는 관할 사이도 없고…. 사람이 죽어 갈 때에 목숨 탁 끊어질락 말락 할 때에 뭔 생각이 있겠습니까. 내 몸을 와짝 버린다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을 테지요. 내가 죽는구나 사는구나 하는 것이 본래부터 없으니까. 지금 살아가면서 그게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알고 간다면, 그렇게 내 몸을 비우니까 그 모습이 나타나도 역시 비어 있기 때문에 둘 아니게 돼 버리지요. 내 몸을 비우지 않고 항상 마음이 내 몸에 대한 착과 이쁜 것에 대한 착과 좋은 것에 대한 착과 모든 것을 갖고 있다면, 열반도 살아서 열반이지 죽어서 열반이 아니에요. 그런 것도 지금 살아서 우리가 그렇게 닦아 나가야지, 죽고 나서 누가 닦아 줍니까, 대신 해 줍니까. 죽고 사는 걸 어떻게 대신 해 줄 수가 있고, 깨닫는 것을 누가 대신 해 줄 수가 있고, 잠자고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걸 어떻게 대신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자의 선조들께서도 네 몸이나 내 몸이나 둘이 아닌 까닭에 없다고 했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우리가 공부하는 데도 이 몸뚱이는 마음에 따라서 움죽거리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떠한 마음이 움죽거릴 수가 없다. 모든 거를 다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다고 내 마음으로 자칭은 하지만 진짜 이것은, 무의 세계의 연기법이라는 것은 공 도리예요.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서 돌아가는 공법의 도리란 말이에요. 즉 말하자면 산 사람이 볼 수 없는 그 미지의 세계를 그대로 여여하게 굴리고 또는 갖추어 가지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냥 여여하게 들이고 낼 줄 알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라야만 그거를, 모든 거를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한테 물어봐서 아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내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면 알 거예요. 내 차원이 얼마만큼이나 됐는가를 말이에요.
그래서 강도가 들어와도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다 이런다면 다죠, 뭐. 우리가 사는 게 그대로 움죽거려서 심부름할 뿐이지 내 실체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다 내버린 그 마음으로 실체를, 그냥 실체가 아닌 바로 육신을 다 버린, 거기다 그냥 버려서 주장자 하나로 간다 그러면서도 여여하다는 소리는, 움죽거리면서도 갖은 각색의 움죽거림을 다 함이 없이 한다 이거죠. 하지 못한다 한다가 없어요, 이거는. 내 앞에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주어지는 내 앞의 일들을 묵묵히 그대로 싫다 좋다 없이 그대로 하고 가야 돼요. 공부를 해도 그렇고, 일을 해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야만이 그게 진짜 하늘 꼭대기에 올라서서 꽃으로 화하게 해서 수많은 중생의 향기를 뿜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요.



꽃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유마경』에 보면 천녀가 꽃비를 내리니까 보살들한테는 꽃이 떨어지는데 사리불한테는 자꾸 붙어서 털려고 해도 더 달라붙어요. 그래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사리불이 막 때려고 그랬더니 천녀가 화현을 해 가지고 내려와요. 내려오면서 “사리불 존자께서는 왜 그렇게 꽃을 떼려고 합니까?” 그랬더니 “출가한 사문에게는 맞지 않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출가한 비구는 꽃을 달고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부처님의 상수 제자로서 계율을 지켜야 되는데, 상스럽지 못하게 꽃이 나한테 달라붙으니, 부처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꽃을 이렇게 턴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천녀가 하는 말이 “꽃은 분별하지 않는데 존자께서 분별하십니다. 만약에 사리불 존자께서 분별하는 마음, 꽃이라고 하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꽃은 스스로 떨어질 것입니다. 자, 보살들을 보시오. 보살들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꽃이 그냥 아름답게 흩날리고 있을 뿐인데, 유독 존자를 귀찮게 굴고 있지 않소?” 라고 한 그런 설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말하는 그 꽃비가 무엇을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꽃비를 내린 것은 여러 가지로 씁니다. 꽃비는, 즉 말하자면 마음의 환희를 말할 수도 있고, 향기, 마음의 등도 될 수 있지만 자기 속의 천녀가 내려온 것은, 즉 자기 마음에 그것이 감응이 됐으니까, 자기는 발견을 했으니까 사리자라고 그랬겠죠.
그럼 “사리자여!” 하면 사리자 속에 턱 내렸단 말입니다. 이게, 즉 말하자면 자기를 발견한 사람들은 붙고 안 붙고 그것을 떠나지만, 덜 놓은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고요. 그러니 그렇게 붙으니까 자꾸 떼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천녀가 내려온 것은 그 천녀가 아닌 자기를 낳은 근본, 낳아 준 그 부가 천녀로 화해 가지고선 거기에서 떡 나타난 거죠. 왜 그걸 떼려고 그러느냐. 여자든 벌레든 남녀를 막론해 놓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다 떼려고 하느냐. 길에 가다가 남자가 말입니다, “야, 내가 당신을 못 보면 죽어. 당신을 꼭 하루 저녁만 보고 싶소.” 하고 붙들고 늘어진다면 지금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겁니다.
그까짓 몸뚱이 이거 다 버린 겁니다. 그거 가지고 사는 게 아니에요. 남이 그걸로 인해서 죽는다면, 앞의 것도 제도 못하는 사람이 뒤의 거를 어떡해요?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파계했다고 그러죠. 또 남자도 여자가 그렇게 붙들고 매달릴 때, “난 당신 아니면 죽겠소.” 할 때, 정말 그것을 벌써 어떠한 용도인가, 그 마음 가짐가짐이 어떠한 용도인가, 정말 죽을 수 있나 하는 거를, 봐서 그것도 그러죠. 웬만하면 말로 설법을 해서 다 이렇게 해 주지만, 참 따뜻하게 해 주면서 그것을 다 녹여 주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그것도 자기 스승이라고요, 그게. 왜?
그래 나의 근본에서 나를 놓고선, ‘네가 여기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다 제도할 수 있고, 또 제도보다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띄어 줄 수 있고 귀를 띄어 줄 수 있지만, 만약에 여기에 걸린다면, 남녀에 걸린다면 난 못해.’ 하고 이끄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도 벌써 자기 부처님께서 그거 탁 가로막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럴 때도 그냥 그걸 딛고 넘어가야 돼요.
예전에 어떤 비구가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그냥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비구 스님은 아주 청정하고 계율을 지키려고 그러는데, 그냥 아주 못살게 매달려서 십 리고 이십 리고 어디를 가든 곳곳마다 쫓아서 오는 겁니다. 대학교도 나왔고 다 했는데, 쫓아다니니까 어디고 안 가는 데가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일본으로 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을 쫓아간 거예요. 그래 결국은 그 사람하고, 너의 소원을 풀어 주겠다고 해서 닷새를 묵고선 인제는 소원을 풀었으니까, 이 육신은 흙과 같고 썩은 물과 같다. 그러니까 이 육신이 뭐겠느냐? 그 닷새 동안에 설해서 하여튼 그 여자가 아주 다 녹아 버렸어요. 마음이 녹아 버려서 그 여자는 여자대로 간 곳이 없어지고 그 남자는 남자대로 참, 어디로 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내 나이 적어서 그런 경우를 봤다고요.
그러한 사람이 사람이지, 톡톡 털고 그냥 요렇게 하면 공부는 정말 못하잖아요. 그래서 알면서도 뛰어들어 보고 그러는 것이 공부가 되는 거예요. 그저 이렇게 해 나갈 뿐이지, 어떡해요? 이거를 그렇다고 내세울 바도 못되고, 내놓을 바도 못되고, 그냥 이렇게 먹고 입고 이렇게 그냥 하고 갈 뿐이죠.
200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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