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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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혜주 스님
빈틈없이 행동하는 수행자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가 사회와 동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수행자로서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정부 회룡사 혜주(慧珠) 스님은 세수가 80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행동하는 수행자로 유명하다. 서울외곽고속도로 북한산 관통 반대에 앞장섰고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금도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며 실천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1925년 일본에서 태어난 스님은 청년시절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간호교육을 받는 등 근대 교육을 받았다. 의료시설과 종사자가 부족했던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20세에 한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의료 활동에 전념했다. 한국전쟁 때는 대구 동산병원, 9군단 민사처 병원 등 전장의 야전 병원에서 맹활약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며 ‘왜 사는가’ 라는 인간 근원의 물음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됐고 1959년 은사이신 도준 스님과의 인연으로 회룡사서 출가했다. 62년 도준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66년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혜주 스님은 비록 은사스님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은사스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하신다. 해제철에도 선방에 앉아 홀로 수행을 했을 만큼 철저했던 은사스님은 가난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논농사를 위해 모내기를 할 때도 죽비를 쳐 가며 울력을 하는 등 일상이 곧 수행처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혜주 스님은 사찰 수호와 불교홍포를 위해서 과감히 산문을 나섰다. 6·25 당시 미군에 의해 불타 버린 회룡사를 전쟁 이후 은사스님을 도와 대웅전 등 지금의 사격을 갖추는데 전력했고, 1963년에는 경내지의 수복 등기를 마쳐 삼보 재정의 유실을 막기도 했다.
스님은 회룡사 선방에서 40년 이상 안거를 성만했고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참선 수행을 하는 등 수행에 열심이다. 포교에도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군사도시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군종법사가 파견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군 법당을 찾아가 군 장병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있고 교도소, 병원 등 소외 지역 포교에도 매진해 왔다.
혜주 스님은 1970년대 초 의정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 7명과 함께 불교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자비회를 창립했다. 초창기에는 기금 모금과 친목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80년대부터는 매월 2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다양한 지역사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은 또 지역에 불교종립학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원해 1974년 지금의 광동여고 전신은 광동전수학교를 설립했고, 1984년에는 자비회 기금을 바탕으로 자비유치원을 개원 20여년을 원장으로 활동하며 불교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회룡사 주지 성견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심으로 살아가는 스님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며 “최근 북한산 관통도로 문제로 건강을 돌보시지 않고 다소 기력이 떨어진 것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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