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성취해야 할 법이 왜 일심(一心)인가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무명(無明)이 자신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에 유전한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제도하려는 원을 일으킬 수 있다.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 큰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거짓과 참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神靈)하게 이해(理解)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체 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몸인 줄 알고 자비의 마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일심이라고 이름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일심(一心)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임을 이해하도록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미타경소>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중생심의 바탕 됨(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하여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 일체 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입니다. 일심(一心)은 대승의 유일한 법(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입니다. 무아의 생명이며, 나의 생명이고, 우주적 생명입니다.
일심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일체의 경계를 포함합니다. 자신의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일체경계는 보이는 마음입니다. 곧 일체 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모습입니다. 일심의 경지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둘이 아니고,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상대적 개념도 사라져 버립니다.
원효는 ‘일체 경계는 일심’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하였습니다. ‘우러러 믿어야 한다’는 것은 곧 종교적 신념입니다.
원효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하여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이었습니다. 이치가 이러한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佛寶)입니다.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法寶)입니다. 일심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僧寶)입니다. 일심은 곧 삼보입니다.
<양산 정토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