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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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공한데 무슨 착을 두겠습니까

안팎 경계를 몽땅 뿌리에다 놓고 관하라

무엇을 놓고 관하라는지요?

놓고 관하는 것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안팎이 둘이 아니니 더불어서 함께 다 놔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혹은 밖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그런 것을 다 놔야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스님,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아야 하는 것이고, 또 무엇을 관하라고 하시는 것인지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또 질문을 하는군요. 우리가 관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 뿌리가 그냥 배겨 있듯이, 나무 이파리가 바람이 불면 흩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도 흔들리는 안팎 경계들을 몽땅, 그 자체를 뿌리에다가 놓고 관하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뿌리에다 놓고 관하되, 만법을 활용하는 것도, 관을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다 나오는 것을 말하며 오관을 통해서 내고 들이고 하는 그 자체를 한군데서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고 관하라 하는 거죠.
놓는 방법을 비유한다면 세 가지인데, 그렇게 해서 나를 발견했을 때에는 또 그 아는 것마저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안 보이는 거 보이는 거, 또 남이 어떻게 오고 가나, 잘될 건가 못될 건가, 죽을 건가 살 건가를 아는 것이 숙명통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놓으라고 했습니다. 신통력도 놔라, 한 가지 한 가지 신통력을 다 놓고 그 신통력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오신통에서 벗어나면 오신력이 되지요. 그냥 무심으로 그 역(力)이 되는 거예요.
그럼 무심을 놓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통틀어서, 사생에 대해서 모든 들이고 내는 것을 다 놨을 때는 오신통에서도 벗어나는데 무심에서도 또 놔야 되거든요. 무심조차도 놔야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유(四有)와 사무(四無)를 한데 합쳐 보면 모든 별성이라든지 혹성이라든지 이런 문제 등등이 전부 나오는 겁니다. 보이는 거예요. 그 안에서 뭐를 하고 있고 뭐가 되어 있고 뭐가 어떡하고 있고, 이런 게 전부 법망으로 인해서 그냥 쫙 통신이 오는 거죠. 보는 것도 명경을 갖다가 놓고 보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것도 놔라 이거예요. 그래서 놓는 게 세 가지인데 계단 없는 세 계단이 있다, 그러니 그거 얼마나 방대합니까. 그런데 그것도 놓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그런 경지까지도 놔야 됩니까? 그 광대무변한 경지가 얼마나 좋고 환상적인데요.” 이렇게 말들을 하거든요. 그러고선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면 그걸 잡으려고 하죠. 그렇지만 그걸 놔야 돼요. 그걸 놔야 되는 이치가 있어요. 그거를 놓지 않으면, 그 모두를 속속들이 놓지 않으면 일체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가다가 중지해 버리는 게 되고, 뭐가 되느냐 하면 미치광이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광대무변한 세계가 보이고, 부처님의 형상도 보이고, 설법하는 것도 보이고 그런다는데, 그건 오신통을 놓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심에서 오는, 법망에 있는, 무심이니까 이게 다 뚫렸단 말입니다. 사방이 다 뚫렸으니까 그것이 다 들어오죠. 한 눈에 들어오고 한 귀에 들어오고 다 들어오게 돼 있는데, 맛도 알고 다 알지만 그것을 놓지 않으면, 그걸 놓아 가지고서 전체 한 덩어리가 돼서 그 한 덩어리까지도 놔야 급할 때는 한 덩어리로도 쓰고, 두 덩어리로도 쓰고, 또 만 덩어리로도 쓸 수 있지 않으냐 이 소리입니다. 그거를 놓지 않는다면 내가 움죽거릴 수 없어요. 전체를 움죽거릴 수가 없다고요.
어느 한 부분만을 알고선 ‘아, 이만하면 족하다’ 이러고 놓지 않고 붙들려고 한다면 나에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만 대통령을 해먹을 수 있지 딴 데서는 그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딴 나라 대통령이 됐어도 그것도 마저 놔라 이겁니다. 그건 왜? 우주 대통령이 돼야 되니까요. 또 우주 대통령마저도 놔야 그게 고정됨이 없이 전부 삼천대천세계로 이른다 이런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아무리 보고 듣고 그렇게 해도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내려놓는 이 방법이 무척 무서운 도리이며, 빠른 길입니다. 또 자기 주처를 믿고 일체를 놓는다는 게 제일 소중합니다. 일체를 놓고 자유롭게 사세요.

다음 생에는 나오지 않았으면...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힘든 시기입니다. 모든 것이 가식인 것 같고 무의미한 삶으로만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세계에서의 삶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요? 다음 생에는 인간의 육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오직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그만이다 이럽니다. “에이,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정말 살기가 고역스럽고 죽겠구나.” 이럽니다. 그러나 죽어도 몸뚱이만 없어졌지 아주 죽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게 죽어도 허탕이에요. 모두 어리석게 ‘죽어야 한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는데 죽을 생각이 있으면 빠져나갈 생각을 하세요.
주체 의식이 확고하고 그런 이상을 가지며, 우리가 이런 게 있죠. 삼세심이다 하는 이치는, 삼계가 한데 합쳐서 일어난 것도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으로부터 일어났으니, 바로 삼세심은 어떻게 해서 삼세심이 되느냐. 왜 삼세심이라고 했을까?
예를 들어서 작년 콩씨를 올해 심었는데 올해 심은 콩씨가 또 많이 열려 가지고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그 콩씨 하나가 되남아서 내년 봄에 또 심습니다. 그러니 어저께의 오늘도 오늘이요 오늘의 오늘도 오늘이요, 내일의 오늘도 오늘이니까, 이것이 삼세가 연결된 삼심이 연결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못하는 진리입니다. 삼세심이 한데 연결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합니다. 지속되구요.
그런데 삼세심이 공했다, 공한 자체의 나 주체 의식 근본에서 보게 되면 이것은 하천세계로 가고 이것은 중천세계로 가고, 이건 상천세계로 간다. 이것은 주체 의식 그 자체의 근본에 의해서 세 갈래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 가지로 나가는 그 원리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거예요. 네 마음을 그렇게 쓰면 이렇게 되고, 그렇게 쓰면 이렇게 되고, 그렇게 쓰면 이렇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하천세계를 비유해서 봅시다. 딴 데서 보지 말고 우리 지금 현재를 보세요! ‘오관 지옥에 떨어진다’ 하는 것은, 얼른 쉽게 말해서 종합된 인간의 탈을 못 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끓는 지옥 이런 문제들이 나오는데 그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건 왜 어디서 보느냐? 우리가 소를 잡되 도끼로 잡거나 몽둥이로 잡거나, 하여튼 그렇게 잡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갖다 구워 먹든 볶아 먹든 끓여 먹든 합니다. 그러면 이 인간의 의식 자체가, 짐승들의 의식 자체는 떠나질 못합니다, 자기 육에서.
사람도 만약에 그 육(肉)에서 떠나지 못하면 그 지경이 되는 거죠. 그 육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삶에 의해서 떠나질 못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육안의 5억이라는 생명체들이 한데 붙어서 있다가 거기에 주둔돼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주둔돼 있으면 고기를 끓이면 끓이는 대로 이게 살생이 되는 겁니다. 왜? 거기에 붙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뜨거운 맛을 보는 것이 한 번의 맛이 아니라, 거기에서 착을 떼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내 윤회에 돌고돌며 뜨거운 꼴을, 화탕지옥 꼴을 수만 번 수억을 겪어야 합니다. 이거 참 자세히 말하자면 이게 복잡합니다, 아주.
그러면 이 중천세계는 어떠한 거냐. 이 중천세계는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면 중천세계를 뜻합니다. 또 사람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듯 사람의 차원도 많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 의해서 창살 없는 감옥에서 얼마나 헤매고 돕니까. 또 내 마음으로 잘못해 가지고 지금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내 마음으로 잘못해 가지고 얼마나 지금 고를 당하고 있습니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고가 많습니까? 자식들의 일로 괴롭고, 부부지간에 마음이 안 맞아서 괴롭고, 부모자식지간에도 괴로운 일들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해서 괴롭고, 남이 나를 떨어뜨려서 괴롭고, 내가 남을 떨어뜨리니 괴롭고, 연방 같이 상대로서 이어져 가면서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올라가면 밑에서 치받히고 위에서는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는 이 지속된 중세계의 이 맛을 우리가 지금 맛보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우리는 인연에 따라서 내 몸 집을 지어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딱 내가 한생각에 이것이 잘되면 몽땅 한데 합쳐서 하나로, 하나로 상천세계에 이르고 부합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상천세계가 아니라 중천세계 윤회에 끄달리면서 돌아간다면 이 씨가 그냥 중천세계에 떨어져서 그냥 모두가 화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는 대로 이것도 같이 부합이 돼서, 만약에 내가 넝마의 차원이라면 넝마의 차원으로 이 씨가 여기에 부합이 돼서, 나가서는 모든 게 인연에 따라서 가고, 내가 나의 그 씨를 바로 넝마 씨로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는 대로 또 쫓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내 뱃속에다 넣고 이 세상에 또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마찬가지 살아도 마찬가지죠.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요, 결국은. 그래서 집합된 한 단체에서 내 한생각에 은이 되느냐 금이 되느냐, 무쇠가 되느냐 넝마가 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갈림길입니다, 지금. 이 중세계 갈림길인데 이 갈림길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겁니다. 내가 생각을 어떻게 해야 상천세계에 가느냐 이겁니다. 상천세계에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면서도 상천세계를 응시한다 이겁니다. 고등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면 대학을 못 가고 대학원을 못 가듯이 말입니다. 어떤 여건에 의해서 인연에 따라서 내가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결과도 있죠.
그래서 ‘모든 것을 놔라. 모든 것이 다 공했으니 놔라. 하루에도 고정되게 생각하는 법이 없고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듣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행하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먹는 것도 없으니 모두 공했으니까 거기 놔라.’ 하는 원리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5억이라는 이 단체가 바로 내 한생각에 달렸다 이겁니다. 내 생각에 의해서 5억이라는 생명이 한데 부합이 돼서 하나로, 일심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일심으로 돌아가는 그 원리를 안다면 일심이라는 그 자체도 없다 이런 논리가 나옵니다. 웬 줄 아십니까? 상세계에서는 혹성만 혹성이 아니란 얘깁니다. 이 혹성만 혹성이 아니에요. 수성도 있고 금성도 있고, 또는 토성도 있고 목성도 있고 은하계가 있는, 해왕성, 천왕성 이런 게 있는데 그 외에도 그보다 더 큰 혹성이 있거든요.
그러면 내 몸속에서 이것을 부합하게 만들어 가지고 하나로, 내 마음은 체가 없는 거니까 그거를 융합시켜서 하나로 뭉쳐서 그 하나마저도 없다는 원리를 알게 되면 스스로서 자기가 샘물이 나오게 되고 스스로서 알게 될 때 비로소 그걸 홀랑 벗게 되는 겁니다. 껍데기를 홀랑 벗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 중세계의 교차로를 홀랑 벗는 겁니다. 벗으면 어떠한 문제가 나오느냐? 내가 내 몸에서 홀랑 벗고 나니까 딴 사람도 다 홀랑 벗었음을 알게 되는 거죠. 그때에 비로소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뜻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겁니다.
일체 만물이 둘이 아니요, 장소도 둘이 아니요, 옛 사람과 지금 사람도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도 둘이 아니라는 그 뜻을 알게 됐을 때에 비로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나에서 그냥 그대로 여여하다는 그 뜻이 그대로 나왔을 때 열반 경지가 되는 거죠. 그 열반 경지가 될 때에 자유인의 경지까지 가는 것이며, 비로소 상천세계에 등장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되느냐. 내가 보지 않으면 몰라요. 여기를 거쳐 가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중천세계를. 그래서 여기서 먹고 살고 하던 것을 다 알게 됐기 때문에 생각을 해서 먹는 겁니다.
그래서 내 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지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떠한 부처가 되려고 앨 쓰고 그런다면 욕심이 과해서 또 아니 되니까, 욕심이 과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항시 놓치지 않고 일을 하나, 자나 깨나 그저 생각이 들면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가 놓으세요! 모든 걸 착을 두지 말고 그저 평상시에 그냥 벌어서 살되 착이 없이 살라 이겁니다. 착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공했는데 무슨 착을 둘 게 있습니까? 내가 돈을 이렇게 쌓아 놓더라도 이것은 내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주어진 거니깐 관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알아듣기 쉽게 하자면 주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이 소리죠. 그대로 자기 주인의 나툼이니까요.

부처님 가르침의 대의

요즘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TV 특강에서 어느 지식인이 인도문명에서 윤회라는 윤리가 생겨난 것은 윤회와 업, 응보 사상이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며, 인과응보라는 것이 근원적으로 잘못됐다는 정도전의 사고는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강의를 해서 불교계에서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불교가 예전처럼 떡이나 놓고 밥이나 놓고 비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49년 설하실 때에 무엇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는지 불법의 대의를 다시 한 번 알고 싶습니다.

그거야 각자 자신들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쉼이 없이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첫째 문제가 전생과 후생이 한데 함락이 돼야만이 그것을 견성이라고 하고, 함락이 돼 가지고 바로 자기 전생과 지금 이 생이 같이 한데 혼합이 되는 그런 마음으로서 우리가 공부를 진짜 해 나가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내가 낳기 이전에 내가 살던 그 전생과 지금 생과 더불어 같이 합쳐져야 나를 이끌어가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전생을 믿질 않습니다. 어저께에 우리가 했던 것이 전생의 일이고 오늘 하는 일이 후생이 하는 일이라면 벌써 이 한 생이 전생도 되고 후생도 되고 현생도 됩니다. 그런데 전생이자 현생이자 미래 후생, 이 삼생을 삼심으로 다 모아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그 능력을 기르라는 겁니다. 그런데 모두들 어저께는 생각도 안 하고 내일도 생각 안 하고 오늘도 생각해 보는 일이 없습니다. 벌어서 먹고 살고 그저 어떡하든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마음먹는 대로 되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첫째 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믿는 겁니다. ‘주인공!’ 하면, 그 삼심 삼생 삼신이 다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주인공을 믿으라는데, 자기 전생을 믿으라는데도 왜 안 믿느냐 이겁니다.
전생이라고 해서 지나온 생이 아니라, 늘 하는 얘기입니다만 올 수박 속에 수박씨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수박 겉이라면 수박씨는 그 겉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수박씨가 바로 전생이라면 바로 지금 현생의 내가 그 전생을 믿어야 할 게 아닙니까. 바로 그 전생이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는 겁니다. 지금 안락사라고 하는데 그 안락사의 뜻이 뭐냐. 이 몸에서 전생의 혼을 꺼내면 이 몸은 송장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영혼이 없으면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으면 송장이 되는 거죠. 그런데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전생을 그렇게 믿지를 않고 그 마음을 믿지 않고 항상 남의 말만 듣고 산다면 그게 될 법한 일입니까?
어떤 신도는 남편이 군인이었는데 남편이 죽고 나서 받은 연금으로 증권을 했습니다. 벌어먹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부업으로 증권을 해서 사는데, 어떤 분들은 이걸 사라 저걸 사라 이러지 않습니까? 거기에 따라서 혼동이 돼 가지고 산 사람은 그냥 몽땅 다 잃어버렸는데, 이 분은 오로지 자기의 주인을 믿고 중심을 가지고 거기에서 생각나오는 대로 사고 또 거기서 팔 생각이 들면 자기가 그냥 팔고 이렇게 했지, 남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사 났다고 한 것이, 그렇게 해 가지고도 자기가 집 한 채만 사고선 딱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해서 애들하고 거리로 나앉지만 않게 만들어 놓고는 그냥 딱 손을 떼고서는 요새 남의 집에 낮이면 가서 일해 주는 파출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 근심 없이 삽니다, 집 세 놓고. 그런 것도 볼 때에 내가 나를 이끌어가지 누구의 말을 듣고 끌려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불(佛)은 여러분 생명의 근본이요, 우리가 말하고 사는 것이 교(敎)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저런 흙바닥에 난 풀 이파리 하나도 불교 아닌 게 없습니다. 그것도 생명이 있고 말없이 말을 전달하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만물이 다 전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통신이 되고 그럽니다. 우리가 아는 거를 우주법계에서 알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 뱃속의 16억이라는 생명들이, 의식이 다 듣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딴 사람이 모르게 행동은 했지만 자기 양심만은 알고 있지 않으냐고 하는 것이죠. 양심이 아는 것이 뱃속의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알고 있고, 생명의 의식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우주간 법계에서 알고 있다는 얘깁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꿈을 꾸거나 누구의 얘기를 듣거나 이래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잘되는 거 못되는 걸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냥 나가면 그게 법이다.” 라고 말합니다. 남이 잘됐다거나 못됐다거나, 너는 나쁘다 너는 좋다, 이런 걸 다 떨쳐버리고 망상에 개입하지 말고 내가 주장하는 대로, 꿈을 꿔서 나쁜 생각이 들어가더라도 주인공에 맡기고 좋게 생각을 돌리면 좋게 돌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탁 내려놓질 못하니까 온통 붙들고 ‘아이구, 이거 이렇게 되면 어쩌나.’ 이렇게 하면서 그냥 고통스럽게 사는 겁니다. 마음이 벌써 그렇게 끄달리면 고렇게 일이 돌아와요. 그런 일이 닥친다 이겁니다. 그래서 한생각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도리를 배우는 겁니다. 딴 거 배우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마음공부를 해서 깨달음을 가져오라는 거고, 여러분의 몸을 보존하라는 거고, 가정을 화목하게 보전하라는 거고, 자식들을 잘 이끌어가면서 햇빛을 주라는 거고, 위로는 부모님들의 묵은 빚을 갚고 은혜를 갚으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능력을 길러야 자식들에게도 그 빛이 거기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능력을 길러야 자식들도 뿌리가 깊게 박히게 하고 건전하고 건실하게 뿌리가 자랄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왜 혈통, 핏줄이라고 그러죠? 그러니 어머니 아버지의 그 혈통과 그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닦으면 모든 혈통과 피가 전부 닦아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여러분의 그 모든 인연에 따라서 뭉쳐진 업덩어리입니다.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이고 선이고 나쁜 거고 좋은 거고, 화내고 이런 것도 전부 다 거기서 나오는 건데, 전자 과거에 살 때의 인연에 따라서 온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쥐고 건전하게 살아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막 건전치 못하고 돈 한 푼이라도 생기면 이리 쓰고 저리 쓰고 해서 방탕하게 사는 사람이 있죠. 그것이 다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고치고 그것을 제재해 나가려면 내 마음이 나를 바로 이끌어갈 수 있고 다스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다스려 가면서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맡겨 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악업 선업을 지닌 인과로서 이렇게 뭉쳐진, 개수로 따질 수가 없이 많은 그 의식들이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헤아릴 수 없는 그 모습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습들이 그렇게 많고 많은데 그 모습과 의식, 생명들이 내가 마음먹는 대로 따라갑니다. 남뿐만이 아니라 내가 다리가 아파서 걷지 못한다 이럴 때 ‘야! 한마음으로 심부름을 하는데 아니, 이 다리가 이렇게 아파서 어떡하니?’ 이렇게 생각을 하고선 탁, 참 아주 그게 진실하고 아주 건실한 생각이죠. 그렇게 하면 벌써 이 속에서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어서 다리가 금방 괜찮아질 수가 있습니다. 다리뿐이 아닙니다. 어떠한 문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듯이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게 바로 인과응보요, 인연의 소치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에만 끄달려서 이러니저러니 하지 말고 나를 이끌어가는 내 주인공을 믿고 올라오는 생각들을 잘 다스려서 조금이라도 편하고 자유스럽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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