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삶과 죽음에 있어 자연사·자살·안락사라는 형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선택에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과연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점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말이지만,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말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이 자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무조건 수용한다’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누구도 완전한 인간은 없다. 실수도 하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우리가 원래 그러함을 알아 자기가 ‘그러한 모습 그대로 온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자리(차안)를 떠나 가야할 곳(피안)이 따로 없음을 알 뿐이다.
지금 이 자리의 나는 과거 살아온 내 삶의 결과이다. 따라서 지금의 나를 수용하는 것은 나의 과거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내가 이룰 미래의 나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누가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오직 엄숙한 내 몫으로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삶이 객관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던, 결코 스스로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삶은 온전한 것이기에 더 나은 결과를 낳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어떤 결과를 얻어도 후회가 없고, 후회 없는 삶이기에 만족할 뿐이다. 단 후회 없는 삶이 결코 무엇을 완벽하게 해냈거나 매우 좋은 결과를 얻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불완전한 자신을 그대로 수용할 때 주변의 다른 이들도 평등하게 수용할 수 있다. 모자란 자신도 그대로 수용할 수 있기에 비로소 너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으며, 동질성을 바탕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을 수많은 기준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비난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스스로 힘든 삶의 몫을 짊어지니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이 부족한 나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오직 깨어있음으로 수용할 수 있다. 깨어있음이란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동시에 각자(覺者)란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라 깨어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깨달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깨어있는 자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이 이대로 여여(如如)하다는 것을 알아 부족한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수용하여 진정 사랑하게 된다. 오직 깨어 있으라. 그리하여 서로 (나와 나, 나와 너) 사랑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