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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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한군데다 모아서 들이고 내라
불법은 자기 마음을 부처로 만들어


귀신 방귀씨를 틔우려면
스님 말씀 중에 귀신 방귀씨 말씀이 나오는데, 귀신 방귀씨를 덜 먹이면 배고파 죽고 귀신 방귀씨를 더 먹이면 배 터져 죽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귀신 방귀씨를 알맞게 잘 먹여서 키울 수 있나요.


마음 소를 기를 때는 방귀털을 먹여서 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귀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빛깔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 털은 빛깔도 없고 쥘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털 자체는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방귀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구요.
방귀라고 하는 거, 귀신 방귀털이라 그러는 거, 우리가 지금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있는 거, 이게 어디 보이기나 합니까? 지금 속으로 설계를 하고 아무리 어떻게 해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내놓은 것마저도 공했는데 어찌 그것이 그렇다고 말을 안 하겠습니까? 판치생모니 뭐니 하고 모두 말해 놓은 것이 전부 덫을 놓은 겁니다. 덫을 놓은 건데 그 덫에서 그걸 알아내고 빠져나가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결국은 한 주먹이 전체의 주먹 안에 들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근데 그걸 말로 해서도 되는 게 아니니 어찌 그걸 말로 하리까!
그래서 ‘대나무 방귀씨를 심어서 대나무 귀신 방귀털을 먹여서 키운다. 그런데 더 먹여도 안 되고 덜 먹여도 안 되느니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나한테 닥치는 대로 가는 거 잡을 필요도 없고 오는 거 마다할 필요도 없이 오고 가는 대로, 그냥 그 중심에 놔라 이겁니다. 놓고 가라는 것이죠. ‘거기서만이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거니까, 모든 건 네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네놈이 다 알아서 할 게 아닌가! 네놈이 이끌어 줄 거고 네놈이 다 할 거고. 몸도 네 시자니까, 네 종이니까 네가 건강하게 해서 이끌고 다니려면 이끌고 다니고, 네가 죽이려면 죽이고 마음대로 해라.’ 하고 왈칵 그냥 다 놔 버리는 거죠.
마음을 돌려서 굴려놓는 자체가 바로 무의 사무 사유, 이것이 팔입니다. 팔 수레공법이란 말입니다. 이 모두를 본다면 하나하나가 그냥 그저 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여러분이 다 지어 놓은 거지 다른 게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게 그냥그냥 살아가는 거 같지만, 그냥 이끌려서 매달려 가는 셈입니다, 살아나가는 게.
그러니 우리 모두 마음을 잘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도록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아주 풍요롭게 하고 내 가정을 풍요롭게 하고, 내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내 나라를 풍요롭게 하려면 세계를 풍요롭게 할 줄 알아야 나라를 풍요롭게 할 수 있죠? 그런데다가 또 수없이 인연 따라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불쌍한 사람을 만나고 불쌍한 짐승을 만나고 이렇게 할 때 한생각에, 내 마음 속에 불쌍한 사람들을 수없이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무명을 벗겨 줄 수 있는 그런 마음 가짐가짐, 그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 바로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고 아주 그 평등공법, 활궁공법 이런 문제들이 그냥 수없이 자동적으로 솔솔 나오게끔 돼 있습니다. 그 모든 게 발전하는 것도, 사과 하나 떨어지는 걸 보고도 그 중력에 대해서 캐치를 했다고 합니다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발전하는 것도 인연의 상대방에 의해서 발전이 되는 겁니다. 그냥 자기 홀로 발전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모두가 차원대로에 높은 것입니다. 차원대로 높은 것이다 하는 거는 얕고 높고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대로에 높고 또는 공업 하는 사람은 공업 하는 사람대로에 높고, 상업 하는 사람은 상업 하는 대로 높고. 왜? 이거 하는 사람을 저거 하래도 못하고 저거 하는 사람을 이거 하라고 해도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거든 얕고 높은 게 없이 생각하라 이겁니다. 다 내 주인공으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원망하지 말고 남을 증오하지 말고, 가정에서나 나가서나 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러 들어왔더라도 남을 증오하지 말라! 모든 거를 내 주인공에다 맡기고 ‘저 사람과 나와 둘이 아닌데 나쁜 일을 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대로 칼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하는 문제가 됩니다. 그런 일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길을 가다가 청년들 한 무리를 만났는데 도무지 돈 내놓으라고 하도 칼을 들고 야단을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급하니까 ‘주인공! 모두가 둘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됩니까?’ 하고 그냥 거기다 맡기고 급한 나머지 막 그냥 부르다가 보니까, 스님도 부르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급하니까! 그러니까 그 청년들이 “에이! 이놈 봐 봤자 시간만 낭비해!” 그러곤 가더랍니다.
이게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에요.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것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자력을 기르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창조력을 길러야 되고 창조를 해내야 되고…. 우리가 인연의 법칙에 의해서 이건 필연적입니다. 그러니까 덜 먹이지도 말고 더 먹이지도 말고 알맞게 먹여서 중도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세요.


마음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막히는 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자비를 베푸는 것도 마음을 일으킴이 아닌지요. 함이 없이 한다고 하지만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 그러한 것은 또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 생활이 불교요, 불교가 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빼놓으면 생활이 없고, 생활을 빼놓으면 불교도 없습니다. 또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 없고 망상이 없다면 부처도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목석이죠. 그렇게 모든 게 뒷받침이 되는 거니까, 망상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걸 한군데다 모아서 들이고 내라는 얘기입니다. 한군데에다 모으면, 이것은 원자 자력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한번 마음을 내서 거기 놓으면 그냥 타 버리는 격입니다.
그러면 왜 법이 되느냐? 한 사람의 생각이, 일체 만생의 생각이 한꺼번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그것이 일체 법이 되는 거죠, 개별적인 한생각이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급하면 급한 대로 해 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때에 따라서는, 급하다고 다른 나라에 있는 지원에서 연락이 옵니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지금 당장 힘이 듭니다. 어떻게 잘못돼서 너무 힘이 듭니다.” 한다면 여기에서 한생각으로 금방 “그렇습니까?” 하는 동안에 벌써 거기로 가는 거예요. 바로 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 한 점의 마음이 의사도 될 수 있고, 박사도 될 수 있고, 과학자도 될 수 있고, 판사도 될 수 있고, 보현도 될 수 있고, 문수도 될 수 있고, 관세음도 될 수 있고, 또는 지장도 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면에서 용왕도 될 수 있고 산신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유껏 자유자재할 것을 여러분이 참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사용 못할 때는, 여러분이 기계를 갖다 놓고도 그걸 배우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기계를 못 쓰는 거죠. 그와 똑같은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계를, 기계라고 해서 안됐지만 사람이 무한의 자유권을 가졌다는 거를 아주 상실하고 색으로만 보고, 항상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아주 다양하게 쓸 줄을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배어 버렸단 얘깁니다, 누적이 됐다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오관을 통해서 내 한 점의 마음속에, 자가발전소도 있거니와 원자력도 거기에 있고, 여러분이 안방에 앉아서 테레비를 보면 세계를 바로 보는 듯이 다 봅니다. 그와 같이 거기에 천체망원경도 있는 것입니다. 또 천체무전기도 무전통신기도 있고요, 전자력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해서 내가 때에 따라서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그 믿음이, 그 한 점을 믿는 마음에 달렸다 이겁니다. 그리고 믿는 것은 찾는 데에 달려 있고 활용하는 것은 지혜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면 나한테 보배를 두고도 쓰지 못하는데 지혜가 풍부하다면 그 한 점의 보배를 가지고 천체무기로 쓸 수가 있는 거죠, 급하다면 말입니다.
옛날 신라 때에 이서고국이라는 나라에서 신라를 쳐들어 올 때의 얘깁니다. 요건 간단하게 예를 들기만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또 여러분이 잘 아시고 있구요. 우리가 조그마한 나라지마는 너무 아픔을 겪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 역사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많은 군졸이 모자라게 됐고 각중에 그런 일이 생기니 너무나 당황해서 그 신라의 인군은 상당히 초조한 감을 가졌더랍니다. 그런데 미추왕이라는 분은 그때 시절에 벌써 능에 들어가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근데 그 군이 모자라서 앨 쓰고 싸우러 나갔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고때 댓이파리 하나씩 꽂은 그런 군졸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그런 군병들이 한데 합세를 해서 그것을 밀어 제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놓구선 온데간데가 없었거든요. 이걸 예를 들어 얘기하는 겁니다. 오늘날은 어떻게 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온데간데가 없으니까, 아무리 사람들을 시켜서 찾아봐도 도대체 흔적이 없어요. 그랬으나 그 미추왕 능에 가 보니까 거기에 그 댓이파리가 수북하게 놓여 있거든요. 아, 그래서 근거지를 찾았습니다. 그건 왜 그렇게 됐던가.
내가 항상 말을 하지요. 우리가 마음으로서의 차원이 높으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없이 그 문제를 분신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요. 그것이 일체 만물만생과 둘이 아닐 때에 그렇게 될 수 있다고요. 그런데 그분은 참 살아서도 나라 걱정을 했거니와 죽어서도 나라 걱정을 하기에 이르르게 되고, 또 나라 걱정만 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그것만 안 것이 아니라 오관을 통해서 오신통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그 오신통을 부리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의 마음의 한 점을 응용해서 모든 그 민간인들을 풀어 가지고 자기가 자기 그 한 점의 마음에서 바로 그분들을 응용해서 분신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분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분 그분이 됐다면은 얼마나 유력했겠습니까.
아주 급한 시기에는, 하다못해 여러분이 만약에 그 미추왕 같은 그런 분들이 지금 이 시대에 있다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계시다면 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지마는 한생각을 냈다 하면 이건 법신입니다. 몸을 한 번 움죽거렸다, 한 번 앉았다가 한 번 딱 움죽거렸다 하면 벌써 이것은 화신입니다. 그러면서 지혜로운 마음을 갖는 데에 바로 그 문수 보현이 따릅니다.
그러면 그렇게 수많은, 지금 과학적인 문제도 거론되고 이렇게 나가는데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느냐? 근데 알고 보면 옛날보다도 아주 더 편리하게 돼 있지요. 그래서 한 점의 그 마음이 보배라면, 지혜만 거기 풍부하게 있다면 하는 소리는, 여러분이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으면 어른으로 성장하게끔 키우기 위해서 오래도록 애를 씁니다. 달마 대사는 면벽을 6년 동안이나 했고, 또 육조 선사는 십 몇 년을 보림을 했듯이, 애를 낳았다고 해서 어른을 만들지 않으면 어른 행세, 사람 행세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도리를 비유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이 한 점이 모든 것을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겁니다. 들이고 내는 데서 믿음을 갖는다는 얘기죠.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이 또 그렇지 뭐 안 그럽니까. 여러분이 이날까지 마음으로 들이고 내면서 살아왔지 뭐 누가 시켜서 이렇게 해 나왔습니까? 바른 대로 얘기죠. 그러면 일체 만법이 어디서 들이고 내고 살림들을 하십니까. 한군데서 바로 살림들을 하시죠. 거기다 지혜만 낀다면, 바깥에서 찾지 않고 바로 안으로 찾는다면, 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그 점입니다. 그 한 점에서 나오는 한생각으로 급하면 ‘아, 이거 이렇게 되면 안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지는데.’ 한다든가, ‘우리 국민이 위태로워져.’ 이런다든가 또는 ‘아, 우리 가정이 위태로워지면 내가 위태로워지고, 또 내 몸이 위태해.’ 이런 문제들이 여러분한테 항상 뒤따르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급하다는 얘깁니다.
이 마음 성품은 바로 그 한 점의 원력으로, 누구나가 영원한 생명의 그 원점은 똑같지만 태양의 근본도 바로 우리의 마음의 한 점의 근본이니까, 또는 천지의 근본도 한 점의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도 전체가 한 점의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그걸로 하여금 환경에 따라서 가정이나 몸이나 또는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도 영향이 될 수 있게끔 자꾸 넓히면서 우리는 자꾸 실험을 해 봐 가면서 체험을 하면서 믿고 물러서지 않고 한군데서만이 들고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왜? 우리의 대문도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뒷문이 있고 앞문이 있다 할지라도 대문은 하나지 둘이 아니에요. 그 대문을 통해서 온 장안에, 장안이라 하면 전체를 말합니다. 그 대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들고 나지요.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대문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대문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도 우주의 전체가 바로 그 대문, 대문 없는 대문에 한 점이 있다는 걸 영 모릅니다. 자기 주장자에, 그 주장자가 바로 빗장이라는 걸 모릅니다. 어디고 통과가 된다는 거를 모릅니다. 어디고 통과가 되고 어디든 급하면 급한 대로 해결할 수 있고, 또는 그대로 맡겨 놓으면 맡겨 놓는 대로, 모르면 맡겨 놓는 대로 거기에서 벌써 무루에서 현재 자기의 그 차원에서 다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당 참 편리하게 사는 폭이죠. 그러기에 사람이 살 만하다는 겁니다. 대장부의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족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금강경의 오안에 대해서...
저는 현대불교의 ‘길을 묻는 이에게’ 란을 통해 스님의 설법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보면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나옵니다. 그것들이 각각 어떻게 다른 경지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찌하면 그러한 경지를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신통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타심통 천안통 천이통 신족통 숙명통 이렇게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모두 누진에 딸린 수하예요. 누진에 딸린 수하. 심부름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오신통에서 벗어나야, 내 모습 통에서 벗어나야, 누진을 통해서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 이런 건데. 이 누진이라는 건 뭐냐. 바로 지금 현재에 컴퓨터 같은 거예요. 입력되는 컴퓨터. 그래서 여러분이 다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자동적인 컴퓨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니까 그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하는 것이 그대로 입력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입력되는 것이 온 우주의 전체에 다 퍼지는 거죠. 여러분이 아시는 것이 다 음파를 통해요. 그래서 거짓말을 못하는 거죠. 거짓말을 한 거는 자기만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알기 때문에 전체가 알게 된다 이 소리죠. 이게 우스운 말 같지만 너무나 현명하고 너무나 현실이고, 너무나 현실에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죽어 가고 모두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뒹굴고 그러는 거 보면요, 너무나 기가 막히죠.
사람도 똑같고 눈도 똑같고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째서 한생각이 틀리다고 그래서 저렇게 살까 하는 생각이죠. 그래서 눈으로 보되 이 육안으로 보는 거는 지금 물질세계만 보는 거지만 심안으로 봐라. 심안으로 본다면 정말 심안으로 또 듣는다 이런 거죠. 그래 심안으로 들을 줄 안다면, 공부가 돼서 심안으로 들을 줄 알게 되고 보게 된다면 바로 천안으로도 보게 되고 혜안으로도 보게 되고 법안으로도 보게 되고 불안으로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온 우주 전체뿐만 아니라, 전체 보게 되는 것이 내 몸 안에서 벗어나서 그렇게 돼야만이,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이 자유스럽다는 얘기죠. 내 모습은 여기 두고도 내 모습 아닌 모습들이 수만, 이 허공에 꽉찰래도 찰 수 있다는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요지가 바로 거기 있는 거예요. 마음공부를 안 하면 심안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육안으로만 보게 되는 거지 심안이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인제 심안이 열리게 되면 자꾸자꾸 순환을 거쳐서 혜안이 열린다. 또 순환이 되면 정말 법안이 열린다. 그 법안이 또 순환을 하다 보면 정말 불안으로 보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순환을 거치는 걸 점수라고 그러고 우리가 갓 상봉할 때가 바로 돈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첫째 둘로 하지 않는다면 둘로 보지 않는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공생으로 되는 것이고 공생으로 되면 공심으로 되는 것이고, 우리가 혼자 봐도 혼자 보지 않고 서로 더불어 보는 거니깐요. 그렇게 해서 공심으로만 볼 수 있다면 불안이 되죠. 이 육안으로 보는 거는 그냥 우리가 지금 현실에 보는 거고 심안으로 보는 거는 마음으로 보는 거고 그렇다 하지만 그 경지가 참 많아서 혜안 법안 불안 이렇게 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차원이 모두 여러분은 모르시고 올라가야 되죠. 모르시면서 올라가고 올라가면서 알게 되고 또 살다 보면 알게 되고,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알게 된다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더 좋은 게 뭐냐 하면 이 내 마음 주인공 하나가 겨자씨라면 일체제불을 다, 일체제불도 각 처 각 급에 부처님 상이죠. 부처님의 모습이고. 그런 걸 다 이 가죽 속에다 넣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러니 쫓아다니면서 모시고 쫓아다니면서 받들고 그렇지 않아도 될 수 있겠죠. 일체 중생들도 다 넣고. 둘이 아닌 까닭이에요. 우리가 몽땅, 이 세상에 모두 일체를 다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한 주먹 쥐어다가 넣어도 쥔 사이도 없고 넣은 사이도 없다. 그러면서도 넣어졌다. 또 꺼내서 내 풀어 줘도 내 풀어 준 사이가 없이 풀어 줬다.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며 보살의 법도입니다. 공법 도리.
여러분이 그렇질 않아서 하나하나를 가지고 부모님이 잘못 돌아가셨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총에 맞아 죽었다거나 6·25 때 무슨 일이 있어서 죽은 사람들, 물에 빠져 죽었다든가 목을 매서 죽었다든가 이런 분들도 그냥 아무리 어렵게 살고 아무리 악하게 살고 잘못하고 살고 그래도 이것이 그냥 무효가 되는 겁니다. 거기다 모든 거를 넣으면 그냥 바꿔지는 거죠. 이해가 됩니까? 이게 이해가 돼야 여러분이 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사람들이 아주 하기 쉬운 것도 하기 쉽지 않게끔 만들어 가지고 그냥 애를 써요. 근데 그렇게 안된다는 거죠. 진짜 자기를 믿는다면 왜 안되겠습니까? 자기 모습은 물질적인 모습이고 보이지 않는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인데, 불성인데 어째서 그걸 믿지 않고 믿을 생각도 안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았다는 거를 알고 그렇게 믿으니깐 믿지 않아지죠?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죠, 그게. 언제나 하나가 있으면 하나가 글로 한데 합쳐져야 견성인 거예요. 통신이 된 거구요. 이게 겹쳐지지 않는다면 통신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게 벌어져서 일을 한데 할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공부하는 게 책만 보고 염불만 배우는 게 공부가 아니고 경전만 보는 게 염불이 아니고, 항상 자기 생각이 투철해야 되죠.
그래서 잘 믿고 잘 하는 사람은 심안으로 믿는 것이고, 그 다음에 더 배워서 정말이지 믿는다는 소리 없이 믿는 사람들은 법안으로 믿게 되고, 또 그 보다도 더 한 소리 없이, 내가 있다 없다 소리도 없고 남들이 있다 없다 소리도 없고 세상이 있다 없다 소리도 없고 그렇게 해 나가는 사람들은 불안으로 해 나가고. 그러니깐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설계할 때는 진화지만 집을 지으면 창조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서
일설에선 창조론이 옳다고들 주장하고, 자연과학 계층에서는 진화론을 얘기하기 때문에 서로가 틀리다고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그것이 다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창조냐 진화냐를 가지고 온통 난리들인데 명확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지금 얘기로 하기 때문에 다르게 들리는 거지, 예전 얘기로 한다면 학술적, 그 경으로 볼 때 무슨 그…, 수로가 다르잖아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내 부(父)가 있어야 내가 잡고 들어갈 수가 있는 거죠. 즉 말하자면 아주 짧게 눈 깜짝할 사이, 고런 사이에 붙어 있는 나의 부가, 즉 말하자면 불성이 바로 거기에 탁 결부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고 결부된 그거를 못 믿는 겁니다, 사람들이. 고 결부돼서 아주 간접적으로 붙어 있는 걸 못 믿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그저 손 하나 놀리는 거, 일거일동 자기 몸에서 움죽거리고 보고 하는 거를, 그걸 못 믿는 겁니다. 각자 보는 겁니다, 자길 빼놓고.
그렇기 때문에 상세히 내가 범적인 무한의 그 우주적인 문제, 소용돌이로 내가 들어가서 배우려면 반드시 거기에 인도하는 길잡이가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안에서. 반드시 안에 길잡이가 있다니까요! 그러면 그 길잡이를 쫓아 들어가야 하고, 만약에 쫓아 들어갈 때에 배가 고프면 그 애비는 자식에게 밥을 먹인다고요. 밥을 먹이고 과자도 사 먹여 가면서 데리고 들어간다고요. 고게 여간 편안한 놈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자식은 애비가 배고프면 주고, 또 다리 아프면 쉬게 해 주고 이러니 아주 편안하게 이렇게 쫓아 들어갈 수가 있는 건데도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체험한 바를 그냥 이렇게 지금 우리말로 하지만 전자에 배운 사람들은, 그 학(學)이 많은 사람은 학으로다 그렇게 해 놓았으니까 그 뒷면의 뜻을 알면 지금 이렇게 쉽게 할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 진화론이라는 게 따로 없고 창조론이라는 게 따로 없고 나툼이라는 게 따로 없단 말입니다. 세 가지가 다 똑같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가 모여서 골인을 해 가지고 또 거기 뱃속에서 자라잖아요. 자라는 과정을 지금 가만히 상세히 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이 없다면, 기어다니는 버러지가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나비가 돼서 날겠어요? 아니, 그것을 왜 못 믿어요?
그러니까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력입니다. 진화력으로서 창조력으로 나타나게 되고 창조력으로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나툼이 있잖아요. 그러면 지금 현재에도 태어나서 나투고 가지 않습니까. 그럼 무(無)에도 나투고 생시에 이 몸도 나투고 있단 말입니다. 현재 나투고 있는 걸 보면 벌써 무에서도 나투고 있는 걸 알아야죠. 이것이 참, 못 믿는다는 것이 이게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집을 하나 지으려 해도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어떻게 어떻게 지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거죽으로 설계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그래서 집을 짓는 겁니다. 이게 창조예요. 설계를 할 때는 진화지만 집을 지어 놨을 때는 창조다 이겁니다.
근데 창조만 됐으면, 창조로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나가 다 살 수 있는 집이 된다 이거예요. 고정적인 한 사람만 고 집에서 산다는 법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 집이 고대로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자꾸 변화돼서 사그러지고 헐어지고 썩어지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게 나툼이다 이겁니다, 전부.
그러니 이것이 우리말로 요렇게 해 놓으니깐 쉽죠. 그런데 그것을 이것 따로 보고 저것 따로 보고 이렇게 논의들을 자꾸 하는데, 길게 자꾸 펼쳐 놓지 말고 자꾸 축소해서 이렇게 봐라 이겁니다. 축소해서 보면 자기가 그대로 움죽거리는 것도, 움죽거리게 하는 것도 다 나툼이다 이겁니다, 벌써 이게 창조가 됐기 때문에. 내가 나기 이전, 벌써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났다 이겁니다. 났기 때문에 나툰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대로 부처 아니냐 이겁니다. 어째서 그대로 부처를 잘 못 믿느냔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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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