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안목 만이 환술 세계서 해탈케 해
선재동자는 최적정바라문으로부터 남쪽의 ’묘한 뜻 꽃문(妙意華門)‘이라고 하는 성에 있는 덕생(德生)동자와 유덕(有德)동녀를 찾아가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 법을 물으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다. 선재동자는 점점 남쪽으로 가다가 그 성에 이르러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를 만나보고 그들에게 예배하고 나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 때 동자와 동녀는 선재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우리는 보살의 해탈을 중득하였으니 이름이 ’환술처럼 머무름(幻住)‘이다. 이 해탈을 얻었으므로 모든 세계가 다 환술처럼 머무는 줄로 보나니 인연으로 생긴 탓이다. 모든 중생이 다 환술처럼 머무나니 업과 번뇌로 일어난 탓이다.
모든 세간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무명과 존재(有)와 욕망(愛) 따위가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는 탓이다. 모든 법이어서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나‘라는 소견 따위의 갖가지 환술과 같은 인연으로 생기는 탓이다. 모든 세 세상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나’라는 소견 따위의 뒤바뀐 지혜로 생기는 탓이다. 모든 중생의 생기고 없어지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운 것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허망한 분별로 생기는 탓이다.
또한 모든 국토가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뀌어 무명으로 나타나는 탓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지혜로 끊는 분별로 이루어지는 탓이다. 모든 보살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스스로 조복하고 중생을 교화하려는 여러가지 행과 원으로 이루어지는 탓이다. 모든 보살대중의 변화하고 조복시키는 여러가지 일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서원과 지혜의 눈으로 이루어지는 탓이다. 선남자여, 환술같은 경계의 성품은 헤아릴 수 없다.
선남자여, 우리 두 사람은 다만 이 환술처럼 머무는 해탈을 알 뿐이니 저 보살마하살의 그지없는 일의 환술그물에 잘 들어가는 그 공덕의 행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며 어떻게 말하겠는가.”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문을 설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선지식이다. 두 사람의 선지식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법문을 함께 설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덕생동자와 유덕동녀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서로 의지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지혜는 덕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고, 자비는 덕을 쌓음으로써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지혜와 자비의 행이 균등해서 더하고 덜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의 이름이 ‘묘한 뜻 꽃문(妙意華門)’인 것도 묘한 지혜와 자비로운 실천 행을 꽃피우는 것이 모두 원만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환술처럼 머무름(幻住)’이라고 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설하고 있는 ‘환술처럼 머무름’이라고 하는 보살의 해탈 법문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眼目)과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법문에서는 세계, 중생, 세간, 모든 법, 삼세(三世), 생로병사 우비고뇌 등이 모두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며, 또한 국토, 성문과 벽지불, 보살들의 여러가지 행 등도 환술처럼 머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들이 모든 세계의 일체의 것이 모두 환술처럼 머무는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볼 수 있는 깨끗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보면 세계의 모든 것은 제각기 고유한 본성이 있어서 그러한 모습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러 저러한 인연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일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것은 모두 비실재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법문 중에서 ‘환술같은 경계의 성품은 헤아릴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실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고, 존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존재의 세계의 미묘한 실상(實相)’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인연에 의해서 허망하게 모습을 짓고 있기 때문에 ‘환술처럼 머무름’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아는 지혜가 환술과 같은 경계 속에 머무는 것도 또한 ‘환술처럼 머무름’인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안목을 지님으로 해서 비로소 진정한 보살행을 행할 수 있게 된다.
미혹해서 이러한 실상을 모르는 중생은 세상 일체의 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반대로 세상을 무조건 부정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보살은 지혜가 있음으로 해서 모든 존재의 있음(존재)과 없음(空)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어떠한 경계에 구애됨이 없이 일체의 선법을 부단히 지어가면서 자비로운 덕을 중생들에게 널리 베풀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