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속물(俗物)이란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세속적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를 말하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누군들 속물이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는 생활하면서 상대방이 속물이냐 아니냐를 굳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마음공부하는 이들이 스스로가 속물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공부인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원천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생존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욕망은 그 시대의 문화와 전통에 의하여 여러 의미부여를 통해 포장되어 있을 뿐 그 모양새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이러한 면은 선(禪)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의 면목을 찾는 데에 있어서 누구나 뛰어넘어야 할 부분이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욕망의 절제를 시도하는 것으로서 과거, 현재의 많은 수행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욕망의 절제를 위하여 많은 수행과 종교적 고행을 평생 추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망의 절제를 힘들고 고통이 수반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수행의 증표로 삼아 작은 위안을 받으며, 욕망의 절제를 통한 욕망의 부정이라는 목표를 향해 평생토록 끝없이 나아간다. 또 이를 통해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아 - 속물이 되지 않고 - 욕망의 소멸을 얻어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로서 나는 욕망을 절제(節制)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안다. 또 홀로 있음의 즐거움도 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속물이라는 것도 알며 이 또한 즐겁다. 그러면 같은 욕망의 절제이지만 욕망의 부정을 향해가는 이들과는 달리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 행하는 절제를 통해 축약되고 집약되어 자신 속에서 충분히 무르익어 있다가 어느 때 상황이 되어 한 순간에 특정 방향이나 대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발산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행하는 형태의 욕망의 절제이기에 가능하다. 개체로서 존재하는 생명체는 욕망의 결과물이기도 하기에 생명체로서 나는 이렇게 절제를 통하여 충분히 익은 욕망으로 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펼칠 뿐이다. 그것은 욕망의 주인 됨이다. 결코 욕망의 제거가 최종 목표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욕망의 절제를 통하여 그 축약되고 무르익은 욕망이 집중적으로 분출되기 위한 적절한 대상이나 상황이 반드시 오리란 보장은 없으며 기대하지도 않는다. 기다림의 절제란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의미있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마음공부를 통해 욕망의 절제를 즐길 줄 아는 자들에게는 기다림의 자세와 모습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마음공부를 통해 진정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사화산(死火山)이 아닌 때를 기다리는 휴화산(休火山)의 기다림으로 때가 되면 폭발하듯 꽃을 피우게 되나니 하릴없이 좋다 나쁘다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속물에게는 하루하루의 즐거움이 있나니 바람(風)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기에 움직이는 그 자체가 곧 쉼(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