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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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안락사
요즈음 뉴스에는 인터넷을 통해 동반 자살했다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살은 안락사의 모양과 유사하기도 하다. 하지만 안락사에 대한 수많은 논의를 생각해 볼 때 자살을 간단히 말하는 것은 어렵다.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신이 고통으로 가득 차고 회복이 불가능할 때, 주위를 생각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 자신과 주위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과연 누가 그 차이를 말할 수 있을까.
한편, 현대의 생명과학은 예전 같으면 죽을 사람마저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발전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중환자실에서 영구 식물상태로 아무런 의미 없는 단순한 생물학적 목숨의 연장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생명과학의 발전에 바탕을 둔 현대 의학의 업적을 환호하고 매년 평균 수명이 늘어간다고 안심하고 즐거워하며, 동시에 자살하는 이들이 늘어간다고 우려하기 이전에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죽음을 연장하거나 앞당기려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잘 들여다보면 죽음의 문제란 결국 삶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의 문제이다.
생명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명확한 경계를 지니고 단속적(斷續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흐름이다. 단지 특정 조건에 의하여 특정 모습을 지니는 것이기에, 뇌나 심장, 허파 등의 장기 기능이 멈추는 어느 특정 시점만으로 죽음을 정의하여 생명 전체의 종점으로 판단하는 현대 생명과학의 무의미한 시도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 삶과 죽음은 오직 원인과 결과로서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을 포함해 그 무엇에도 집착할 것이 없으며, 또 집착하여 붙잡을 수도 없음을 잘 알게 된다.
하지만 집착 없음이란 결코 삶과 죽음을 무의미하게 바라본다거나 가볍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아니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더욱 이 찰나에 주어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기에 순간에 주어진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햄릿에게는 중요했을지 모르나 불자에게는 우문(愚問)이 된다. 안락사와 자살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받아들이며 선택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순간에 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굳이 앞당길 필요가 있겠는가. 또 동시에,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굳이 죽음을 미루어 무엇 할 것인가. 오직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음이니 그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모양새이며, 그것을 만들어 가는 것은 자신의 깨어있음이기에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밝혀 지혜를 지니는 것으로 그 선택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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