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으로 하나하나 체험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이렇게 한데 모여 앉았다가도 일어서면 다 뿔뿔이 헤어집니다. 헤어졌다 또 모이고 모였다 헤어지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그러합니다.
예전에 강태공은 곧은 낚시를 넣고 앉았으면서 영계를 다스릴 때에 명령을 해서 다스렸다 합니다. 노자(老子)는 영계를 다스릴 때에 영원한 나의 친구로서 나와 둘 아니게 다스렸다 합니다. 또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고 영계를 다스렸다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분이 다스린 것이 정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물리를 다 파악 못하고 물리가 다 터지지 못한 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가 없이 내가 그대로 여여하게 닥치는 대로 생활을 한다면 그처럼 그대로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또 모르고서 그대로 한다면 아무리 해봤자 걸립니다. 내면의 나와 외부의 내가 그렇게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내면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서야 그 모든 것을, 외부의 모든 것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명령해서 쓰는 게 옳으냐, 영원한 친구로서 나와 둘이 아니게 쓰는 게 옳으냐, 촛불을 켜놓고 쓰는 게 옳으냐?’ 했을 때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놓고 썼기 때문에, 촛불이 꺼지고 켜지고가 있기 때문에 그 몸이 조금 더 있다가 갈 것을 그렇게 자유스럽게 못했다, 이런 뜻이 있죠. 그래서 물질로써는 절대로 거기에 눈을 뜨지 말라 하는 거죠. 물론 나의 내면세계의 그 모두를 알고 파악하고서야 이해가 가고 또 가늠을 하고 깨닫고 이러면서 결국은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닥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기의 그 뿌리 말입니다.
노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곧은 낚시를 넣고 아무리 있어봐라. 네가 명령해서 한다면, 말하자면 군사를 모을 때에 분산되기가 쉽고 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해이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백천만의 군사를 거느릴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했답니다. 그러니 노자는 부처님의 뜻을 그만큼 그래도 둘이 아니게 생활을 했던 모양입니다. 나도 잘 모릅니다마는 그런 말씀을 했다는 유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여기서 이런 말을 한 겁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걸로 표현을 한다면, 여러분이 깨 한 알갱이를 심는다면 얼마나 나옵니까? 많이 나오죠? 그런데 그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한계가 있느냐? 시간을 두어야 하고 또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식이란 것은 찰나찰나 바뀌어서 화할 수가 있으니 한 찰나에 한생각이, 그 한생각이 수천 수만이 될 수도 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닥치는 대로 자기가 중용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용을 한다는 것은 자기 불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법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즉 물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러분 몸속에 적게 잡아도 십일억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숫자를 어떻게 따지리까마는, 십일억이 넘지만 십일억이라고 대충 잡는다면 만약에 그 십일억 중에 하나가, 그 의식이 깨알처럼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 그런 게 없이 수만 개가 됐다가 아니, 억겁에 이 세상 대천세계를 꽉 덮고도 남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하나가 말입니다. 그러면 십일억 중에 그 많은 것이 다 벌떼 일어나듯 생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이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병고도 하나가 일어났다 하면 수십 개가 일어나고, 만약에 막는 놈은 적고 일어나는 놈은, 해하게 하는 놈은 많아진다면 그 집은 쓰러지는 겁니다. 좀먹는 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만약에 내 마음이, 지켜보는 마음이 빨갛게 생각을 했다 하면은 전체가 빨개집니다. 노랗게 생각을 했다 하면 전체가 노래지는 것이고, 악으로 나오는 걸 자기가 다스리지 못한다 할 때는 전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내면세계의 그 살림살이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돼야만이 바깥의 살림살이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 이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과거에 살던 그 자체가 쓰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묶어놓지도 않았는데 인연에 따라서 저절로 자연적으로 입력이 돼서 여러분이 짊어지고 나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실 때 고(苦)라는 문제가 제일 첫번에 나왔던 겁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은 악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고 선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그 마음이 어떤 거든지 바로 이끌어나갈 수 있고, 지켜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실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배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래자성불이라고 합니다.
본래자성불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그 힘을 가하니, 마치 맷돌처럼 물건만 넣으면 저절로 갈아져 나오고 맷돌이 이탈을 안 하고 잘 돌아가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이걸 비유해서 얘기입니다. 여러분도 그 맷돌과 같으니깐요. 심봉을 꽂지 않는 맷돌은 이탈을 하게 되고 잘 물건이 갈려 나오질 않아서 사는 데 복잡하고 배고프고 춥고, 이런 문제들이 나오면서 한 가정이 파괴 직전에도 갈 수 있고 또는 화목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넓게 보지도 못하며, 또 그렇게 좁아서 자기 살기도 극히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놓으셨어도 지금 시대의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하고 감지를 못 한다면 좋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여러분이 먹어보지 못하고, 맛을 모른다면 그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를 하는 이 마당에서 꼭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공부다 하기 이전에, 부처님이 나오시기 이전에도 진리는 있었으니까요. 다만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먼저 탐구해서 먼저 깨달아서 평생을 두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면서 우리들한테 전달을 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이 열쇠고리라면, 거기 달린 그 열쇠를 불성이라 한다면 여러분 속에는 십일억의 불성이 있다 이 소립니다. 그 불성이 하나냐 둘이냐,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니요, 늘이면 백천 개로 몇만 개로 될 수도 있고 또 줄이면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이거를 내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거를 내 불성이라고도 할 수 없고, 이거를 내 공안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 바로 공했다 한 겁니다.
여러분은 “아휴! 참 세월은 무상해!” 이렇게 말씀들 잘 하시죠? 무상하다고요. 무상한 것은 허무가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게 항상 고정됨이 없이 우리는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어떤 거 할 때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나라는 것을 쑥 그냥 던져서 빼버린다면, 악도 없고 선도 없고 자동적으로 자기가 올바르게 계도하고 올바르게 선정도 베풀고 올바르게 물리가 터져서 일체와 둘이 아닌 도리를 그대로 여여하게 해나갈 것입니다. 역시 물질이라는 거는 그저 없어졌다 생겼다가, 부서지고 썩어지고 부러지고 깨지고 온통 이 야단들입니다. 그러면서 돌아가니 무상입니다. 무상!
이 세상에 모든 물질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한 것이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게 허무해서 한탄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우주 삼라대천세계(森羅大千世界)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요, 이 세상의 일체 만 가지 생활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 그러니 저 태양은 만물만생을 소생시키는가 하면 또는 산하대지는 만물만생을 길러낸다. 천지가 둘이 아니죠. 어머니 아버지가 둘이 아니듯, 애들을 기르는 데는.
깊은 물 돌고 돌아
수증 되어 오르고 내리면서
만물만생과 더불어
산천초목도 두루 적신다.
저 둥근 달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밝게 비추어주니
스스로 여여하고
스스로 그대로 실상인 것을!
옛날에 이런 점이 있죠. 아까 여러분 몸속에 있는 그 자체 인연으로 인해서 그렇게 많은 의식들이 들어 있으면서 악으로 나오고 선으로 나오는 거, 그거를 여러분 마음이 다스리면서 모든 것을 거기에 맡겨 놓고,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 되는 것도 거기 맡겨 놓을 수 있어야 되고 정진이 돼야 됩니다. 무슨 화두를 갖는다 어쩐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 껍데기에 또 껍데기를 씌우는 거나 한가지니까 지금 이 밝은 세상에는, 문화문명이 꽃피고 이렇게 발전이 됐을 때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저 직접 나를 화두로 알고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 어느 스님이 말입니다. 아주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다가, 비유해서 말하자면 나무 꼭대기 천야만야한 데로 올라가서 나뭇잎을 입에다 물고선 대롱대롱 매달려서 있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스님이 와서 길을 물었답니다. 그러니 말을 하자니 입을 열면 땅바닥 그 천야만야한 데로 떨어져서 죽을 거고, 입을 안 떼자니 참 이거 미안하고 배신하는 거 같아서 안 뗄 수도 없고 그렇게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을 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입을 안 떼고 거기 대롱대롱 매달려 있겠습니까?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에는 선지식들이 이렇게 낚시를 던져서 채찍질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해야 해결이 나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예 묵비권이군요. 아주 모두 도인들인가 봅니다. 그런데 내가 괜히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하여튼 좋습니다.
예전에 경허스님은 말입니다. 첫째, 사계절을 무조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사셨다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둘째, 경허스님은 수염이 나지 않았대요. 그건 또 무슨 까닭입니까? 세번째, 경허스님은 상투를 틀어서 동곳을 꽂았대요. 그건 또 무슨 까닭입니까? 없습니까? 함이 없이 한다면 말도 한 사이가 없고 방귀 뀌는 거와 같을 텐데…. 항의가 없습니까? 역시 도인들이시네요.
아무리 도인들이라도 그 이치를 알고 몰라야지, 이치를 모르고 모른다면 아예 모르는 거죠.
높은 산 누리에 하얀 눈 덮이고
가지마다 배꽃 피어 만발했는데
골짝마다 칡뿌리는 넝쿨지어 뻗어나가고
서리 위에 칡꽃 피어 만발하였으니
그윽한 향내는 두루 하는구나.
경허선사 앞뒤 없는 대피리 소리
온 누리를 덮고 굴리니
중생들의 마음속에 들고 나며 나투셨노라.
후렴으로 여러분에게 항상 했던 소리지만 또 한마디 할까요? 끝났으면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조금 시간이 있으니깐요. 여러분! 여러분한테 내가 항상 말씀드렸죠. 여러분은 지수화풍이라고, 지수화풍이 돼서 지수화풍을 먹고 산다고요. 그래서 뱃속에 있는 모든 그 생명들이 자기 생명이지 딴 생명들이 아닙니다. 자기는 뭉쳐놓고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자기라고요. 나만 불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들도 불성이 있어요. 그 불성은 몇 개나 될까요? 헤아릴 수 없겠죠. 아마 대충 헤아린다면 그 불성이 십일억이나 그쯤 되겠죠. 그러면 그것이 한데 모이면 모이는 대로 불성이 하나요, 또는 흩어지면 불성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게 불성이라고 할 수 없으니 바로 부처라고 했고 그것은 ‘무(無)’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어디로부터 좇아 나왔나 이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짊어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거를 짊어지고 나온 인연에 따라서 입력이 돼 있는 것을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지금 시쳇말로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과거를 짊어지고 나온 그것을.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몸을 빌려서 나왔는데 어째서 그렇게 짊어지고 나왔느냐고 하시겠죠.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어머니 아버지의 뼈와 살을 빌려서 몸뚱이 하나를 받았지만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짊어지고 나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컴퓨터 안에 입력이 돼 있던 거니까 걸머지고 나와 가지고서 입력된 대로 솔솔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 입력이 돼 있는 그 자체가, 십일억 가량이나 되는 그 의식에서 뭐는 없겠습니까? 여러분이 몰라서 죄를 짓고 알아도 죄를 짓고, 아상이 있어서 죄를 짓고, 무기력해서 죄를 짓고, 욕심이 많아서 죄를 짓고 불순해서 죄를 짓고, 그저 평등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죄를 짓고, 올바르게 행하지 못해서 죄를 짓고, 살아가면서 지혜롭지 못해 죄 지은 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의식들이 차원에 따라서 전부 깡통은 깡통대로 모이고 금은 금방에 모이죠? 저절로 자연적으로 모입니다. 그러니 컴퓨터에 입력이 됐다고 볼 수밖에요. 전부 입력이 돼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팔자 운명을 어디 가서 한탄을 하겠느냐는 거죠, 자기 탓이지. 모든 게 잘했든 못했든 자기 탓이에요. 그래서 악과 선도 놔라 했습니다.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악으로 간다면 선이 따르고 선으로 간다면 악이 따르니 악과 선도 놔라, 또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한 게 없어진다, 입력이 됐던 것이 다 없어지면 홀연히 자기는 밝아질 거다 이런 겁니다.
거기에서는 또 뒤따르는 게 뭡니까? 여러분 몸 하나 구조가 모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가고 올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고, 모든 걸 생각할 수도 있게 갖추어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게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면에도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거기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맡겨 놓고, 악한 마음이 나오면 “야, 그러면 안 되잖아, 이 친구야!” 하고 거기다 돌려놓죠. 영원한 친구거든요. 과거 부(父)와 현재 자(子)는 둘이 아니라 영원한 친구입니다. 자기와 자기가 어떻게 둘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심봉과 맷돌이 둘일 수 있겠습니까? 물건을 넣고 갈아내는 것도 둘이 아니거늘 어찌 둘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 거기다 맡겨 놓고, 안되는 게 있다 하더라도 맡겨 놓고, 또 남으로 인해서 망했다 할지라도 ‘그거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나를 채찍질해주는 거지, 나는 경험을 얻고 그랬으니 그 많은 돈을 버렸어도 아깝지 않다.’ 하고 내 탓으로 돌리고 놔라 이겁니다. 모든 게 남의 탓은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이 만날 남을 원망하고 남을 증오하고 너 때문에 나는 살고 너 때문에 죽고, 뭐 이러고 있어요. 사랑도 값비싼 사랑을 해야지 값싼 사랑을 해서는 진짜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망상이요, 착이요, 욕심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모든 것을 내 탓으로만 돌리고 내가 없다면 고정된 게 하나나 있습니까? 그러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때에 내가 봤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공했어요. 내가 없어요. 그래 지금 속에서 살고 있는 게 바로 내가 움죽거리는 거예요. 내가 마음 돌리는 대로 화해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보현도 부처요 문수도 부처다. 왜? 한마음 속에서 나오니까. 한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부처고 마음을 냈다 하면 문수고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이니, 어찌 그것이 둘이냐 셋이냐 이렇게 따지겠느냐 이겁니다. 여러분도 생각 안 할 때는 부처고 여러분이 생각을 했을 때는 법입니다. 또 여러분이 움죽거렸을 때는 바로 활용이에요. 그러니 부처는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가깝게 있으니 여러분이 수박이라면 수박씨를 바깥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세요. 미래에 그 수박씨를 심어서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그 씨는 되남을 테니까요.
수시로 바뀌어 나오는 거, 그래서 타심통 이니 신족통 이니 천이통 이니 천안통 이니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 숙명통 자체를 안고 돌아가는 겁니다, 같이. 그러니 하나하나, 손가락 하나 뗄 수 없듯이, 우리 눈 한 짝 뗄 수가 없듯이 그렇게 조(組)가 돼서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돌아가는 바퀴 속에서는 바퀴를 굴릴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항상 거기다 맡겨 놓고 자기는 그냥 거기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지금 누진이라고 그러는데 레이다망이나 똑 같애요. 오는 거, 들어가는 거, 나가는 거 다 체계적으로 딱딱 해나가니까 내면으로도 컴퓨터로 들어가고, 외부에서도 모든 것이 조절이 잘 돼나가니까 인간의 대기권이나 지구의 대기권이나 살림살이의 대기권이 모두 적절하게 자유스럽게 돌아간다, 대기권의 작용이 말입니다. 한 조가 되어서 그렇게 돌아간다면 이 세상을 한 주먹에다 넣고도 남음이 있는 거고 굴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깥에서 신이 있어서 나를 도와주는 줄 아시는데 역대의 선사들이 역대의 부처님들이 아니, 경허 스님도 얘기했지만, 달마 대사든 어느 누구든 막론해놓고 삼천년 전의 부처님과 그분들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금반지가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서, 변천하는 유행을 따라서 그 반지를 다시 해놓은 거나 마찬가지죠. 모습은 다르나 금은 변함없이 똑같다 이거예요. 그러니 삼천년 전의 부처님 따로 보고 지금 선지식들 따로 보고, 여러분 따로 보고 이렇게 하지 말고 좀더 시야를 넓혀서 모두 둘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죠. 삼천대천세계, ‘삼천’하면, ‘삼(三)’ 해놓으면 과거·현재·미래 모든 것을 묶어서 하는 거고 ‘천(千)’ 그러면 하나로 또 묶인단 말입니다. ‘대천(大千)’ 하면 또 하나로 묶여서 그대로 하나죠. 그 하나는 바로 하나가 아니라 전체 두루 하는 것을, 하나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없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아까 얘기했듯이 찰나찰나 우리가 들고 나는 이 의식 자체, 마음 자체를 자기 마음이 다스리고, 조화를 이루고, 화목하고 평등하고 부드럽게 해 버릇을 하신다면, 오늘부터라도 마음속의 그 생명들은 벌써 마음들이 달라져요. 여러분 마음이 회색이라면 회색으로 바꿔지는 거죠. 그래서 삼십이상이 구족하면, 마음이 또 삼십이상이 구족해서 그대로 응신(應身)으로서 받아들인다, 받아들여도 두드러지지 않고 이 허공에 다 써도 줄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한 법이 우리들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는데도 졸장부처럼 항상 바깥에서 비는 겁니다. 여자든 남자든 만날 비는 거예요. 우리 아들 잘되게 해 주시고, 나 몸 안 아프게 해주시고, 뭐 우리 누구, 누구, 누구 명 길게 해주고…. 해주긴 뭘 해줍니까? 누가 해줍니까? 허공에서 해주나요? 이름이 해주나요? 형상이 해주나요? 저렇게 형상으로 계신 저분은 이 세상에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부처지 ‘나’라는 게 있다면 저렇게 (부처님을 가리키시며) 부처로 해놓지도 않았어요. 여러분의 형상이요, 여러분의 마음이요, 여러분의 생명이니 둘로 보지 말라 이거죠. 그런다면 아마도 6·25 사변이 났을 때 그렇게 업고 가지도 않으면서 업고 다닌 거예요, 둘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사람네들을 그때 보니까 전부 그냥 업고 가지도 않고 자기 혼자만 달아나가요. 진짜 부처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마음 가운데 전부 있다 하니까 누구나가 세 살 먹은 어린애까지도 모르는 사람 없으나 백 살이 먹어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지 아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혜(慧)도 정(定)이요, 계(戒)도 정(定)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이 돌아가는 혜도 그 속에 있고 계도 그 속에 있는데, 계·정·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정에 든다면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서 계를 지키지 못할 일도 없고, 또 지혜로이 평등한 마음으로써 남을 이익하게 해줄 수 있고, 나와 더불어 같이 이익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나올 텐데도, 요걸 따로따로 보고 계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정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지혜를 내려고 애를 쓰니 그게 나오나요?
여러분은 지금 병고에 휘달리죠, 또 우환에 휘달리죠, 가난에 휘달리죠. 이렇게 우환이라면 전체 아마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끄달리는 원인이 바로 그런 데서 오는 거죠. 여러분이 그저 살 양으로 애를 쓰는 것도 욕심이거든요. 모든 것을 거기다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는데, 돈이 많더라도 관리만 하면 됩니다. 자기가 관리인이지 자기가 주인입니까? 물론 다 배우고 나면 주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고 시자도 없겠지마는 배울 때는 주인을 딱 잡고, 바로 자기네 가정에 아무리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자기 주인 것이지 내 게 아니라 나는 관리를 하는 거예요. 회사를 경영한대도 주인이 하는 거고 나는 심부름 한다. 우리는 열심히 뛰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요, 그렇게 놔서 내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것이 좌선입니다.
지금 이렇게 빠른 세상에, 이렇게 자꾸 발전이 되는 이 세상에, 공업이나 의학이나 천체물리학이나 과학이나 모두 발전이 돼 나가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선(禪)을 한다고 틀어 앉아서 몸뚱이를 묶어놓고 있는데, 묶어놓는 마음도 자기 마음이란 얘기죠. 몸뚱이를 묶어놓고 마음을 묶어놓고, 그러고서는 한 발도 떼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있거든요. 보세요. 지금도 당장 보라고요. 아까도 과거니깐 과거 생에 살던 여러분의 집을 지금 가보세요. 안 보이십니까? 신발장이 어디 놓여 있고, 간장이 어딨고, 초장이 어딨고 그런 것까지도 다 알죠? 그 얼마나 묘한 일입니까? 그걸 홀연히 다 밝게 하시려면, 아까 얘기한 대로 화두를 쥔다 생각 말고, 놓는다는 생각도 말고, 좌선을 한다는 생각도 말고, 좌선을 안 한다, 빨리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마시고 일상생활 하는 것이 그대로 바로 내 주인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 아프게 들어오는 것도 주인만이 낫게 할 수 있어요. 주인이 하라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 그대로 주인의 심부름이에요. 내고들이고 하는 것이 다 주인으로 인해서 나간다면 여러분이 병고에 휘달릴 것도 별로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왜? 30%는 병원에 가서 할 수 있는 거라면 하고, 70%는 자기가 거기에다 충당해서 나간다면, 걱정할 게 뭐 있어요? 내가 죽을 때 되면 죽겠지. 안 그래요? 옷 벗을 때 되면 벗겠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니깐 고통을 그렇게 안 받고도 갈 수 있지 않느냐. 공부하는 데 실험할 때는 거기에서 별게 별게 다 나와서 어떠한 게 닥쳐도 거기다 되입력하는 그 자세로써 나간다면 여러분은 얼마 안 있어서 내면에서 올바로 볼 겁니다. 올바로 보게 되면 나중에는 둘이 아닌 공부를 하기 위해서 진짜 그때부터가 공부죠. 그때는 대의정이 나는 겁니다. 의정도 스스로 의정이 나야지 만들어서 의정을 낸다면 그게 의정인가요?
그러니 실질적으로 하나하나 체험을 하십시오.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게 점수(漸修)라 하면, 다 쌓고 봉오라지 탁 올려놓는 게 돈오(頓悟)입니다. 그러니 점수와 돈오는 둘이 아니죠.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 돈오다 점수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모든 걸 지켜보고 관하라 이러면 뭐 지킬 게 있느냐고 그러죠. “지키는 놈은 어떤 거냐?” 이래요, 또. 그러는데 그대로 거기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러고 거기 맡겨 놓으면, 맡기는 놈도 그놈이요, 지키는 놈도 그놈이니 지켜봐라 이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또 감응이 되고 실험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체험을 거기서 하게 되고, 또 어떤 게 닥쳐오면 갖다놓고 또 하다보면 체험이 되고 또 체험이 되고, 그게 바로 하나하나 쌓아서 탑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물리가 터지고, 그렇게 하다보면 홀연히 자기를 자기가 알게 되고, 그럭하다 보면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다보면 바로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게 된다 이거죠.
내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경허 스님이 사계절을 무시하고 발가벗고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사신 그 까닭이 무엇이냐? 다른 남자들은 다 수염이 나고 그런데 그 스님은 왜 수염이 안 났느냐? 그 까닭은 또 무어냐? 다른 스님들은 머리는 깎고 다니는데 그 스님은 왜 상투를 틀어서 동곳을 꽂았느냐? 그 무슨 까닭이냐?’ 하는 걸 잘 생각해보시기 바라며 그럼, 오늘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