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드는 것 전부 한자리의 굴림
물질에 대한 집착을 비우려면...
문
대다수 큰스님들께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치십니다. 또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 보고도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마음을 비우자는 것은 욕심을 버리자는 얘기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설법을 들으면 마음을 비울 수가 있는 것 같은데 문 밖에 나가서 물질을 딱 보면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길을 일러주십시오.
답
근데 사실 알고 보면, 마음을 비운다 안 비운다 하기 이전에 이미 아주 탕탕 비어 있습니다. 본래 비워져 있습니다. 돈을 억만금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건 가진 게 아닙니다. 재산도 자기의 추에 의해서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여여하게 쓰고, 여여하게 사랑하고, 여여하게 듣고 여여하게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도 이름해서 부처가 되어 봐야 보살이 될 줄 알고 보살이 될 줄 알아야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참사람이요, 이름 해서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신도 자기요, 보살도 자기요, 부처도 자기요, 중생도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태초의 모습이, 자기 오장육부의 세포를 타고 자기의 그 태초의 모습들이 자기 속에 지금 우글우글하고 있습니다. 각양각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장으로서 한생각을 내면서 지금 여여하게 뱃놀이를 하고 가는데 아니, 소리를 못 지르나마, 노래는 하지 못하나마 왜 여여하게 가지 못합니까?
그러니 놓으라 하기 이전에 이미 놔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놓지 않고 있다면, 지금 자기 생각에 의해서 그냥 잔뜩 끼고 있어서 그렇지, 그러니 여러분의 탓이에요. 어디 가려고 걸어가는데 그 발자취가 남습니까? 그 발자취는 금이 아니고 보석이 아니고 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심하게 왔기 때문에 없는 거지, 아마 발짝 하나 딛는데 금은보화가 10억 붙어 있다고 그런다면 ‘아휴! 한 걸음에 10억씩 붙어 있는데 내가 이거를….’ 하고는 붙들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뭐 돈 내는 것도 없고, 돈 붙는 것도 없고,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까 그냥 태연하게 할 뿐입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태연하게 그렇게 가십시오. 여러분이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실 때 신발을 내가 벗고 들어간다는 생각이 있이 들어가십니까, 신발을 벗는다는 생각이 없이 들어가십니까? 똥 누러 갈 때 똥을 누러 간다고 생각을 하고 갑니까, 그렇지 않고 마려우면 그냥 뛰어 들어갑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똥 버리는 건 아깝지 않고 금 버리는 건 아깝거든요. 마음이 이렇게 괴상망측합니다.
내가 나를 한번 봅니다. 돈이 백만 원이 들어왔든 천 원이 있든 그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여러분한테 한 개도 받은 예가 없고 준 예도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나로 인해서 한 예도 없습니다. 주고받은 게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이렇게 절이 있어도 이게 내 것만이 아니고 여러분과 동시에 나와 같이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나는 욕심 부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가지고 있고 자식과 아내와 남편과 다 같이 있으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식구들 것이기 때문에 내 거라고만 할 수 없으니 그냥 놓고 사세요, 그냥 그대로. 만약에 이 우주 천하가 다 내 거라면 무엇 때문에 그걸 짊어지고 다닙니까? 짊어지고 안 다녀도 그냥 허허지, 늘어진 게 바로 나고 내 생명이고 내 것이고 나 아님이 없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 도리를 꼭 공부하시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자아내려면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를 낮게 생각을 합니까. 낮게 생각도 말고 높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부처님의 어느 제자가 아파서 그냥 일어나지도 못하니까 부처님 뵙기를 아주 소망을 했습니다. 그렇게 소망하는 줄 알고는 부처님께서 그 아픈 사람에게 갔어요. 그 집에 가서 “좀 어떠냐?”고 하면서 들어가니까 일어나려고 하잖아요. 일어나려고 하는데 “육신은 드러누웠으나 앉았으나 일어나나 상관이 없다. 단, 네 마음이 그토록 간절하고 그렇다면 벌써 일어나서 반길 수 있는 그 진정한 진실한 마음이 있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절을 삼 배 했느니라” 하시거든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네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묘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론으로는 정말이지 저보다도 이 세상에 유명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 이론으로서 무불통지 하셔서 말을 참 잘하신다 하더라도 못하는 나만 못한 겁니다. 그 뜻을 아십시오. 열 번 백 번 만 번 말을 잘한다 해도, 또 물질적으로나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이 무의 세계의 무루법은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 무루법은 두루 모습은 무궁무진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행하기가 어려운 거지, 한 번 행할 때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행할 때에 주장자를 탁, 주장자가 동그랗게 말려서 가져다니는 사이 없이 가져다닐 때 주장자가 한 번 탁 이렇게 용도에 따라서 들었다 하면, 쭉 펴지면서 요란하게 소리가 날 때에는 우주간 법계에서 그 소리를 듣고 다 같이 호응을 해 준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고 자유로운 법입니까. 자유롭게 사십시오.
어떻게 한생각을 내야 하는지요?
문
주인공에 모든 걸 놓으라고 말씀하시면서 한생각을 잘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한생각을 잘 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생각을 잘하라는 말씀은 꼭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공의 나툼인데 또 내가 따로 생각을 내야 되는지요?
답
주인공에 일체를 놓되 한생각을 잘하라고 하는 건, 내 한생각이 악도 되고 선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한생각 법이 되어 만 생명을 살린다고 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참나가 있고, 참나는 근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입니다. 근본은 우주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거기에 맡겨 놓으세요. 내가 아는 거 모르는 거, 모든 것을 거기에 놓으십시오. 아는 것도 참자기가 알기 때문에 아는 거지, 생각을 낼 수 없다면 목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생명이 없으면 송장이죠.
밝고 밝은 이 세상에서 지금 인공위성이 오르고 또는 전파를 통해서 전 세계를 두루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모르고 삽니다. 우리의 마음이 인공위성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빛보다 더 빠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하고 보배라는 걸,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다 그러한 원리로 인해서 각자가 잘 살게 되고 또 회사가 융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 한 사람만 생각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회사는 아주 융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 한다면 이 나라는 바로, 지금 물질과학으로부터 정신과학으로, 마음으로써 만법을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그 점을 우리가 명심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깨우친다 안 깨우친다 이거를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꾸 자기 생각으로 좌절을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여러분은 자꾸 자기가 생각하는 거를 ‘내가 중생인데, 이건 안되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다고 생각을 했을 때 조그마한 것뿐만 아니라 큰 것이라 해도, 그 일이 타인의 일이라도 그 일이 된다고 믿고 할 때는 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누가 공장을 처음 냈는데 ‘이게 이럭하면 안되는데….’ 할 때, 그 한생각을 탁 내 준다면 그 공장은 그대로 유지돼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해 한생각을 내 주는 것도 그렇고, 내가 어떤 일이 있어 한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 한생각의 향기로운 냄새가 온 우주를 덮고 온 우주를 싸고, 아니 닿는 데가 없이 닿을 수 있게끔 되는 것이 바로 우리 한생각의 능력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여러 가지로 낼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그거를 여러분이 못 느끼고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요기밖엔 못 디뎠는데 나중에는 지혜가 넓어져서 저기까지 딛게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뛰어야 되는 거지 이걸 한꺼번에 뛰려면 안되니까 살면서 조그만 데서부터 체험을 해 나가시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자면 우리가 마음으로 인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을 욕심 없이,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해야만 된다는 겁니다. 습이라는 게 참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선한 일을 했어도 내가 한 일이 아니요, 악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대의적인 일을 위해서 했다면 악한 일이 아닙니다. 거짓도 남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면 그거는 잠시 거짓말을 한 거지 거짓이 아니겠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잘 생각해서 나와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타인의 육체나 내 육체나 똑같은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하게 만들 수 있어야 남도 이익 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생각을 잘 해야 된다 이겁니다.
폭력적인 의식의 정체
문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도 불합리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을 선택한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뉴스를 대할 때마다 그냥 한달음에 달려가서 박살을 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스님, 제 안에서 불뚝불뚝 생겨나는 이러한 폭력적인 의식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요? 분명 폭력이나 우격다짐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느끼면서도 이렇게 올라오는 이 의식들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답
어느 곰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다 살다 보니깐 짐승에서 진화돼서 아주 하얀 백곰이 됐답니다. 처음에는 얼룩덜룩하다가 꺼멓다가, 얼룩덜룩하다가 보니까는 회색이 되더니 점점점 백곰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은 오래 살다 보니까 좀 지각이 생기고, 또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면 ‘아! 저런 모습도 있었던가. 나를 잡으려고 하는구나, 나를 잡으려고 왔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을 보고 알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저 사람의 모습을 그려봤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곰 부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나도 이렇게 숨어 다닐 게 아니라 저 들에 나가서 활보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그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그 부부가 새끼를 낳았는데 사람 모습 그대로 나왔더랍니다. 사람 모습이 그대로 나왔는데 그 새끼가 사람 모습으로 나오긴 나왔는데, 새끼들이 금방 금방 자라더니마는 그저 짐승이고 뭐고 나가서 피를 빨아먹고 들어오는데 보니까 그냥 입이 시뻘건 게 입은 꼭 자기 입하고 똑같이 닮았더랍니다. 그때에 곰 부부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아하! 사람의 거죽만 그렸지 마음을 그리진 않았구나. 내 그 마음을 그려 보리라. 그러면 저 자식 대에는 진짜 사람이 나오겠지.’ 하는 마음의 믿음으로서 항상 그 마음을 그렸습니다.
그러고 가다가 새끼들을 낳았을 때, 수컷도 낳고 암컷도 낳았는데 그것이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는 연방 일러 줬어요. 그래서 그 부부가 죽을 때 “나도 우리 부모들이 이렇게 이렇게 사람의 모습을 그리라고 해서 그렸더니 너희들이 나왔는데 너희들도 사람의 마음을 그려라. 첫째, 사람을 해치지 말고, 사람이 너희들을 해친다 할지언정, 너희들이 해를 받는다 할 때, 바로 즉시 그 사람의 마음이 너희 마음이 되고 너희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이 되느니라. 그럼으로써 그 악한 피비린내 나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해 줬지마는 짐승 같은 사람의 모습들은 자기 형제를 몰라요. 그래서 사람이 없으니 그대로 살다 보니까 참 사람이 또 났더랍니다. 그리고는 또 그 사람에게 그 얘길 해 준 겁니다. “선조 대에 이런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너희들을 우리가 났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모습도 사람이요, 마음도 사람이니 남을 악하게 하지 말고 남의 피를 먹지 말고, 열심히 풀뿌리로써 연명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그저 너희들의 몸에 있는 털을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만들어라.” 하고선 그렇게 부탁을 했더랍니다.
그리고 그 부부도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자식이 항상 뿌리 같은 거를 캐다가 보양을 하니까 그냥 그 사람과 같이 그대로 먹다가 자기 일생을 마쳤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사람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고 해서, 한 동네를 이루어서 어부 노릇도 하고 농사도 짓게 되고…. 농사짓게 된 동기는 또 따로 있겠지마는 그렇게 농사짓고 살기 이전 얘기를 지금 죽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 되기까지 얼마큼 내려오면서,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렇게 사람이 됐겠습니까. 지금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아주 극단적인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건 왜냐. 사람을 막 피를 빨아먹고, 그런 거를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가 억겁으로부터 거쳐 오면서 그렇게 해 온 습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극치적인 영화를 좋아하고 극치적인 산란을 좋아하는 거는 반드시 그렇게 잠재해 있던 것이 그걸 보는 순간, 그러니까 우리가 그러한 습이 아직까지도 꼭지가 덜 떨어져서, 뒤 꽁댕이는 떨어졌는데 꼭지가 덜 떨어져서 그러는 거죠. 그래서 그런 걸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문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한 꺼풀 한 꺼풀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스럽게 뛰어놀지 못합니다. 자유스럽게 살 수도 없습니다. 속박돼 있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업보가 얼마나 많길래 이런가. 팔자 운명이 얼마나 고달프길래 이런가. 내가 죄를 얼마나 졌길래 이런가.’ 하는 이러한 사념에 끄달리면서 그 암흑 같은 길을 걸어야만 했고, 걸어가는 길이 밝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캄캄한 암흑 길을 걸어가니 이 몸을 벗는다 할지라도,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 낙향하게 돼서 점점 더 껌껌한 길을 걸어야 하는 그런 인연이 돼서 또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 마음 하나에 우리가 세세생생 그 뿌리가, 인연 뿌리가, 인과 뿌리가 얼마나 지독한지 아십니까? 그러니 마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여러분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사람이, 이 공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더 그렇고, 공부라고 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 살아나가는 것이 전부 공부니까요. 하나하나 뉘우치면서 하나하나 진화되면서 창조해 가면서 우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옮겨 가면서, 고정된 행도 없고, 고정된 말도 없고, 고정되게 먹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빈 그릇 그저 일렁일렁 움죽거릴 뿐입니다. 단지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도 없는 마음이 자기를 움죽거리고 갑니다. 그 마음이 선장이라면 바로 그 선장은 나침판을 놓고서 그냥 가고 있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색에, 물질에 착을 두고 이름에 착을 두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둘로 보지 말라.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 보살이 아니니라. 깨우쳤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지 않고 바깥으로 도는 자는 공덕이 하나도 없고 보살이 아니니라. 이 몸으로, 이 모습으로, 이 이름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이 모습과 이 이름으로 인해서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식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일체 만물 유생 무생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굴릴 수가 없느니라. 제도할 수도 없느니라. 그런데 무엇을 제도했다고 하느냐? 제도 했다고 하지 말라. 본래 둘이 아니기에 제도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느니라. 그대로 마음으로 굴리면서 항상 따뜻한 마음을 내 주면 되는 것이니라.
따뜻하게 둘로 보지 않는 마음, 남이 아프면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내 준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아픔과 둘이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진짜 들어가서는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이라는 것도 이름이요, 부처라는 것도 이름이요, 여래라는 것도 이름이요, 다 이름이니 그 이름을 가지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이름 속에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모습 속에서 소중한 것을 발견하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보림을 하면서 항상 안으로 굴리면서, 거죽으로 나타내지 말고 경솔하지도 말고, 남을 깔보지 말 것이며, 벌레 하나를 본다 할지라도 바로 나로 알아라. 저 꽃 이파리 저 나무 이파리 하나, 무정물이나, 하다못해 돌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이 아니니라.’ 하셨던 겁니다.
칠성 신앙에 대해서
문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불법이 이 땅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고유하게 있었던 칠성 신앙이 불교로 융합되면서 칠성광여래불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칠성광여래불이라고 하는 불의 당처가 우리 마음속에 들었다고 하시는데 우리들도 마음을 깨달으면은 칠성광여래불이 될 수가 있는지요?
답
왜 그렇게 벌려 놓고 애를 씁니까? 공부를 하고 난 뒤에는 물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겠지만, 공부를 이제 시작하면서 왜 그렇게 벌려 놓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마음공부 하는 데는 그렇게 벌려 가지고는 공부 못해요.
알고 보면 칠성여래도 바로 각자 자기에요. 왜냐하면 일곱 칠성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의 모든 거를 규모 있게 표시해 놓은 겁니다. 이름은 다 각각 지어 놨지만 말입니다. 이름은 다 각각 지어놨지만, 보라고요. 눈으로 보니 반짝거리고 귀로 들으니 반짝거리고 코도 냄새를 맡고 혀도 맛을 알고, 두뇌도 그렇고, 이 모든 게 다 알잖아요, 몸이. 이게 바로 칠성각여래불이에요.
그리고 정맥 동맥이 돌아가는데 이게 돌아가지 않으면 해와 달이 어떻게 움죽거릴 수 있겠습니까. 몸 자체를 알면 외부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돼요. 그거는 해와 달이 어떤 한 혹성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해와 달은 이 혹성에도 있고 저 혹성에도 있고 그래요. 우리 이 혹성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또 내 몸에만 해와 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한테도 있고 딴 혹성에도 있고, 그 해와 달은 언제나 따르게 마련이에요. 왜냐. 물이나 불, 흙, 바람 이것이 다 만들어진 겁니다. 이것이 종합해서 나오지 않는다면 빛이 나오질 않아요. 그 빛이 바로 해도 될 수 있고 달도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바로 우리 마음에서, 어둠도 우리 마음에서 가져오는 거고 밝음도 우리 마음에서 가져오는 겁니다. 한마음 말입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본다면 질서 있게 돌아가게 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지 딴 데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저 별성이 따로 있고 칠성이 따로 있고, 칠성부처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다면 그건 칠성부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이겁니다.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고 칠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칠성부처가 그렇게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거예요. 즉 말하자면 애도 낳을 수 있는 거죠. 만약에 달과 해가 없으면 애를 낳을 수가 없잖아요. 즉 말하자면 여자 남자가 없다면 어떻게 애를 낳겠습니까.
그러니 낳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전부 이게 굴림이 아니냐 이겁니다. 사람의 마음으로서 죽느냐 사느냐 이것도, 옷 벗는 것도 허공에서 그냥 허공신으로 도느냐, 내가 정직하게 자유자재하게 살아서, 벌써 열반이라 하면 살아서 네가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네가 될 수 있어야 열반이에요. 그렇다면 칠성각여래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건 여래의 집이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내가 한마음을 깨달으면 그냥 여래불이에요. 내 몸이 바로 여래의 집이에요. 여래의 집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칠성각 부처님도 되고…. 아니, 어느 조사도 되고 부처님도 되고 어느 신장도 되고 다 되기 때문에 이 우주가 진리라고 하고 길이라고 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
칠성각여래불이 그대로 칠성각여래불로 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칠성각여래불이에요. 고게 그대로 고정되게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칠성각여래불이지 만약에 고정돼 있다면은 그것은, 즉 말하자면 전체적인 칠성각여래불이 될 수 없어요. 정말 어마어마한 겁니다. 우리가 떡 하나를 먹는데 포크로 떡을 하나 꽉 찍었다 이겁니다. 그럼 이게 우주개공을 다 찍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칠성각여래불은 명만 길게 하는 게 아니라, 나고 들고 하는 것이 전부 한자리의 굴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