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집착 없이 사랑하려면...
스님께서는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저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모든 것을 놓는다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저는 정말 진정으로 집착 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스님, 저희들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런 마음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답
애정 문제도 그렇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그걸 놓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끄달리는 겁니다. 그 놓지 못하는 마음이 원인이 되고, 또 그런 욕심을 가지기 때문에 언젠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을 하면 모두가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 욕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걸 놓는 데서부터 벗어나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놓고 살아도 사랑할 거는 사랑하고 보살필 거는 보살피고 다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놓는다는 것까지 놓으라는 겁니다. ‘놨는데, 다 놨는데, 이걸 놔야지, 놔야지.’ 이런 생각까지도 놓으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 활용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또 건져주는 이치, 보는 이치, 듣는 이치 등등 전부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놓지 않으면, 한 치 반 치도 놓지 않는다면 그 모두를 얻을 수가 없고, 그 모두를 놓지 못하면 나를 얻을 수가 없어서 나와 남을 둘이 아니게 볼 수가 없고, 둘이 아니게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네가 되고 내가 네가 되고 이렇게 동시에 같이 사생을 두루 건지고 행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같이 만나야 행할 수도 있고 같이 들을 수 있어야 행할 수도 있고 같이 볼 수 있어야 행할 수도 있고, 그게 어디서부터 왔나 그걸 알아야 행할 수도 있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각자 나가 있기 때문에, 너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각자 나로부터 이 세상만사, 괴로움과 외로움과 애착과 욕심과 사랑, 부처님이 있음을 아는 거, 잘된 거 못된 거, 논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나로 인해서 나온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 그 모두가 딴 사람의 탓이 아니라 자기의 탓입니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다 말입니다.
만약에 잘한 게 있다 할지라도 ‘내가 했지.’ 이러지 말란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또 잘했다는 업식이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한 업이 나오면, 이 세상 살면서 끄달리며 살기 때문에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나로 인해서 나온 거니까 따귀를 맞아도 아무 소리 없이 빙긋이 웃고 갈 수 있어야 된다 이거죠. 왜? 자기가 있으니까 맞았기 때문입니다. 벽이 있으니까 누가 벽을 쳤지, 벽이 없는데 누가 벽을 칠 수 있습니까? 허공에다 누가 칩니까? 그러니까 바로 자기가 있으니까 그 모든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한테 집착할 것도 없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집착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일체를 다 한군데다 집어넣어야한 방에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우면
상대의 마음도 너그럽게 조절할 수 있어
문
한 방에 끝내는 방법은 없나요?
어차피 사나이 대장부가 칼을 뺏으면 하늘을 받칠 수 있고 굴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신검을 만들 수 있도록 공부하라고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신검을 만들려면 신검 만드는 재료도 있고 망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대장간, 대장장이도 있어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혼신의 힘으로 한 방 한 방 내려치라고 하시지만 한 방에 끝나는 방법은 없는지요?
답
그렇기 때문에 돈오돈수가 있고 돈오점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돈오점수도 돈오돈수도 둘이 아니에요. 한 방을 내려치다 보면 두 방이 한 방이요, 세 방이 한 방입니다. 수만 마치로 두들겨도 바로 한 방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숫자가 따로 없는 겁니다. 무시무종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무심이라 그랬고 일시무시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숫자로 따지려고 그러면 우리가 이 숫자 없는 공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고 있다 하더라도 발자죽을 하나하나 세고 가나요? 첫 발의 그 시발점과 종점의 발이 둘이던가요, 어디? 그러니까 그렇게 걸어왔어도 일단은 한 발 한 발 걸어 딛고 오긴 했는데 걸어온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그냥 여기 있을 뿐이고 저기 갔으면 저기 갔을 뿐이지 그 걸어온 거를 일일이 계산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왜냐하면 이건 심성, 즉 말하자면 축지법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이건 천 년 삼천 년을 단축해서 하루로 만들 수 있고 그 하루를 일 초로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일 초를 찰나로 단축할 수 있고요. 그러니까 이 모두가 과거의 모든 업 짊어진, 그 입력된 거를 그냥 한꺼번에 한 방망이로 다 녹일 수가 있는 거예요. 한 방망이로 무조건 생기는 대로 그냥…. 아니, 한 방망이로 녹인다는 건 뭐냐 하면, 나를 형성시킨 놈도 그놈이고 지금 끌고 다니면서 하는 놈도 바로 그놈인데, 그 뭣 하나 내가 잘못한다 잘한다도 없이 그놈이 안 하는 게 없잖아요. 안 하는 게 없다구요. 그 도리를 안다면 껄껄껄 하고 한 번 크게 웃어 보세요. 그렇게만 한다면 한 방망이로 그냥그냥 녹이는 겁니다.
만약에 음식을 잔뜩 먹고서는 체했다면 왜 이렇게 체하게 하느냐고 그러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체할 정도로 그렇게 욕심을 내서 많이 먹은 내 탓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욕심나게 많이 먹게 한 놈도 너고 그렇게 해 가지고 체하게 만든 놈도 너고 말입니다. 안 그래요? 따로따로가 없습니다. 몸 전체가 형성된 거, 몸 전체가 움죽거리는 거, 몸 전체가 보고 듣고 하는 거, 일상생활에 걸어가고 걸어오는 거, 모두가 살고 상대를 만나고 하는 것도 전체가 고 한 군데서 하는 거거든요. 한 놈이 하는 거란 말입니다. 주인공 한 자리에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믿고 알 때 ‘아, 네놈이 전체 하는 거로구나. 그러면 뭐 잘못됐다고 할 것도 없고 잘 안됐다고 애걸복걸 할 것도 없고, 또 뭐가 잘됐다고 좋아할 것도 없구나. 모든 걸 네놈이 하는 거니까.’ 이러고 그냥 한 망치에 때려 버리면 될 거를, 그냥 거기 말려 가지고 부둥부둥 앨 쓰니 어느 천 년에 한 방망이로 다 그냥 녹이겠습니까?
이 도리를 알면 춤들을 덩실덩실 출 겁니다, 아마. 그러고 한 나절은 웃어댈 거고 한 나절은 복통을 하고 또 울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까지 좀더 쓸데없는 착, 쓸데없는 어리석음, 그런 것들에 끄달리지 말라 이거예요. 한 방에 없앨 수도 있으니까요. 설사 한 방에 안돼서 또 한 방을 쳤어도 그게 두 방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한 방을 쳤어도 한 방이요, 두 방을 쳤어도 한 방이에요.
하여튼 우리는 절대적으로 한 사람도 낙오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걸 하는 것이 분수가 뿜어져 나오듯 사방으로 들어와서 내가 어떤 걸 하든지 그놈이 하는 거지, 딴 놈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일체를 다 한군데다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한 방으로 되는 겁니다. 믿으세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으라구요. 아무리 잘났어도 남의 뿌리에서 제 나무로 에너지가 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문
부전자전의 이치
흔히들 부전자전이라고 해서 아들의 성격은 아버지를 닮고 또 그 아버진 조부를 닮는 것이 보통으로 돼 있는데, 조부의 전생과 아버지의 전생, 아들의 전생이 각기 다르리라고 생각되고 또 업도 다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현상으로서는 그 성격이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가령 포악한 가정 같으면 포악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고, 아주 온순하고 덕이 훌륭한 집안 같으면 그것이 또 그대로 나타나는 게 보통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답
세상 살아나가는 걸 보십시오. 사람 사는 도리도 그렇지만 우리가 물건을 생산해서 놓을 때도 옷 파는 데는 옷 파는 데대로 죽 모이지 않습니까. 옷 파는 데다가 깡통 놓고 파는 거 보셨습니까? 쇠 파는 데도 못 보았을 겁니다. 쇠로 만든 거는 쇠대로 놓고 팔고, 깡통으로 만든 거는 깡통으로 놓고 팔고, 금으로 만든 거는 금으로 놓고 팔고, 은은 은대로 따로 놓고 구리는 구리대로 따로 놓고 전체가 똑같은 것끼리, 그 원소가 똑같은 것끼리 놓습니다. 형체는 다 달라도 만약에 무쇠라면 무쇠의 그 원소, 질이 무쇠이기 때문에 무쇠로 만든 건 다 바깥에서 돌게 마련이거든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무쇠로 만든 거라고 해서 바깥에서 큰일을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쇠는 무쇠끼리 돼 있고, 금은 금대로 돼 있고, 넝마는 넝마대로 돼 있고, 옷은 옷대로 돼 있고 말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손들이 어떤 잘못을 했다 이러면 잘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그 원소이고 잘못을 하는 분도 원소가 그거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과 저지르는 사람이 똑같은 원소인 것이죠. 그렇게 만나게 된다 이거예요. 이게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자식이 잘못하든 부부지간에 잘못하든 간에 그렇게 만나는 인연들은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그 인연으로 인해서 꽉 만나거든요. 요 깡통이 잘못했는데 조 깡통을 만나는 게 아니라 원소가 똑같은 것끼리 만난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누구 원망할 게 하나도 없어요. 자식이 속을 썩여도 원망할 거 없고 부부지간에도 원망할 게 없고요. 다만 속에다 넣고 ‘주인공, 당신이 형성시킨 거니 당신이 이끌어 가시오!’ 하고선 아예 그냥 탁 놔 버리는 겁니다. 맡겨 버리면 언젠가는 똑바로 가게 돼 있거든요, 끌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뭐 그냥, 만날 말로다가 “너, 이놈의 새끼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뭐 어쩌구, 나는 이렇게 죽겠는데 너는 이 에미 애비가 불쌍하지도 않으냐? 너는 나가서 돌고 있구.” 아, 이러고 하니까 그게 한두 번이라야죠. 만나기만 하면 그러고 만나기만 하면 그러니까,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들으면 듣기 싫은 건데 자꾸 듣던 말 또 듣고 그러면 현기증이 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차라리 보지 않아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소리든 언짢은 소리든, 좋은 소리는 서로 좋게끔 화목하게 돌리게 말을 하고, 언짢은 소리 같으면 아예 밀어 버리세요. 꼭 할 말이 있으면 남의 말로 돌려 버리세요. “오늘은 내가 어디 갔는데 글쎄 이런 이런 일이 있구나. 그러는데 말이야….” 아, 이렇게 웃으면서, 아주 정이 가게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식이 생각이 돌아가게 하면 화목하게 되고, “그래요?” 자기도 양심이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돌려서 이렇게 해 나가야지 그걸 막 바로 대고 “너 이렇게 해서 되느냐, 어쩌느냐?” 이러면 나부터라도 가 버려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화목하게, 절대로 바깥으로 큰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여자나 남자나 큰소리가 바깥에 나가면 좋지 않아요. 그게 얼마나 상스럽겠소? 그리고 여자나 남자나 욕을 해대고 “야, 이놈 저놈, 요놈의 새끼 저놈의 새끼.” 이러고 욕을 해대고 이러는 가정을 본다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나이 많이 잡수신 분들을 보고선 “그랬어, 저랬어? 왔어?” 아, 요러고 말을 할 때는 인간으로서 그건 겸손하지 못한 겁니다. 어디까지나 높으면 높을수록 좀더 낮아지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들의 심부름을 일일이 해야 되겠죠. 똥 친 막대기처럼. 똥 막대기 있지 않습니까, 왜? 예전에는 시골에서 막대기 하나씩 놓고 똥을 씻었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부모한테 기대지 않으면 누구한테 기댑니까? 그러니까 애들의 심부름꾼이지 그건 위대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름만 엄마 아빠로 지었지 그거는 심부름꾼이에요. 자기가 일생 동안 그 심부름을 하면서 뜻을 심어 놓고서 자기는 또 벗어 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뭐 자기가 위라고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희생을 하면서 길렀는데….’ 이런단 말입니다. 아, 누가 그렇게 기르라는 거 길렀나요? 아니, 누가 그렇게 하라는 거 했어요? 자기 탓이지.
그런데 ‘너희 놈들은 나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뭐….’ 이러는데 그거는 아버지나 어머니 생각이지 걔네들의 생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걔네들의 생각에서 어머니나 아버지는 따라 주는 그런 위대한 어머니 아버지가 된다면, 따라 주면서 리드해 나갈 수 있는, 폭이 넓은 지혜로운 어머니 아버지가 된다면 그런 집에서는 절대로 한데로 나서지 않습니다. 아니, 한데로 나선다고 해서 나가는 거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집에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나갔다면, 그리고 마음이 삐뚤어졌다면…. 참 사랑할 줄 알고 측은히 엄마를 도울 줄 알고, 또 측은히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그 마음이라면 그 자식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과 똑같을 때에 비로소 그거는 심부름꾼도 아니고 심부름꾼 아닌 것도 아니죠.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똑같은 그 마음으로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이겁니다. 부부지간도 그렇고 다 그래요. 간판만 이쁜 것 찾지 말고, 또 남편이 간판만 잘생겼다고 해서 잘생긴 것만 찾지 말고 마음이 잘생긴 것, 진실한 거,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돌부처도 돌아앉거든요. 사랑할 수 있다면 돌부처도 “아이고, 너냐?” 그러고선 사랑하며 돌아서요.
그런데 사랑 안 한다면 돌부처도 딱 돌아앉아 버려요. 또 돌부처한테 장가들려면 그렇게 하셔야 될 겁니다. 여기 주인공한테 모든 걸, 사랑도 거기서 나오는 진짜 사랑을 여러분이 맛을 못 봤을 거예요. 어떤 분은 맛을 보기도 하고 그러지만, 그 외의 분들은 참 억울할 거예요. 얼마나 사랑해 주는데요. 야, 어디 가서 추우면 ‘어유, 춥다. 어서 가자.’ 아, 이렇게 해 주고, 또 어디에 불이 붙었으면 ‘아이구, 뜨겁다.’ 하고 막 털어 주고 말입니다. 만져 주고 씻어 주고 참, 그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변소엘 가도 쫓아가 같이 다니고…. 야, 사랑을 그렇게 해 보셨어도 밑까지 씻어 줄 수 있는 그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이런 사랑 보셨습니까? 해 보셨어요? 이제부터라도 모두들 그런 사랑들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자식지간도 그렇고, 부부지간도 그렇고, 서로에게 물들지 않고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문
불자로서의 자부심!
저희 불자들은 어떻게 보면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고 할 정도로 여여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불자로서의 자긍심이 별로 없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어서 열심히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다가도 결혼을 하면서 부인이 타종교인이면 그쪽으로 기울어져 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스님, 불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모두 불법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그러면 한번 예를 들어서 얘기하죠. 여기 어떠한 신행회 회원 중에 기독교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승진도 안 시켜준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죠. ‘기독교엘 나가든지 안 나가든지 장소는 둘이 아니다.’ 라고 얘길 했습니다. 난 어떻게 하든지 그분을 위해서지 나를 위해서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바로 이 자리고 이 자리가 그 자리니까 아무 자리에 앉았어도 네가 거기 앉았으면 바로 네 부처는 거기 계신 거다 이겁니다. 그런 상황인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몇 식구를 살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 가나 여기 오나, 여기 나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거기 가지 말라는 거도 아니다. 단 하나 있다면 개종을 한다는 생각도 말고 또는 나는 불교인이라는 생각도 말고 기독교인이라고 생각지도 말고 한 마디로 “이 장소가 그 장소고 그 장소가 이 장소기 때문에 거기 가 앉았어도 내 자리고 거기가 도량이고 여기에 앉았어도 내 자리요 도량이니까 그저 나오라면 나가야죠, 직원인데.” 이렇게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얘길 쭉 하니까 또 거기서 많이 배웠구요. 그래서 어느 날 회사에다가 그렇게 얘기를 쭉 하니까 “여보게! 자네는 참 별스런 사람일세. 자네 같은 사람은 내가 끌고 안 끌고가 다 소용없는 짓인가 봐!” 그러고는 승진을 시키더랍니다.
그것만 봐도 참으로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우면 상대방의 마음도 너그럽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정신병자가 하나 와도, 항상 내 집안에 어떤 속상한 일이 있어도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 네 주인공하고 내 주인공하고 둘이 아니니까 네 주인공이 똑바로 모든 거를 끌고 갈 거다. 그러니까 그 자리를 믿고 거기다가 다 집어넣으면 그대로 잘 끌고 가는 거라고 그럽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남편이든 아내든, 아들이든 딸이든 나가 돌면서 빗나가고 엇나가게 하지 마시고 무조건 거기다 맡기고 관하세요. 그게 돈이 들어서 못합니까? 아니면 힘들어서 못합니까? 모두들 제대로 가지 못하니 얼마나 그것이 손해입니까. 그러니 부드러운 말을 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라는 겁니다. 남편에게나 또는 아내에게도 부드럽게 해 주고 다복하게 사심으로써 돈이 달아나가다가도 돈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까 조놈의 집에 들어갔다간 싸우는 중간에 껴서 내가 못살겠으니까 안 들어가는 게 낫겠다 하고 달아나가거든요. 그러니까 화목한 집이 돈도 화목하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을 쫓아다니지 말고 돈을 끌어올 생각을 하지 마시고 스스로서 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불자로서의 자신감도 가지면서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당한 집안에서, 그래도 부모 슬하에서 당당하게 공부하고 당당하게 이, 참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서 당당히 여기 이렇게 선택한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니 젊은 사람들을 기죽이지 마시구요. 뭐 그렇다고 우리가 기죽을 사람들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종교적으로 애로점이 있으면 거기다 모두 한번 의뢰를 해 보고 부탁을 한다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보이는 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심성과학입니다. 생활과학이구요. 우리 생활과학을 우리 자신으로써 역력하게 풀어볼 수 있는, 그러고 실생활에 적응이 될 수 있는 이런 실천궁행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 공부해 봅시다.
여러분이 생각을 잘 해서, 이 공부를 열심히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고생한 것처럼 후손들을 또 고생하게 하지 마시고 어디 나가서 서더라도, 돌 위에 서더라도 살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돌아서서 뼈저린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이렇게,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고 위로는 묵은 빚을 갚을 수 있게끔 여러분이 노력을 하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문
업은 어디로부터 생겼는지요?
업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자리와의 관계를 비추어 볼 때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그리고 그 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합니까?
답
지수화풍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업이라는 거는 지수화풍으로서의 우리가 돌아가면서 일체 모든 게 전부 공했기 때문이죠.
공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는데 찰나찰나 돌아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공한 거를, 우리가 몸으로만 수행을 하고, 또 일심에 들게 하는 그런 방법이지만 모든 것을 놓았을 때에 일심으로 들어서 일심으로 나게 할 때에 비로소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또 빨라지게 되는 거죠. 또 한 가지는 만약에 그렇지 않고 어느 한 군데로 몰아서 할 때 내 일신은 앉았으면 편안하고 아주 똑바로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수행이 되겠지만 정작 급한 일이 닥치거나 활용을 해야 할 때에는 한 푼어치도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막막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고, 놓지 않으면 얻을 게 없다고 하는 겁니다. 조그만 거 하나라도 놓지 않으면 얻지 못해요. 이 세상에 몽땅 놓았기 때문에 몽땅 얻을 수가 있는 거지 몽땅 놓지 않는데 몽땅 얻을 수가 있나요? 얻는다는 것은 모든 걸 굴릴 수 있다는 점, 놓는 데에 여러 가지가 다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본래 놓고 가는 거기 때문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본래 놓고 가는 거거든요, 지금. 우리가 놓고 가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을 하면 벌써 말한 이전이 돼 버리기 때문에 본래 놓고 가는 겁니다. 한 발짝 떼어 놓았다면 떼어 놓은 것이 벌써 놓고 가는 거기 때문에 이전이 되는 거죠. 내 한 발짝 떼어 놓기 이전이 된다구요. 그래서 주인공은 전체 돌아가는 거를 포함해서 이름하여 이름을 붙인 거고, 업식이라 하는 거는 개별적인 하나의 문제를 사량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죠.
그렇지만 놓는다는 거하고 생각을 포기한다는 거하고는 엄연히 다르죠. 그것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놓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거든요. 그런데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놓아라, 놓아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놓으라는 소리는 자기가 포기를 하거나 또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욕심에 끄달린다거나 또는 집착에 끄달린다거나 애정에 끄달린다거나 또는 모든 거에 대해서 하여튼, 일상생활에 모든 게 끄달리니까 본래 그냥 놓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놓아라!’ 이런 소리를 또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본래 놓고 가는 거란 말이죠, 본래. 사람들이 그걸 놓지 않고 그냥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근데 끊으려고 하면 더 못 끊는 법입니다. 끊는다, 끊는다 하면서 못 끊는 거죠. 왜? 끊는다고 하고 끊으려고 하니깐 못 끊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그대로 그냥 놓고 가는 건데 뭘 끊어라 어쩌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녹이고 하는 것을 놓아라, 본래 그냥 놓고 가는 거 아니냐, 그러니 놓아라 하는 겁니다. 그대로 놓는다면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 버리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유스럽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