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는 반드시 죽어 그 개체가 소실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사람이 죽어 없어지면 사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죽어 남는 것은 한줌의 재이거나 묘지 속의 썩어 버린 뼈 조각일 뿐이니, 마치 바람이 어딘가에서 불어와 어디로부터인지 사라져 가는 것과 같다.
죽음은 곧 욕망이 소진해 가는 것과 같다. 삶의 바닥에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몸을 받는 순간부터 개체 유지와 종족보전이라는 욕망 하나로 이 사바세계 속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펼쳐지는 데에 기여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바람과 같이 왔다가 바람과 같이 사라져간다.
한편, 욕망의 속성은 집착이기에 생명체는 지금 살아있다는 현상에 집착하게 되어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도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비록 이러한 노력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죽음 앞에서의 개인과 사회의 집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오용(誤用)될 가능성이 많은 안락사와는 달리 ‘존엄사(尊嚴死)’라는 죽음에 대한 본인의 적극적 결정을 존중하고자 하는 입장도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아직 확실히 선을 긋지 못하고 있는 안락사(安樂死)에 대한 논의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혼란스러운 입장을 대변해 준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생명연장술의 도움으로 죽어야 할 사람도 소생시키고 있지만, 많은 경우 목숨만 연장하고 있는 사회적 식물인간을 양산해 가족과 사회적 부담 등으로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생명 연장일까? 생명과학이나 첨단 의학은 고통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오면 더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기 보다는 조용히 받아들인다. 코끼리처럼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라면 조용히 무리를 떠나 죽을 장소로 향한다. 단독 생활을 하던 동물은 조용한 장소에 숨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미 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몸이 쇠잔해져 욕망도 같이 잠들어 간다.
욕망의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보는 지금의 사회 풍조로 볼 때 과거 우리의 고려장(高麗葬)이란 풍습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어리석은 짓으로 보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부모나 자식이나 때가 되었음을 알고 서로 즐겁게 죽음을 맞이하였을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흥성했던 고려에서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던 고려장이 있었다면 ‘존엄사’는 이 시대의 고려장일 수 있다. 불자라면 스스로 길들여져 있는 자기 내면에서의 욕망과 지금 현재에 머무르고자 하는 집착을 되돌아보아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코 가거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듯 때가 되면 옛 조사의 본을 받아 조용히 내가 선택해서 몸을 벗고 싶을 뿐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