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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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정 바라문의 법문
선재동자는 무승군장자로부터 성(城) 남쪽의 법(法)이라고 하는 촌락에 있는 ‘가장 고요함(最寂靜)’ 바라문을 찾아가서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 법을 물으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촌락에 이르러 최적정바라문에게 예배하고 나서 가르침을 청하자, 바라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이 ‘진실하게 원하는 말(誠願語)’이다. 과거·현재·미래 보살들이 이 말을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가지 않나니, 이미 물러간 이도 없고, 지금 물러가는 이도 없고, 장차 물러갈 이도 없다. 선남자여, 나는 진실하게 원하는 말에 머물렀으므로 뜻대로 짓는 일이 만족하지 않는 일이 없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진실하게 원하는 말의 해탈을 알 뿐이다. 저 보살마하살들의 ‘진실하게 원하는 말’이 행함과 더불어 어긋나지 않으며, 말은 반드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아서 한량없는 공덕이 이로부터 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알며 말하겠는가.”
바라문이 설하고 있는 ‘진실하게 원하는 말’이라고 하는 보살의 해탈은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원하는 말(願語)의 위대한 힘에 관한 것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은 진실을 담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오는 원의 말(願語)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바라문의 언어는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원을 따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해서 허망함이 없고 이로 말미암아 해탈을 이루게 된다. ‘진실하게 원하는 말’이 이처럼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인용한 경문에서도 ‘과거 ·현재·미래의 보살들이 이 말을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하게 원하는 말’은 초발심할 때로부터 커다란 서원(誓願)의 말을 세우고 뒤에 반드시 그 말과 같이 행하게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진실하게 원하는 말’은 이와 같이 거기에 머무르게 되면 발심에서 퇴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간 출세간 법의 일체를 지음에 성취되지 않음이 없고, 원해서 구하는 것을 모두 만족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진실하게 원하는 말’은 시방세계에서 거룩한 활동을 끊임없이 행하고 있는 삼세 여래의 법신의 바탕(體)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라문이 살고 있는 촌락의 이름이 법(法)인 것은 ‘진실하게 원하는 말’을 비롯한 그의 삶 모두가 진실한 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가장 고요함(最寂靜)’인 것은 ‘진실하게 원하는 말’이라고 하는 해탈을 얻고 있는 이 바라문의 마음의 경지가 혼란스러움이나 잡음이 사라진 한없는 진실함과 고요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그가 언제나 진실함과 고요함에 자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진실하게 원하는 말’이라고 하는 보살의 해탈은 한없는 고요함에 뿌리를 두고 자연히 행하여지고 있는 진실의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세속에 몸을 담고 살아가면서 ‘진실하게 원하는 말’에 입각하여 적극적으로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지만, 그의 경계는 항상 진실하고 고요함을 떠나 있지 않는 것이다.
이 바라문이 설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진실하게 원하는 말’대로 행하고, 또 그 허망하지 않고 진실한 말은 한량없는 공덕을 낳게 한다고 하는 것은 종교에서 회자되고 있는 ‘바람의 말(願語)’의 기능과 효용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여러가지 바람의 말이 많다고 하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바람의 말들은 대부분이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도움을 입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라문이 설하고 있는 바람의 말은 이와 달리 진실한 의지를 일으켜 어떠한 가치를 스스로 실현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람의 말은 그대로 인간 생존의 모습을 스스로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도록 하고 한없는 공덕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람의 말이 ‘기도문’이 아니라 ‘발원문’으로 되어서 고요하고 밝은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의지를 끊임없이 일으키도록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인 것이다.
우리들은 도처에서 발원문을 만나고 또 그것을 낭독한다. 늘 발원문을 읽고 발원을 하지만, 그 발원은 스스로의 진실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의지의 표출이 아니다. 다만 발원문이라고 하는 것은 건성으로 낭독하고 있을 뿐이다. 그 발원에 자신의 진실한 생명이 담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퇴전하게 되고 어떠한 공덕도 갖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발원이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것이라면 뜻하여 짓는 일을 만족시키기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적정바라문의 법문을 통해서 ‘진실하게 원하는 말’의 힘에 대해서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200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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