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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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禪(1) <39>
알음알이 공부는 삶의 변화와 무관
개념화된 인식 초월 선사들 가르침

생명과학이란 생명이 아닌 생명체를 다루는 것이며 생명현상 보다는 죽음이라는 생명체의 소멸 현상을 다루는 것이라고 이미 이야기했다. 한편 과학이란 것 역시 사물을 정리 정돈한 지식이라는 형태로 세상과 자신을 이해함으로 인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세상도 그러한 지식체계의 한계 내에 갇혀 있음도 지적했다. 이제 비로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생명과학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생명을 불교에서는 명확히 포착하고 있다.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봄으로서 생명을 명확히 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경우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들의 친절한 가르침에 의해 생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잘 알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성(理性)에 바탕을 둔 지적 사유체제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미 이러한 방식에 길들여져 있어 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기 체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대는 활자 매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넘치도록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많은 강좌나 모임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셨는지는 귀에 따가울 정도로 접할 수 있다. 주위에서 조금 공부했다고 하는 지식인들의 공통점은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고는 ‘그런 것은 다 알아요. 말도 뛰어넘어야 하고, 중요한 것은 자기 생활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그렇게 될 수 있느냐지요’라고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한다. 정말 옳은 이야기라면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의 자기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여전히 경전 풀이 공부에 매달려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선어록 해설이나 경전 풀이 책을 쓰기도 하면서 한층 더 지식에 바탕을 둔 알음알이에 힘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알음알이로 공부하니 쉽게 무언가 안듯하지만 결국 삶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선사들이 비유와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원래 모습(본면목, 생명)이 우리의 개념화된 인식을 뛰어넘기에 그렇게 하거니와 또 굳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길들여진 인식을 바꾸기 위함도 있다. 듣는 이가 자신의 길들여진 눈과 귀를 보고 들으니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선사의 어록을 납득 가도록 풀이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꾸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모른다는 하심을 바탕으로 하여 그저 믿어 체념하지 않는 용기와 간절함으로 공부를 지어 나아가 참 생명을 만나야 한다. 알거나 이해하려 하지 말라.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겠지만, 생명의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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