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苦)라는 그 자체는 본래 공(空)
우리가 대의적으로 따져볼 때는 항상 한마음 도리로서 돌아가지만, 너 나가 있듯이 여기 오늘 처음 오셔서 듣지 못했던 분들도 있고 그래서 여러분이 납득할 만한 기초적인 문제, 자기 자신을 먼저 믿고 알아야 한다는 그 사실을 항상 말씀해드리지만 그래도 오늘 잠깐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제일 처음에 사성제(四聖諦)를 설했습니다. 고집멸도 사제법을 여러분도 다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물리가 터지고 지혜를 얻고자 하는 분, 자기가 자기를 먼저 발견해야만이 가정이나 사회,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모든 것을 다 커버하고 자유자재권을 얻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시고 가시는 분들은 똑바로 들으셔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듯이 인과로 인해서 뭉쳐진 여러분 속에 든 의식, 모습, 생명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苦)덩어리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벌써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고라는 얘깁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 하다못해 지렁이도 어떠한 생명이든 다 고입니다. 그래서 쫓고 쫓기면서 울며 쓰라림을 당하면서 짓밟히고 일어서면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성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첫째, 고(苦)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고를 어떻게 해야만이 멸(滅)하게끔 할 수 있고 또는 착(着)이 없게 할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야만이 그 고 하나를 없애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그 고를 없애는 도리를 일러드린 겁니다. 고만 없애면 집도 없어지고, 멸도 없어지고, 도라는 언어도 없어진다라는 얘기죠. 그러면 여러분을 어떻게 인도했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 누구나 다 오신통이 있다, 오신통 가운데 숙명통이 컴퓨터다, 과거에 입력된 것이 거기에서 다 현실에 나오는 것이니까 거기에다 재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됐던 인과, 유전 또는 영계, 세균 업보가 녹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과거에 입력된 게 지금 현재에 나오는 거니까 팔자운명 타령 하지 말고 거기에다 놔라 이랬습니다. 거기에다 입력을 다시 시키는 반면에 앞서의 입력됐던 것이 없어지니까 모두 무너집니다. 지옥고도 무너지고 업보, 유전, 영계에 끄달리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무너지는 반면에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착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한군데다 놓고 들고 나고 이렇게 하는데 몇 가지가 없어집니까? 그러니 이론으로 달달달달 외울 생각을 하지 말고, 백 번을 외우는 것보다도 한 번 실천하는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공부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날더러 모든 것을 체계 있고 일관성 있게 설법을 해달라고 한다면, 그건 죽은 설법과 같습니다. 체계가 없으면서도 체계가 역력하게 있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고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과거에서 나오는 거든 보이는 데서 나오는 거든 둘이 아니게 나오는 그 자체는 본래 공(空)이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는 “공과 색이 둘이 아니니라.” 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왜 둘이 아니라고 하셨을까요? 그 참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색으로 보이는 여러분 마음이나, 보는 거나,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모두가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습니다. 고정된 게 없으니 색과 공이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만 없앤다면 여러분은 밝은 심안의 심지에 불을 당길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고니까, 그것은 내가 면할 수가 없지. 나는 중생이니까.’ 이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믿지 않는 거는 진짜 부모한테서 자기는 물러서서 다른 부모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여러분을 인도하는 길은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오신통을 비유한 팩시밀리나 천체 무전통신기나 또는 탐지기나 망원경이나 숙명통 컴퓨터나 레이다망에서 지금 오고 가는 걸 다 책정하듯이 그렇게 모두 하고 있는 누진통까지, 전체 시스템이 돌아가는 그거를 몽땅 한데 합쳐서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맡겨 놓고, 잘못된 거는 거기서 다시금 잘되게 할 수도 있고, 잘된 거는 감사하게 거기 놓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 자기라는 게 없이, 공해서 자기라는 건 없습니다. 그거를 몽땅 거기다 놓고 작업을 한다면 잘되는 것도 거기, 못되는 것도 거기,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 바로 그게 고를 녹이는 작업입니다.
고를 녹이다보니깐 착도 없어져 ‘그것이 누구 탓이냐? 내 탓이지.’ 그것이 바로 좌선이고, 마음이 편안해야 좌선이지 어찌 몸이 편안하게 앉았다고 해서 좌선이 될 수 있겠느냐 하고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을 놓을 때, 모든 착도 다 없어지고 욕심도 다 없어지고 할 말만 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법전에서 떨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이 세상을 다 딛고 가는 거나 똑같은 거죠, 평발이죠. 무겁게 평등하게 부드럽게 해주는 그 말 한 마디가 온 천하 법계에 두루하니 그게 법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죠. 한데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 절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강원에서도 가르치고 그러지만, 그전에도 얘기했듯이 백지부터 갖다놔야, 종이부터 갖다놔야 연필을 들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여러분의 바탕이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여러분의 바탕이 지수화풍의 바탕이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재료로 갖추어져 있으니 그 오신통은 바로 법바퀴를 굴려서 불바퀴도 되고, 물바퀴도 되니 그거를 굴려서 자유인이 돼라 이 소리죠. 처음 오시는 분도 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항상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반야심경이든지 뭐든지 달달달 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금강경에도“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그 법(法)도 없느니라. 그 법 안에 그 뜻도 없느니라.” 이랬을 때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금강경을 달달달 외운다고 그렇게 말씀한 뜻을 아시겠습니까? 보살은 이름해서 보살이니라. 그런데 내가 건졌다, 내가 건질 수 있다, 내가 건지겠다, 나다, 이렇게 하는 그런 사람들은 보살 될 자격이, 이름해서 보살이라는 그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입으로만 달달달 외워서 강의를 해주는 것도, 이름해서 보살이라는 그 자체의 이름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 제일 첫머리의 고만 없앤다면, 여러분은 그대로 저절로 도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그 도를, 그대로 자유스럽게 대권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 80까지 산다 하더라도 이 몸을 가지고 도저히…. 그러면 또 이 몸을 벗고서 공부를 할래도 그 타령이 그 타령이에요. 도루묵이죠. 그러니 몸이 떨어지기 전에 이 뜻을 알고 가야 될 것 아니냐는 얘깁니다. 그래서 요다음에 나와도 뚜껑만 열면 나오게끔요. 어떠십니까? 트릿하게 공부하시겠습니까? 누가 대신 먹어줄 수 없는데요. 이 공부는 틀림없이 대신 먹어줄 수도 없고, 죽을 때에 같이 가줄 수도 없고, 똥 눠줄 수도 없듯이 대신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항상 영원히 같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아셔야 되겠기에 사성제의 첫머리의 고덩어리를 녹이는 그 작업만 해라 이런 겁니다.
옛날에 무착 대사(無着大師)가, 그것도 저 치악산에 있을 때 얘기 들었습니다마는, 꿩 치(雉) 자를 써서 치악산이니 이렇게 말들을 하더군요. 거기로 절터를 보려고 갔다가 꿩이 알을 낳았는데 큰 구렁이가 알을 먹으려고 나무 위로 올라가니깐 그냥 활로 쏴서 떨어뜨려 죽였거든요. 알은 살렸으나 그 구렁이는 죽였죠. 그런데 저녁 나절이 됐는데 무착 대사가 하룻밤 새겠다고 하니까, 하얗게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와서 하는 소리가 “들어오십시오.” 하더랍니다. 그래 들어가니까 밥상을 차려 왔는데 젓가락 한 짝만 놨더랍니다.
그래서 무착 스님은 물그릇 국그릇에다가 탁 손을 넣어가지곤 밥을 갖다가 그냥 먹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있다 하는 소리가 “당신이 내 낭군을 죽였어. 그러니까 당신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랬는데…. 정히 그렇다면….” 했습니다. 그 젓가락 한 짝 놓은 거하고 손으로 집어 먹은 거하고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정히 그렇다면’ 했을까요. “정히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감고 있는 동안에 종이 울린다면 내가 당신을 풀어주고, 내가 죽겠으니 나까지 마저 거두어주시고, 만약에 종이 울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원수를 갚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묘한 것이 말입니다, 젓가락 한 짝만 놨는데 그분은 ‘왜 젓가락 한 짝을 갖다놨느냐. 왜 숟가락은 안 놨느냐. 숟가락 좀 주십시오.’ 이게 없이, 아무 소리 없이 물을 탁 축여서 그걸 집어 자셨다 이겁니다.
그래서 먹고 나니, 아! 그냥 구렁이로 변해가지고 자기를 탁 감거든요. 그래 감고 있으니까 아침 새벽에 종이 세 번이 울리더랍니다. 울리니깐 풀어주면서 하는 소리가 “나까지 마저 거두어주소서.” 하고선 그냥 풀어주면서 아예 가버렸어요. 그 순간에 구렁이는 몸이 가버렸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꿩이 말입니다, 날아갔다가 와서 떵! 치고선 또 날아갔다 와서 떵! 치고 그러느라고 코가 아주 뭉그러져서 그 자리에서 죽었단 말입니다. 꿩하고 구렁이하고 모두 세 개를 갖다 한 구덩이에다가 막 묻으려고 하니까 웬 스님이 가면서 하는 소리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서 알을 살리느라 그랬다지만 어떻게 생명 셋을 다 죽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비일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착 스님은 그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서천의 돌이 동쪽에 꽃이 피었네.” 하고요. 그 소릴 듣던 스님은 “아하! 이 요리 맛이 이렇게, 탕 맛이 이렇게 좋은 줄은 난 미처 몰랐네.” 하면서 껄껄 웃고 돌아서서 가거든요. 멋진 거 아닐까요? 젓가락 한 짝 놨는데도 손을 담궈 먹었고, 셋을 다 한데 합쳐서 했는데 “그거 알 살리겠다고 세 생명을 다 죽이고 자비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니까 “서천의 돌이 동쪽에 꽃이 피네.” 하는 소리를 하니, 그쪽 사람 또 멋져요. “탕 맛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하면서 무릎을 치고 껄껄 웃고 돌아서서 가더라 이겁니다.
내가 나를 발견하지 않고는 이런 도리를 몰라요.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팔만대장경을 외로 꿰고 바로 꿴다 할지라도, 법설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충전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광력과 전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구르질 못하기 때문에, 굴리질 못하기 때문에 이익이 하나도 없어요. 말 떨어지면 입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몸도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덕이 안 되죠. 달마대사가 말씀하셨듯이 공덕이 될 수가 없어요. 남을 이익하게 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 자체도 이익하게 할 수가 없다 이거죠.
내가 만약에 실험을 하지 않고 체험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한다면, 이 말도 모두가 허사고 아마 그냥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토막의 이치지만은 아주 성성하고, 그렇게 광대무변할 수가 없고, 그렇게 청정자재천궁(自在天宮), 그 자재 대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이렇게 멋지게 자유스럽게 살고 갈 수 있는 영원한 이 길을 여러분이 등한시한다면, 그건 정말 안 될 말입니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장마다 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뜬 사람이 끌고 갈 때는 둘이 다 빠지지 않지만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감은 사람을 끌고 갈 때는 둘이 다 빠지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우리 지금만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라 역대의 조사들이 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이치도 그렇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인과에 대해서 또 한 토막의 얘기를 하죠. 춘천에서 있었던 얘깁니다. 어느 분이 참 극난히 돈을 벌어서 잘돼가지고 집을 짓게 되어서 집터를 보러 다녔습니다. 집터를 보니까 참 좋은 데가 있어서 터를 닦는데 아, 구덩이 구덩이 그냥 몇 구덩이가 전부 뱀 소굴이더랍니다. 그래 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그 구덩이에다 기름을 끼얹고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고 다 치우고선 집을 거기다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들이 성장해서 장가를 들어서 애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애가 병이 들었습니다. 또 자기 아들도 병이 들고 손주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냥 몸이 붓고 배가 부르고 점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뭐 아들들이 어디 취직을 할래도 그런 문제 때문에 됩니까? 또 자신은 진급도 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애가 딱 죽게 되는데 그냥 뱀 새끼들이 꾸역꾸역 그 몸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죽으니까 또 갖다가 기름을 끼얹고 그거 화장을 시켰지 어떡합니까? 너무 징그러우니까. 화장을 시키고 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랍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저 하루 이틀 사이로 그냥 돌아가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는 자기 산에다가 묻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한 이삼 년 갔는데 산소에 가보면 구멍이 송송송 뚫렸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는 집 마당에도, 울타리에도 뱀이 척 걸쳐 있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이러더랍니다.
그래서 어디 도인이라는 스님을 만날까 해서 아무리 찾아도 도인 스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스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던지 그 해 일년을 그렇게 꼭 물을 떠놓고 향을 피워놓고 정성을 들였더니 아, 삿갓 쓴 허름하게 입은 스님이 지나가더랍니다. 그 스님을 붙들고 그 사실 얘기를 다 하니까 그러냐고 그러면서 “그 산소에도 있고 지금 집터에도 뱀 소굴이 그렇게 있어서 아버지 어머니의 뼈 마디마디까지도 전부 뱀이 돼버렸어.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려느냐?” 하시더랍니다. “어찌 안 듣겠습니까?” 하니까 그 스님이 군데군데 망을 치라고 그러더랍니다. 저 왜 병아리 가두는 그런 거 있죠? 그런 망을 쳐놓고 그 안에다가, 예전에는 겨가 많지 않습니까? 집집마다 겨가 있으니까, 겻불을 피워놓고, 하얀 죽을 큰 함지박에다가 집터에도 세 그릇, 산소에도 세 그릇 갖다놓고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만 해놓는다면 당신을 살리겠노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서 있었는데, 그 스님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있는데 그 산소 구멍 뚫린 데로 그냥 수없이 뱀들이 나오더니 집에서는 기둥 밑에서 수없이 나오더랍니다. 수없이 나와가지고 그 죽을 잔뜩 먹고는 그냥 다 죽는 겁니다, 거기서. 다 죽었어요. 죽어가면서 기어서 그리로 다 들어가니까 거기에서 그냥 타서 그 껍데기는 없어지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아버지의 영혼을 건졌다고 하시면서, 그러고 나니 그 집안에 그런 일이 하나도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그 동네가 전부 불자가 되고 그 식구는 전부 승려로서 입산을 하게 됐더랍니다. 그런 얘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과라는 것이, 그래서 첫째 살생을 하지 마라 그랬는데 항상 여러분한테 묘한 도리가 있다 이런 말을 했죠. 부모를 위해서 토끼 한 마리를 잡아야 할 텐데 어떡하면 살생이 되지 않나를 얘기해 드렸습니다. 일부러 생명을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할 때는 그 토끼도 내 몸이요, 토끼의 생명도 내 생명이요, 토끼의 그 마음도 내 마음이니, 바로 그 토끼를 죽이는 순간 죽인 게 아니라 자비라 이겁니다. 토끼는 바로 나로 인도환생이 됐단 말입니다.
토끼를 만 마리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으로서 인도환생이 됐기 때문에 탕 요리를 한 거죠. 탕 요리예요. 그렇다면은 그것은 약으로도 쓸 수 있지만 그것은 요리도 된 거죠. 영혼을 요리해서 그 껍데기를 벗겨주고, 토끼라는 껍데기를 벗겨주고서 인도환생을 시킨 거죠. 한순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들여놔도 들여놔도 그것이 두드러지지 않고 그거를 몽땅 내서 천도를 시켜도 내간 사이가 없다 이거죠. 줄지 않는다 이거죠. 이 도리가 바로 거기에, 여러분이 깨우치는 도리에 거기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일체 만법이 전부, 행이 전부 도 아닌 게 없고 그러기 때문에 참 광대무변한 도리다, 이런 문제죠.
그래서 이러한 한 토막의 인과에 대한 이야기, 여러분이 그런 것도 옛날 전설의 고향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현실에 그렇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인간으로만 사시는 게 아니라, 지금 공부 열심히 하셔야만이 아마 그런 데에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 데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야 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처가 돼야지!’ 하지도 말고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러지도 말고 ‘죽으면 어쩌나!’ 하지도 말고 ‘살아야 하겠다.’ 하지도 말고 몽땅 그대로 여여하게 그냥 자기를 믿고 놓고 여기서 해결하라 이거죠. 자기 자신이 없다면 세상도 없고 자기 자신이 없다면 상대도 없고 자기가 나왔으니까, 나쁜 거 좋은 게 내 앞에 닥치니까 모든 게 내 탓이다 이겁니다. 좋은 것도 내 탓, 언짢은 것도 내 탓이다 이거예요. 누구의 원망이나 그런 것도 하지 마세요. 모든 게 그렇게 나간다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이자까지 붙어서 여러분한테 공덕이 될 겁니다.
또 한 토막 얘기할까요. 이거는 예전에 어느 큰 스님의 얘깁니다. 어느 수좌가 와서 그 스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둘이죠?” 그러니까 “그렇지, 둘이지.” 그랬대요. 그런데 어느 스님이 와서 또 “돈오와 점수는 둘이 아니죠?” 하니까 “그렇지, 둘이 아니지.”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스님더러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자네 둘이 아닌 줄 어떻게 알았나?”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둘이 아닌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고 묻더라는 겁니다. 그 스님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여러분한테 만약에 둘이 아닌 까닭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좀 대답해보십시오. 둘이 아닌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깐 그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가 이러더랍니다. “만 가지 물에 젖는 까닭입니다.” 하더랍니다. 만 가지 물에 젖는 까닭! 그러니까 큰스님이 또 묻기를 “젖는 것도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고 또 묻더랍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니깐 아무 대답도 못하고는 삼 배를 올리고 그냥 가더랍니다.
여러분은 만약에 ‘그 젖는 것마저도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랬을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돈오 점수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게 전혀 없다 이 소리죠. 내가 그거는 간단히 뒤집으면 될 것이지만 여러분한테 그걸 말해주면 속이 다 드러나게요. 여러분이 밥을 먹고 배가 불러야 되니까요. 대신 내가 먹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멋진 말씀을 하시고 또 한 번은 대답을 멋지게 해버렸어요. 그런데 그만 또 ‘그것마저도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바람에 그만 거기에서 헉! 한 거죠.
또 언젠가 한번은 그거는 나도 직접 본 얘깁니다만, 목사인지 신부인지 하여튼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겁니다. 하니까 그 큰스님은 “하나님이 왜 될 수 없겠나?” 하시면서, “우리는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네.” 하면서 “자네가 요만큼 알면 나도 요만큼 알고 자네가 이만큼 알면 나도 이만큼 아네.” 아! 이렇게 목청을 높여서 “이만큼 아네.” 아,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우스워요. 그냥 곱게 그러시는 것도 아니에요. “자네가 요만큼 알면 나도 요만큼 알고 자네가 이만큼 알면 나도 이만큼 아네.” 아,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여보게, 그 차나 먹고 가게.” 이러거든요.
그때 차를 갖다가, 저 뭡니까? 그 나무 이름도 이제 잊어버려서…. 그냥 베어다가 쪼개가지고 끓이는 겁니다. 그래 그걸 한 차관씩 끓여서, 누구든지 오는 사람마다 먹는데 나는 그때 불청객처럼 그저 거기 가서 그 스님을 할아버지처럼 그냥 보고 그저 몰래 얻어먹고 이렇게 하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누룽지 한 덩어리가 이 우주를 덮고도 남아, 너무 큰 거죠. 그리고 그 누룽지 하나가 이 세상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게 다 먹고도 남아요, 그 누룽지 하나가. 그러니 그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그러니 그렇게 멋진 말씀이니 참 더 할 말 없지 않아요? 그러곤 “차나 한 잔 먹고 가게. 자네가 귀신짓을 하면 자네가 귀신이고 자네가 귀신 노릇을 안 하면 귀신은 없어.” 아, 이러곤 그냥 들어가거든요. 그러니 그 사람은 물끄러미 눈을 멀뚱멀뚱 뜨고 한참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자네가 이만큼 크면 나도 이만큼 커!” 하는 소리에 그냥 눈이 멀건이, 거기 한 십오 분 동안 앉았더니 그때에야 정신을 차려서 가는 거예요. 정신이 아주 그냥 없어져버렸어. 그걸 보고 나는 너무나 우스워서 그냥 웃고 누룽지 한 덩어리 얻어먹곤 조금 또 싸들고 나는 나대로 갔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멋진 양반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지 그저 싸움을 못해서 으르렁으르렁 합니다. 하나도 싸움할 것도 없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할 것도 없어요. 만 가지가 다 젖는 것에 있고 젖는 거마저도 없는 까닭이 뭐냐고 했는데 아니, 뭘 왈가왈부합니까? 네? 만약에 큰 것, 작은 것이 둘이라면 어떻게 이 시대가 지금 진리로써 무한하게 영원히 이렇게 돌아가고 있느냐 이거에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단군 할아버지도 우리의 조상이며 우리 한민족의 어버이시다 이겁니다. 그분도 둘이 아니고, 부처도 둘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 아버지도 둘이 아니에요. 왜냐? 마음이 지혜로우냐 아니냐, 넓으냐 작으냐 이것뿐이지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그 자비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둘이 아니라니까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단군 할아버지는 팔십일자를 두고 제일 처음과 끝을 보면 우리 염주알, 시발점과 종점이 어디냐 할 때 어딥니까? 시발점 종점이 어딥니까? 따로 있습니까? 따로 없습니까? 예? 거기서 차를 타기도 하지만 거기서 내리기도 한다 이거죠. 그래서 염주알 돌릴 때 몇 번 돌리고 나면 제자리로 도로 돌아옵니다. 어떻게 이게 둘입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팔십종호(八十種好)라 했고, 단군 조상도 팔십일자를 남기셨습니다. 처음에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나중에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어때요? 얼마나 맛있는 소립니까? 세상의 생명들이 이렇게 헤아릴 수도 없이, 보이지 않는 생명 보이는 생명이 이렇게 헤아릴 수도 없는데 무종일(無終一)이 아닐까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해서 돌아가고, 고정됨이 없이 색과 공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데 일시무시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 모두가 어떻게 체계 있게, 체계 있는 거는 여러분이 살다보면 그냥 아주 계율 없이도 계율을 잘 지키고 시간도 잘 지키고, 그건 여러분 마음에 달려 있지 않아요? 시간을 잘 지키고 사회적인 상식과 도의·의리·사랑 아, 이런 것도 여러분이 다 충만히 재료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하고 가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달달달 입으로 외우는 것만 하고, 머리로 굴리는 그러한 작업만 하다가 보면 몸도 나빠지고 병들고, 몸 떨어지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몸 떨어지면 머리로 신경 쓰고 머리로 외우고 말로 그냥 달달달 외우던 게 다 떨어질 텐데 어떡하시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하셔서 몸뚱이가 보지 않았어도 ‘아이고, 나는 오늘 큰스님….’ 그건 여러분이 부르시는 큰스님입니다. 내가 커서 큰 게 아니라, 여기 스님네들이 많고 그러니까 이름을 어떻게 붙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늙은이를 큰스님이라고 그러고, 조금 젊은이를 총무 스님이라고 그러고, 시자 스님들이라고 그러는 거거든요. 여러분도 아버지라고 그러고 아들이라고 그러죠? 큰아들 작은아들, 뭐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그냥 정돈해서 살자, 부지런히 뛰자 이런 건데, 그거 보세요. 지난번에도 하나 하니까 일시무시일 하는 것도 그 격이죠. 하나 하니까 하나 해도 하나요, 천 해도 하나요. 둘 해도 하나고, 셋 해도 하나고, 하나 해도 하나입니다. 너무 많으니깐 또 한 그릇 이러다가 나중에는 너무 많으니까 하나도 없다, ‘무(無)’ 이래버렸거든요. 그러니 그 무심 속의, 바로 그 무심 속의 심지에다가 불을 당겨라 이겁니다, 불을 당겨. 자가발전소입니다, 여기가.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아무리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막 쏟아져도 꺼지지 않는 자가발전소 말입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용광로에 넣었다가 작업을 하고 나니까, 나중에 두번째는 자가발전소가 되고, 나중에는 넣어도 넣어도 정말이지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 그런 자유자재의 대권을, 그대로 법자를 마음대로 굴려도 한데 떨어지지 않게 그렇게 불바퀴를 타고 다니면서 법바퀴를 굴리고 말입니다. 물바퀴를 굴리고 용이 돼서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수많은 고기들을 다 먹이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들락날락하고 꽃이 피고 새 우는데, 앞뒤 없는 펑 뚫린 피리를 불어가면서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그 뜻을 잘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경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거를 (양 손으로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감지하고 난 뒤에 그 뜻을 알기 위해서, 그분들은 어떻게 해놓으셨나 하고 뜻을 보니까 모든 것이 지금 현상의 진리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역력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걸 모르고서 아무리 읽어보세요. 뜻을 모르는 그 글은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어요. 난 소신껏 사는 사람이에요. 누가 뭐래도 거기에 관여 안 해요. 모른다 해도 관여 안 하고 안다 해도 관여 안 하고 또는 비구니 뭐 어쩌고 해도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거니깐요. 아무 상관이 없이 나는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그런 그 인간 됨됨이가 문제지, 뭐 높고 무슨 장 하고 큰스님이고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때는 지나가다가도 눈을 꿈벅꿈벅하고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거를 봅니다. 그 눈이 얼마나 부리부리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에 눈썹은 길게 덮히고 말입니다. 어떤 거든지 눈을 보면 그렇게 선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선하고 그럴 수가 없어요. 연쇄적으로 짐승은 사람들의 손에 죽고 살고 이렇게 하죠. 그래서 ‘야!’ 하고선 속으로 소리를 질렀더니, 소가 ‘난 가!’ 하거든요. 그 소 속에 들어가서 소가 되어본다면 기가 막힌 겁니다. 여러분도 지금 금방 돌아가시게 된 분들의 그 속에 들어가 보면, 그분의 살던 그것 다 버리고 가는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 마음이 다 버리고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있을 때 좋았고요. 어떤 분은 ‘아이구, 저거를 두고 죽으면 어쩌나!’ 하고 그렇게 가지 못할 분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요, 아주 어지러워요. 그러나 소 속에 들어가도요, 소는 아무 기탄이 없습디다. 그런데 착이 있어요. 무슨 착이냐? 소로 살던 습이 있단 말입니다. 그 습을 없애주려면 내가 소가 돼야 돼.
그래서 옛날에도 어느 보살이 돼지 속에 들어갔는데 돼지 속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있으니까, “아이구! 돼지물 들어, 빨리 나와.” 이랬거든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죠. 보살이 돼지 속에 들어가서 오래 있으니까 “빨리 나와, 그 돼지 습이 물들 테니까.” 그랬다는 셈으로, 우리는 순간순간 남의 속에 들어갈 수 있고 내가 될 수 있어야 그것이 나툼입니다. 그게 자유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남의 속에 들어갈 수도 없고, 내 속을 감지할 수도 없다면, 죽은 세상 산 세상을 어떻게 커버해 나가면서 나를 건지고 남을 건집니까? 그래서 소가 둘이 아니어서 눈을 꿈벅꿈벅하니까, 내 눈에도 눈물이 글썽 그 눈에도 눈물이 글썽, 빙긋이 서로 웃고 헤어질 때는 바로 그 몸은 고통이 없이, 내 몸이기 때문에, 내 몸 내 주인공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 죽는 법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주인공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기 자성신입니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삼심이 일심이니까, 부처 문수 보현이 바로 일심이자 삼심입니다. 왜냐? 일심이 나오기 이전에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벌써 그거는 법입니다. 몸이 움죽거렸다 하면 활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삼심이 일심이지 삼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습은 셋이나 마음은 일심입니다. 그래서 삼심이 여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심조차도, 어떠한 마음을 낼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일심 자체도 없느니라, 했던 거죠. 그러면 이걸로써 마치고요.
오늘 말씀드릴 것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조계종이 주최를 해서 연등 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연등 행사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거는 물에다가 연등을 띄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인등과 연등이 어떻게 둘이겠느냐 이겁니다. 이 마음 심(心), 즉 말하자면 심지에다 불을 당기면 바로 인등이자 연등입니다. 연등에다 불을 붙이니까 인등이 되죠. 그래서 그 인등에다, 우리가 이를테면 미생물에서부터 나올 때 모두가 우리 고향입니다. 물도 고향이고 불도 고향이고 바람도 고향이고 전부 고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물 없어도 못 살고 불 없어도 못 살고, 흙 없어도 못 살고 공기 없어도 못 사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뿐이 아니죠. 생명들은 다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참, 앞산 뒷산이 어우러져서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있듯이 말입니다. 북한산 남한산 어우러져서 꽃이 피고 새 울고 또 나비가 날아들고 어우러져서 서로가 합쳐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북통일도 기원할 겸 또 우리 마음 한생각 불을 붙여서 참 우리 한 있는 민족이 한이 없이 앞으로 좀더 계발하고 지혜 있게 우리가 문화 문명을 꽃피울 수 있는 그런 데 역점을 두는 것이 우리 산 부처들 아닐까요? 그러니까 잘 생각하셔서 연등 행사 잘들 한마음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신행담도 자주 좀 얘기해주시면 저도 그걸 가지고 검증을 하면서 좀더 여러분을 생각해드릴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갖게끔 해주십시오. 이것도 서로 공부하는 것이니까요. 이 공부가 아무 저것도 없이 하면 상당히 외롭고 심심할 테니깐요. 해도 함이 없이, 써도 쓴다는 생각 없이 쓰십시오. 자기가 없는데 쓴다는 생각이 어딨으며 쓰는 게 어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저것 없는 그 가운데 주먹 하나 불끈 쥐고 내리칠 수 있는 그런 멋쟁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노력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